[@LACOSTE]
독일 마인츠의 금속기술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해
180권의 성경을 인쇄했을 때가 1450년대다.
고려에서 <직지심체요절>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은 그보다 앞선 1377년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은 인쇄문화의 대폭발을 일으켰고 이른바 ‘근대’의 형성에 핵심적 기여를 하며 서구 역사의 물길을 바꿨다.
우리 역사에선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강명관 부산대 교수의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는 ‘세계 최초’ 금속활자는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고 말한다.
고려의 인쇄기술을 이어받은 조선에서 활자의 제작, 인쇄와 출판, 유통은 ‘주자소’와 ‘교서관’ 같은 국가기관이 사실상 독점했다.
즉 지식의 공급처 및 유통 주체는 국가였다.
어떤 책을 찍을지는 왕과 관료들이 결정했다. “그들은 체제 유지를 위한 책만 찍어냈다.” 사서삼경 같은 유학 서적과 대중 윤리서가 가장 많이 인쇄됐다.
“군신, 부자, 부부 사이의 차별적 윤리의식”을 담은 <삼강행실도>는 아예 법률
(<경국대전>)로 정해 보급에 주력했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중세를 붕괴시키는 쪽으로 작용한 반면,
조선의 금속활자는 중세 체제를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3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 금속활자가 ‘세계 최초’라고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그것이 서구처럼 근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자괴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며 “둘 다 서구에 대한 콤플렉스의 소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실제 조선 사회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 책과 지식이 지배체제에 어떻게 이용됐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양은 금속활자 만들고 그렇게 발전시킨 인쇄술 토대로 엄청난 지적 혁명과 문화적 부흥. 발전 등을 이뤄냈는데.... 우리는 2백년이나 앞서고도 왜 그러지 못한거임?
서양의 금속활자와 기술적인 차이때문인건지. 아니면 하층민들에게 지식이 유입되는걸 꺼려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관리가 있었기 때문인지..
이거에 대해 잘 아시는 분 있나요
[@LACOSTE]
독일 마인츠의 금속기술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해
180권의 성경을 인쇄했을 때가 1450년대다.
고려에서 <직지심체요절>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은 그보다 앞선 1377년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은 인쇄문화의 대폭발을 일으켰고 이른바 ‘근대’의 형성에 핵심적 기여를 하며 서구 역사의 물길을 바꿨다.
우리 역사에선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강명관 부산대 교수의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는 ‘세계 최초’ 금속활자는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고 말한다.
고려의 인쇄기술을 이어받은 조선에서 활자의 제작, 인쇄와 출판, 유통은 ‘주자소’와 ‘교서관’ 같은 국가기관이 사실상 독점했다.
즉 지식의 공급처 및 유통 주체는 국가였다.
어떤 책을 찍을지는 왕과 관료들이 결정했다. “그들은 체제 유지를 위한 책만 찍어냈다.” 사서삼경 같은 유학 서적과 대중 윤리서가 가장 많이 인쇄됐다.
“군신, 부자, 부부 사이의 차별적 윤리의식”을 담은 <삼강행실도>는 아예 법률
(<경국대전>)로 정해 보급에 주력했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중세를 붕괴시키는 쪽으로 작용한 반면,
조선의 금속활자는 중세 체제를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3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 금속활자가 ‘세계 최초’라고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그것이 서구처럼 근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자괴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며 “둘 다 서구에 대한 콤플렉스의 소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실제 조선 사회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 책과 지식이 지배체제에 어떻게 이용됐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번더해요]
그런가...
사실 서양권이 인구도 타 대륙에 비해 ㅈ도 안되고. 땅덩이도 ㅈ만한데. 근대사의 중심이 됐던건 기술의 발전이었자나. 그 토대가 인쇄술 발전으로 인한 지적 혁명이었고.
그래서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을 금속활자로 꼽는거고.
그런 점에서 지식의 유포와 그걸로 이뤄낼 문화 산업의 발전이 엄청 중요하다는건데.
우리는 그 인쇄술과 가장 과학적인 글자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걸 잘 이용했다면 엄청난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게 개인적인 생각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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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권의 성경을 인쇄했을 때가 1450년대다.
고려에서 <직지심체요절>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은 그보다 앞선 1377년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은 인쇄문화의 대폭발을 일으켰고 이른바 ‘근대’의 형성에 핵심적 기여를 하며 서구 역사의 물길을 바꿨다.
우리 역사에선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강명관 부산대 교수의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는 ‘세계 최초’ 금속활자는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고 말한다.
고려의 인쇄기술을 이어받은 조선에서 활자의 제작, 인쇄와 출판, 유통은 ‘주자소’와 ‘교서관’ 같은 국가기관이 사실상 독점했다.
즉 지식의 공급처 및 유통 주체는 국가였다.
어떤 책을 찍을지는 왕과 관료들이 결정했다. “그들은 체제 유지를 위한 책만 찍어냈다.” 사서삼경 같은 유학 서적과 대중 윤리서가 가장 많이 인쇄됐다.
“군신, 부자, 부부 사이의 차별적 윤리의식”을 담은 <삼강행실도>는 아예 법률
(<경국대전>)로 정해 보급에 주력했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중세를 붕괴시키는 쪽으로 작용한 반면,
조선의 금속활자는 중세 체제를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3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 금속활자가 ‘세계 최초’라고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그것이 서구처럼 근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자괴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며 “둘 다 서구에 대한 콤플렉스의 소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실제 조선 사회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 책과 지식이 지배체제에 어떻게 이용됐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