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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 미투가 벌어졌던 이틀간의 기록...박진성시인

피톤치드 4 2205 12 1






웃음과 정보를 나누는 이곳에 적절하지 않은 글일 수 있습니다. 혜량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가을입니다. 허위 미투 이후 2년이 지났습니다. 달라진 것은 별로 없네요. 최근 유사한 사건도 있었고, 당사자로서, 남의 일 보듯 보고 있을 수만은 없네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들을 찾고 있습니다.


이 글은 허위 미투가 벌어졌던 이틀간의 기록입니다. 다소 무거운 내용입니다. 진지하고 어두운 글이 부담스러운 분들은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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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일



  오늘은 종일 제정신이 아니었다. 날짜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몸에 어떤 반응이 생기는 일은 생일이나 기일 같은 날에만 가능할 텐데 종일 설명할 수 없는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 걸 보면 나의 또 다른 생일이거나 미래의 어느 날 나의 기일 같은 이상한 날짜를 지나는 기분이다.    


  2016년 10월 20일. 트위터에서 폭로가 시작된 날짜다. 자세한 내용들은 기억이 안 나는데 트위터에 올라오는 폭로들을 나는 공기의 질감이라든가 어둠의 농도 같은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현실은 때로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액정 너머로 내 이름이 또박또박 적혀 있는 악랄한 폭로 내용들을 나는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허위와 조작, 그리고 날조된 폭로들을 나는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사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마녀를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에워싼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붓는 동안 그 마녀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뭐가 있을까. 대부분의 마녀사냥은 ‘나는 마녀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입까지 틀어막아 놓고 이뤄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돌을 던지면 맞아주고 침을 뱉으면 그게 얼굴이든 어디든 침을 뱉는 대로 내버려 두고 들려오는 욕설들을 그냥 듣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결혼은 했는지,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떤 사람인지 인터넷에서 빼낼 수 있는 정보는 최대한 빼내서 서로 공유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가끔 내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가지고 있는 자료들로 그때 왜 반박하지 않았느냐고. 그 ‘자료’들은 ‘사냥’이 끝난 후에야 자료가 되는 것이지 당시에는 그 자료조차 마녀의 악랄함을 증명해주는 어떤 표식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정말 그랬다.     


  도저히 혼자 있는 일이 불가능해서 강혁의 갤러리로 찾아갔던 기억. 딱히 할 일은 없었다. 혁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내용들을 혼자서만 쳐다보고 있었다. 혼자 있지 못하게 혁이 내내 곁에 있어 주었다.     


  혼자 있지 마라. 혁은 그렇게 짧게만 말하고 내 스마트폰의 전원을 끄고 자신의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밤 10시, 어둠.   

  밤 11시, 더 깊은 어둠.   

  자정, 갑천 천변의 긴 긴 길.   

  새벽 1시, 왔던 자리로 다시 되돌아가기.   

  새벽 2시, 강혁의 차 안에서 보던 하늘, 짙은 어둠.

  새벽 3시, 박진성 죽어라, 박진성 자살해라, 아수라장 트위터.  

  새벽 4시, 실신. 


  다음 날은 더 지독했다. 2016년 10월 21일. 오후 1시. 한국일보 황수현 기자가 거짓 폭로들을 모아 기사로 내보냈다. 나에게는 어떠한 확인도 없이 나간 기사였다. 휴대폰 액정 너머로 나의 얼굴과 이름이 그대로 노출된 채 기사는 빠르게 공유되고 있었다. 황수현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를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모든 요구가 묵살당했다. 최초 폭로 이후 48시간이 채 안 된 시간에 나는 어느새 중대 성범죄자가 되어 있었다. 상습 성추행 … 자의적이지 않은 성관계… 강제적 성관계…, 그런 무서운 말들이 내 이름과 함께 액정에서 뒹굴고 있었다. 장기(臟器) 몇 개가 도려지는 통증 같은 것이 몰려왔다. 


  기사 몇 개가 쏟아지고 이젠 방송이었다. 차마 못 보고 사랑이를 꼭 껴안고 있었다. 이 늙은 반려견은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알고 있을까. 눈 먼 개의 눈동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극단의 상황에서 인간은 초현실을 경험한다. 개의 눈동자가 말을 하고 있었다. 죽어라……, 기사가 아니라 방송이 아니라 나는 나로부터 가장 낯선 인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실신, 다시 햇빛, 실신, 다시 어둠, 그리고 다시 실신. 더 깊은 어둠. 


  그 허위 폭로들과 그 거짓 기사들과 조롱, 그리고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말들의 원본을 2017년 가을부터 하나의 폴더에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폴더의 하나의 문서에 이렇게만 기록해두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장 치욕스러운 건 활자로 책으로 남겨서 후대로 만방으로 기록해두는 것. 그러니까 네가 사라지고 없어져도 너의 더러운 말들은 영원히 살도록 그렇게 영원을 살아서 누군가 너를 기억할 때 너의 더러운 말들이 너의 얼굴이 되도록 해주는 것. 그게 진짜 치욕인 것”. 그 폴더의 파일들을 가끔 열어보다가 또 발작한다. 그리고 실신한다. 발작하고 실신해도 계속 기록하고 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그렇게 실신 상태로 1년을 살았다. 작은 희망을 품는 일조차 조심스러웠고 사치스러웠던 2016년 가을과 겨울의 차가운 날짜들. 한자리에서,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고 얼음이 다시 녹아서 물로 되돌아가는 일이 그렇게 신비로운 일인 줄 모르고 살았다. 꽃이 피었던 자리에 잎이 돋고 그 잎이 물들었다가 지상으로 낙하하고, 그 자리가 겨울의 차가운 공중을 내내 떠받치고 있다가 그 자리로 다시 꽃들이 돌아오는 일이 그렇게 신기한 일인 줄 모르고 살았다. 내 곁에 있는 어떤 사람의 자리는 당연한 게 아니라 내가 어쩌면 일생을 걸고 지켜줘야 할 자리라는 걸, 그 자리를 지키고 보살피는 일이 그렇게 신비로운 일인 줄 모르고 살았다.     


  그렇게 1년을 살았다. 살아 있으니까 다행이라고, 오늘은 그렇게만 주위의 풍경들을 쓰다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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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0일에 쓴 글입니다. 다시 가을, 지금 읽어도 좀 쓰라리네요. 어떤 상처는 정말 영원히 회복 불가능인가 봅니다.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살아야지요.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던 저 시간들에 쓴 원고들이 최근에 책으로 나왔습니다. 시작법에 관한 책입니다. 제목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홍보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절대로 아니니까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들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나의 작품을 내가 열심히 쓰는 것, 그게 최선의 복수라고요. 절대로 무너지지 않고 좋은 작품 써서 보란듯 살아내는 것, 그게 저들에게 복수하는 방법이라고요. 사실 그렇습니다. 적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상대방이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적은 그걸 가장 무서워하겠지요. 희망을 품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눈팅만 하다가, 다시 가을, 조심스레 글을 올려봅니다. 주말 잘 보내시길 빌겠습니다.


 - 박진성 올림


 


4 Comments
Arsenal 2018.09.16 12:30  
안타깝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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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근기 2018.09.16 21:56  
ㅍㅇ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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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한화 2018.09.17 00:39  
무고죄를 엄벌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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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집커플 2018.09.17 06:20  
여성들이 주장하는 바는, 사소한 성추행을 당했더라도 그 기억이 깊이 각인되어 그 당시의 수치심이나 괴로웠던 기억이 평생을 따라다니며 괴롭히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범죄에 대해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면 의도가 없었더라도 처벌을 해야 한다는것이다.

나는 이 말에 백번 동의한다. 그렇기에 수십년이 지나도 그 기억을 잊지 못하고 미투 운동에 동참하는 국내외 여성들이 있다는 것도 백번 이해한다.

그런데, 이런 여성들의 수치심이나 괴로움은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무고로 인해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 받게 되는 수치심과 괴로움은 그렇게 가벼이 여기나?
게다가 무고로 인해 단순히 수치심과 괴로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인들로 부터의 시선, 그로인한 실직, 경제생활의 불가능, 동시에 가족이나 주변인들까지 함께 인생의 나락으로 빠지는 성폭력 피해자보다 어쩌면 더한 피해를 입게된다.

여성들 자신의 고통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똑같은 논리로 무고죄 피해자의 고통도 중요하다.
자신들이 그렇게 괴로움을 잘 알면 무고죄에 대해서도 똑같이 분노해야 한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고통만 중요하고 남의 고통엔 나몰라라 하는 이중성 때문에 나는 작금의 페미운동을 더더욱 지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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