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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우리와 말갈족(여진/만주족)의 재미있는 2000년 관계

불량우유 4 1954 10 0



너무 길면 제일 아래 '결론' 부분을 보세요!

여러분의 '추천'이 다음 글의 원동력입니다!

초록 글자는 우리 측 사료빨간색 글자는 외국 측 사료입니다!


오늘도 가벼운 글을 하나 후딱 써보고자 합니다.

반응이 괜찮으면 우리와 거란의 관계에 대해서도 써볼게요. 



1. 시대에 따라 바뀐 종족의 이름


우리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말갈족', '여진족', '만주족'이란 말을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종종 이들을 전혀 별개의 종족이라 오해하는 분들도 계시는데요. 

사실은 이름만 바뀐 것이지 계통적 흐름이 그대로 유지된 종족입니다(한중일에 통설적 지위에 있는 '일원론').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들은 여러 소단위로 이루어져있는데 이합집산을 반복하다 보니 중심 세력이 바뀌었을 뿐이고,

시대에 따라 '읍루-물길-말갈-여진-만주'라는 다른 이름을 가졌을 뿐이지

사실 종족적 계보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우리는 시대에 따라 '국호'가 바뀌었는데,

이들은 '종족명'이 바뀐 것이지요. 

우리는 일제 치하를 제외하면 나라가 없었던 적이 없었으나,

이들은 금, 청, 만주국을 제외하면 나라가 없던 시절이 더 길기도 했기에 종족명이 중요하기도 하지요.  


오늘은 이들과 우리의 관계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와 중국의 관계가 고조선 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 변화했듯이,

우리와 이들의 관계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 변화했습니다.



2. 부여가 읍루를 지배하다.


어렸을 적에 이런 말을 들어보신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서 단 한 번도 남을 지배하거나 먼저 침공하지 않았다."

군사정권 시절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거짓말입니다.

여러가지 사서에 의하면 우리는 분명 남을 지배했었습니다.


<후한서> 동이전 읍루

한대(漢代) 이래로 부여에 신속(臣屬)되었다.


부여가 언제부터 읍루를 지배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나라 시대'부터라고 하니 기원전 2~서기 1세기 중 어느 시점이라고 보입니다.

하지만 부여가 읍루를 지배했던 것은 명확해 보입니다. 

읍루가 부여를 이탈하는 과정도 사서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삼국지> 동이전 읍루

한대(漢代) 이래로 부여(夫餘)에 신속(臣屬)되었는데,

부여가 세금과 부역을 무겁게 물리자 황초(黃初) 연간(서기 220년 ~ 서기 226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부여에서 여러 번 정벌하였으나, 그 무리가 비록 수는 적지만 험한 산 속에 거주하는데다가,

이웃 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활과 [독]화살을 두려워하여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위 사서에 의하면 황초 연간인 서기 220년부터 서기 226년 사이에

읍루가 부여로부터 이탈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읍루가 부여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시점은 불명확하나 이탈한 시기는 비교적 명확한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지배 기간이 대략적으로만 따져도 수백년에 이른 것으로 보이니,

부여는 상당히 긴 기간 읍루를 지배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읍루는 부여의 가혹한 지배에 이탈을 결심하였고,

부여는 여러 차례 군사를 일으켰으나 끝내 읍루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고 하네요.

이후 이들은 300년이 넘도록 자유를 누립니다.



3. 고구려와 적대적이었던 물길! 백제와 손잡고 고구려를 물리칠 계획을 세우다!


중국 사서에 의하면 400년대 중반부터 '물길'이란 세력이 중국에 사신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 물길이란 세력은 고구려와 상당히 적대적이었던 것이 확인이 됩니다.

심지어 장수왕 시절에는 고구려 북쪽의 10개 마을을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북위에 사신으로 온 을력지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위서> 열전 물길

을력지(乙力支)는 “처음 나라에서 출발하여 배를 타고 난하(難河)를 거슬러 서쪽으로 오르다가 

대여수(太????河)에 이르러 배를 물속에 감추어 두고, 

남으로 육로로 걸어서 낙곡수(洛孤水)를 건너 거란의 서쪽 국경을 따라 화룡(和龍)에 이르렀다.”고 말하였다. 

스스로 말하길 “그 나라에서 먼저 고구려의 10부락을 함락하고, 

은밀히 백제와 함께 물길을 따라 힘을 합쳐 고구려를 취할 것을 꾀하고, 

을력지를 대국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그 가부를 청한다.” 하였다. 

이에 조칙으로, “세 나라를 똑같은 번신으로 마땅히 서로 화순해야 할 것이니, 서로 침입하지 말라.”


당시 물길은 고구려의 북쪽 10개 마을을 빼앗았다고 하는데요.

이때 물길이 함락한 지역은 과거 부여가 있었던 길림 지역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노태돈, "발해국의 주민구성에 대한 연구 현황과 과제", 한국사연구(2003), 25;

송기호, 발해 사회문화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2011), 77]

물길은 서진을 하여 과거 자신들을 지배했던 부여의 땅까지 얻은 것이지요. 

그리고 물길은 백제의 개로왕과 함께 고구려를 남북으로 협공할 계획까지 세웠는데요.

얼마나 이들이 고구려를 상대로 호전적인 모습을 보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황은 고구려 사신이 북위에 가서 한 말에 의해서도 알 수가 있는데요.

서기 504년 4월에는 고구려 사신 예실불(芮悉弗)이 북위에 파견되어 북위 황제(세종)를 동당에서 접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실불은 고구려가 보내는 물품에 대하여 설명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위서> 열전 고구려

“우리나라가 황제를 섬기기로 한 약속을 여러 대에 걸쳐 성실하게 지켰으며,

토산물을 바치는 조공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황금이 부여(扶餘)에서 생산되고, 옥이 섭라에서 생산되는데,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겨나고,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었으므로,

두 가지 물품이 왕의 창고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실로 두 적국의 탓입니다.”


광개토대왕 시절만 하더라도 부여 지역에 '영북부여수사'를 파견할 정도로 이 지역을 장악하였으나,

이제는 물길이 이 지역을 차지하게 되어 북위에 보내는 조공에도 차질이 생긴 것이죠.



4.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말갈! 의외로 고구려의 지배에 순종하다!


500년대 중반이 되면 중국 사서는 이들을 '말갈'이라고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북사>에 의하면 말갈은 북제에 563년, 564년, 565년, 566년, 567년, 568년, 570년, 572년, 573년, 575년에 사신을 보냈고,

<수서>에 의하면 말갈은 수나라에 581년, 583년, 584년, 591년, 592년, 593년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말갈 7부가 등장하는 것도 이때입니다.


그러나 말갈의 사신은 615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등장할 뿐 이후 사신이 뚝 끊깁니다.

오히려 <수서>에 의하면 598년 고구려의 영양왕은 말갈인 1만명을 거느리고 수나라 요서 지방을 공격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말갈이 594년에서 598년 사이에 고구려에 정복되었다고 봅니다

[이인철,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 동북아역사재단(2007), 246].

부여가 읍루를 지배한 데에 이어 고구려도 말갈을 지배하게 된 것이지요.


고구려의 말갈 지배는 고구려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이어지는데요.

이들은 고당전쟁에 동원되기도 하고 신라를 침공하는 데에 동원되기도 합니다.
당태종이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한 다음 

고구려인은 내지로 옮기고, 말갈인 3,300명은 생매장하였다는 기록은 대단히 유명하기도 합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말갈 사회도 큰 변화를 겪습니다.

말갈 7부 중에서 흑수, 불열만 발해 당대까지 이어지고,

나머지 5개부는 사서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고구려는 668년 멸망할 때까지 약 70년 간 말갈을 지배했습니다.



5. 발해의 지배를 받은 말갈!


696년 당의 영주에서 거란족 이진충이 난을 일으키자 고구려 집단과 속말말갈 집단은 탈출합니다.

이들이 곧바로 나라를 세우러 간 것은 아니고,

<신당서>에 의하면 "요수를 건너서 태백산(太白山)의 동북을 거점으로 하여 

오루하(奥婁河)를 사이에 두고 성벽을 쌓고 수비를 굳혔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두 집단이 성을 쌓고 머문 곳이 어딘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요동반도의 동북 어느 지점이라는 견해가 제일 와닿습니다.


하지만 당은 이진충의 난을 진압하고 이해고라는 장수를 보내 

속말말갈 집단의 수장 걸사비우를 사살합니다.

이후 속말말갈 집단은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동력을 잃었는지

고구려 집단에 모두 흡수가 되고 이 집단을 이끄는 대조영이 건국한 나라가 바로 발해입니다.

그래서인지 발해 초기의 '육정산 고분군'에 의하면 

고구려 계통 고분은 상급부터 중하급까지 다양하게 발굴이 되는 반면,

말갈 계통 고분은 1기는 중급부터 하급까지만, 2기는 하급만 나옵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면 발해의 중심부에서도 속말은 발해의 수뇌부였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한편, 재미있게도 이후 속말말갈은 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원래 살았던 길림 지역에는 발해 당대에도 말갈계의 고분들이 발견이 되지만,

정작 속말은 사서에서 완전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지역의 속말은 발해의 통치에 자발적으로 순응을 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사견). 

어쩌면 이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더 구체적인 것은 추후 연구결과를 봐야지 싶습니다. 


반면, 흑수, 불열, 철리, 우루는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활동을 이어갑니다.

특히 흑수는 발해에 상당히 '적대적'이어서 당과 손을 잡고 스스로 당의 '기미주'가 됩니다.

당은 '흑수부'를 설치하게 되었는데요. 발해가 흑수를 공격한다는 것은 곧 당을 공격하는 것을 의미하죠.

하지만 발해의 2대 임금 무왕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흑수부를 공격합니다.

이로 인하여 당과 전쟁이 벌어지고 당의 요청을 받은 신라의 침공까지 받게 되지만 모두 승리합니다.

결국 발해는 모든 말갈을 다 정복합니다.


발해가 흑수, 불열, 철리, 우루를 대하는 태도는 명확히 지배-피지배의 관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발해는 이들의 땅에 지방 통치기구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를 시작하였고,

중국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습니다.

심지어 발해는 흑수말갈 중 일부를 오늘날의 함경도 지방으로 사민하기도 하는데요(별도의 글을 쓸 예정).

신라 말부터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말갈이 관찰되는 것은 발해의 사민에 기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발해의 말갈 지배는 발해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계속 이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흑수, 불열, 철리, 우루가 발해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발해의 2대 임금 무왕 시기부터이지만,

속말이 발해의 지배를 국초부터 순응했기 때문입니다.

즉, 발해는 말갈을 약 200여년 간 지배를 했습니다.

하지만 발해가 926년 멸망하자 말갈은 다시 자유를 얻게 되었고,

우리가 이들을 지배하는 것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6. 고려를 상국으로 모셨던 여진족! 고려의 침입으로 통합이 되다!


'여진'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요사>인데 발해 말부터 등장합니다.

여진과 말갈이란 이름이 혼용이 되다가

발해가 멸망한 이후로는 말갈 대신 '여진'이라는 이름이 통용이 되기 시작합니다.

여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지만

흑수 말갈을 중심으로 여타 말갈들이 합쳐진 것이라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것 같습니다.

다만 철리 말갈은 여진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철륵' 또는 '철리'라고 불리며 독자적인 활동을 합니다.


고려는 918년 건국 이후 꾸준히 북진 정책을 취했습니다.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이자 상국으로 모시면서 방물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종종 고려를 침입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대략 200여년 동안 지속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1107년 국력을 끌어 모아 윤관을 필두로 여진을 침공하였으나 거하게 실패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윤관의 침입을 계기로 여진은 완안 아골타라는 인물로 통합이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7. 고려가 금을 상국으로 모시다.


<고려사>에 의하면 여진의 사신은 1109년 6월 27일 고려의 예종에게 이러한 말을 합니다.

"만약 9성을 되돌려주어 우리의 생업을 편안하게 해주시면, 

우리는 하늘에 맹세하여 자손대대에 이르기까지 공물을 정성껏 바칠 것이며 

감히 기와 조각 하나라도 국경에 던지지 않겠습니다.”

고려는 여진에게 동북 9성을 돌려주었고,

약속대로라면 여진은 자손대대로 고려를 상국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러나 상황은 제빠르게 변화하였습니다.

여진은 1115년 '금'이라는 나라를 건국합니다.

<고려사>에 의하면 완안 아골타는 1117년 3월 고려에 화친을 요청하는데 그가 보낸 서신에는

"형인 대여진금국(大女眞金國) 황제는 아우인 고려국왕에게 문서를 보냅니다. 

우리는 할아버지 때부터 한쪽 지방에 끼어 있으면서 거란을 대국(大國)이라고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父母之邦]라고 하면서 조심스럽게 섬겨왔습니다. 

그런데 거란이 무도하여 우리 강역을 유린하고 나의 인민을 노예로 삼았으며, 

아무 명분 없이 누차 군사를 일으켜왔습니다. 나는 부득이하게 그에 항거하였는데, 

하늘의 도움을 얻어 그들을 섬멸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하건대 왕은 우리와의 화친을 허락하고 형제의 관계를 맺어 대대로 무궁한 우호관계를 이루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여진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으나,

이제는 금이 고려의 형이라는 것입니다.


완안 아골타는 1119년 2월 고려에 다시 사신을 보내는데 자신을 '짐'이라 칭하며 이번에는 고려를 하합니다.

고려국왕(高麗國王)에게 조유(詔諭)한다. 은 군사를 일으켜 요(遼)를 정벌하면서 

하늘의 도움을 받아 여러 번 적병을 무너뜨렸고, 

북쪽으로는 상경(上京)에서부터 남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족의 백성을 어루만져 안정시켰다. 

이제 발근(孛菫) 출발(朮孛)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며, 아울러 말 1필을 보내니 도착하면 수령하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조유'라 함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명령한다는 뜻입니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자손대대로 고려를 모시겠다는 여진은 이제 고려를 하대합니다. 


고려는 1125년 5월 금에 사신을 보내나

금은 고려가 신하를 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받지도 않아 버립니다(고려사).

한편, 금은 1125년 거란의 요를 멸망시키고, 1126년에는 송나라 황제까지 생포하는 기염을 토하는데요.


고려는 1126년 3월 금을 섬기는 일을 논하였는데,

모두가 반대하였으나 당시의 실권자 이자겸이 찬성을 하였고,

결국 왕이 이에 따르기로 하여 1126년 4월 금에 사신을 보내 스스로를 '신하'로 칭하게 되었습니다(고려사).


이로써 우리는 과거에 우리가 지배했던 이들의 신하를 자처하게 되었습니다.

관계가 역전되었습니다.

다만, 금이 고려를 지배하였다거나 통치한 것은 아닙니다.

고려는 단지 금의 번국이 되었을 뿐이지요.

게다가 고려는 금을 계속 꺼려 했는지 양국 사이에는 크고 작은 마찰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1211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금 침입으로 금은 크게 위기를 맞이하였고,

금은 고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나 고려는 철저히 이를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였습니다.

그리고 금은 1234년 몽골에 의해 멸망합니다.

이로써 고려가 금을 상국으로 모신 것은 대략 100년 간 이어졌네요.



8. 조선의 힘의 우위 속에 이어진 여진과의 관계


이성계는 여진을 어느정도 꽉 잡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부하 중에는 여진족 출신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지란 같은 경우에는 아예 조선으로 넘어와 조선인으로 살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초만 하더라도 조선은 여진을 자신의 속국으로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명나라가 여진에 대한 발언권을 높이자 회의를 하기도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3년(1403년) 6월 25일

삼부(三府)가 모여서 여진(女眞)의 일을 의논하였다. 

황제가 여진에게 칙유(勅諭)하여오도리(吾都里)·올량합(兀良哈)·올적합(兀狄哈) 등을 초무(招撫)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라고 하였는데,

여진 등은 본래 우리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삼부(三府)가 회의(會議)한 것이었다. 

그 칙유가 여진의 글자를 써서 알 수 없으므로 여진을 시켜 그 뜻을 설명하여 통역하게 한 뒤에 의논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여진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진은 조선의 변방을 침공하였다가 조공을 보내기를 반복하였고,

조선은 여진을 상대로 회유책과 강경책을 번갈아 가면서 사용했습니다.

특히 조선은 태종, 세종, 세조, 성종, 명종, 선조 대에는 여진 정벌에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이 약 200여년 동안 힘에서 우위에 있는 관계였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가 깨지는 것은 여진이 다시 발흥하면서부터 입니다.



9. 조선이 만주족의 청에게 무릎을 꿇다.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통일하고 1616년 후금을 건국합니다.

광해군 시절의 외교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광해군이 이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생각합니다(사견).


그러나 조선에서 1623년 인조가 임금이 되고,

후금에서 1626년 홍타이지가 임금이 되면서부터 양국의 관계가 악화가 됩니다.

후금은 1627년 1월 조선으로 침공하여 대단히 빠른 속도로 남하를 하였고(정묘호란),

결국 후금과 조선은 1627년 3월 3일 형제의 관계를 맺기로 합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양국 사이의 긴장관계는 이어졌습니다.

후금의 임금 홍타이지(청태종, 숭덕제)는 1636년 4월 국호를 '대청'으로 바꾸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자신들의 '종족명'을 여진에서 '만주'로 완전히 바꿉니다.

청태종은 같은 12월 조선을 재차 침공하였고(병자호란),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1637년 1월 27일 항복문서를 보냅니다.

그리고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그 유명한 삼배구고두례를 행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1637년) 1월 30일

상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조선의 임금은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췄습니다.

이로써 청과 조선의 관계는 군신관계가 되었음이 명확해 졌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청은 조선을 멸망시킨다거나 직접 지배하지는 않았고,

조선은 약 250년 동안 청의 번국으로 남았습니다.



10. 대한(大韓)과 대청(大淸)이 동등한 관계가 되다.


청은 조선의 상국이었으나 조선은 상당한 자치를 누렸습니다.

오히려 청이 조선을 속국화하려고 하였던 것은 고종 시기부터였으나,

이미 이때에는 청도 힘이 많이 빠진 상태였고,

청이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로는 청과 조선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이후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청은 1899년 2월 1일 한국에 '대청국 대황제는 대한국 대황제에게’라는 국서를 보내고,

1899년 9월 11일 두 나라 사이에는 완전히 동등한 관계를 표방한 '한청통상조약'이 맺어집니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6년(1899년) 9월 11일

한청 통상 조약(韓淸通商條約)이 체결되었다. 

〈한청 통상 조약〉 

대한국(大韓國)과 대청국(大淸國)은 우호를 돈독히 하고 피차 인민을 돌보려고 절실히 원한다. 

이러므로 대한국 대황제의 특파 전권 대신 종2품 의정부찬정 외부대신(全權大臣從二品議政府贊政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과 

대청국 대황제의 특파 전권 대신 2품함 태복시 경(全權大臣二品銜太僕寺卿) 서수붕(徐壽朋)은 각각 받들고 

온 전권 위임의 증빙 문건을 상호 교열(較閱)하니 모두 타당하므로 통상 약관을 다음과 같이 맺는다.

(중략)

광무(光武) 3년 9월 11일 

대한제국(大韓帝國) 특명의약전권 대신(特命議約全權大臣) 종2품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 

광서(光緖) 25년 8월 7일 

대청제국(大淸帝國) 흠차의약전권 대신(欽差議約全權大臣) 2품함(二品銜) 태복시 경(太僕寺卿) 서수붕(徐壽朋)


한청통상조약은 두 나라가 서로 황제국으로서 동등한 관계에서 맺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각자가 서로의 군주를 '황제'로 인정하면서 각자의 '연호'를 동등하게 나열한 것도 인상적입니다.

상당히 근대적인 조약으로서 내용도 평등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이로써 대한(大韓)과 대청(大靑)은 서로 동등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1910년 망하면서 우리와 이들과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고,

청도 1912년 멸망하였습니다. 
 


11. 몰락한 만주족! 이들과의 관계가 다시 맺어질 날이 올 것인가?


청의 멸망으로 만주족은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제국 아래에서 만주국으로 잠시 다시 태어났으나 이는 형식적인 나라일 뿐이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일본제국의 지배로 독자적인 나라를 이루지 못하여 만주국과 어떠한 외교관계를 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둘 다 일본제국의 영향을 받고 있는 암울한 시기였지요.


그러나 이후 일본제국의 패망과 함께 만주국은 사라졌습니다.

만주족은 자신들의 나라가 사라졌습니다.

반면 우리는 일본제국의 패망과 함께 부활했습니다.

비록 두 개로 분단된 상태이기는 하나 어쨌거나 우리는 독자적인 나라를 이루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만주족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만주족은 현재 중국 내에서 '만족(滿族)'이라는 이름의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구는 약 1,000만 명에 이르러 결코 적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인구를 그대로 믿어야 할지 여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세재 혜택을 노려서 만족으로 등록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란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족은 현재 자치구는 없으나 자치현이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이대로 만족이 소멸하여 사라질 것인지,

아니면 훗날 이들이 다시 독립하여 우리와 외교관계를 맺을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는 미래의 후손들에게 맡기며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12. 결론


약 2000년에 이르는 관계를 이 짧은 글에 담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모두 읽기 어려운 분들을 위해 짧게 요약을 해보고자 합니다.


ⓞ 그들은 시대에 따라 '읍루 → 물길 → 말갈 → 여진 → 만주 → 만족'로 이름이 바뀌었음. 

① 부여-읍루 : 부여가 읍루를 수백년 간 지배하였으나 읍루가 220년대에 부여로부터 독립함.

② 고구려-물길 : 물길은 고구려에게 적대적이었음. 400년대 후반 장수왕 시절엔 물길이 고구려 북쪽 마을을 점령하기도 함.

③ 고구려-말갈 : 고구려는 594~598년 사이에 말갈 정복에 성공함. 고구려는 말갈군을 여러 전쟁에 동원함.

④ 발해-말갈 : 속말은 발해의 지배에 순응한 것으로 보임. 나머지 말갈은 발해에 적대적이었으나 모두 발해에 정복을 당함.

⑤ 고려-여진 : 여진은 900년대 초부터 1100년대 초까지 고려를 상국으로 모셨으나 때때로 고려의 변경을 침입하기도 함.

⑥ 고려-금 : 고려는 1100년대 초부터 1200년대 초까지 여진족이 세운 '금'의 신하가 됨. 하지만 고려는 금에게 지배당하지 않음. 

⑦ 조선-여진 : 조선이 힘의 우위에 있는 상태에서 조선은 회유책과 강경책을 쓰고, 여진은 방물을 보냈다가 변경 침입을 반복함.

⑧ 조선-대청 : 조선이 1600년대 초에 만주족이 세운 '대청'의 신하가 됨. 하지만 조선은 대청에게 지배당하지 않음.

⑨ 대한-대청 : 양국은 1899년에 똑같은 황제국으로서 서로 동등한 관계를 맺음.

⑩ 식민지 조선-만주국 : 우리가 일본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라 독자적인 외교관계를 맺을 수 없었음. 

⑪ 현재 : 만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자신들의 나라가 없어 우리와 독자적인 외교관계를 맺을 수 없음.

⑫ 미래 : 만족이 훗날 독립하여 다시 우리와 관계를 맺을지 아니면 이대로 만족이 사라질 것인지는 알 수 없음.


우리가 그들을 지배했던 시절도 있었고,

거꾸로 그들이 우리의 상국이 되었던 시절도 있었으나,

최종적인 관계는 '동등한 관계'였다는 것이 재미있네요.


끝.


한울리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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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자동화 01.07 12:03  


응애 도와줘 갤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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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망돌이 01.07 14:25  
저 윤관이 한짓이 역대급 ㅄ짓이었다고 함. 여진족 족장들 초대해서 잔치벌인다고 하고 죽여버림. 이게 후대에도 두고두고 말썽이 되서 대대로 원수가 됨.
유목민의 관습에서 손님은 절대 건드는게 아닌데 금기를 어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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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노예 01.08 13:21  
[@폭망돌이] ㄹㅇ 옛날에 국사교육 받을때는 정복전쟁이라 되게 멋있어 보였는데
선빵도 ㅈㄴ 졸렬하게 치고, 매번 패전한거 보고
ㅈㄴ 실망스럽더라 척준경 아니었으면 국사 교과서에 실리지도 않았을거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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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냥 01.08 23:26  
역사 게시물은 언제나 추천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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