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가장 세종답지 못했던 순간
나는 세종의 독단적인 리더쉽을 척불논쟁이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함.
물론 공론의 정치를 펼치던 왕이었지만, 척불논쟁에서의 그의 행동은 정말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홍천사의 사리각 보수를 위해 세종은 승군 600명 동원을 명하지만, 척불 국가라는 명분 아래에서 신하들이 반대를 한다.
세종은 30일동안 노역하는 자는 도첨(라이선스)을 주고 양식을 가지고 온 자는 15일만 노역 가능을 허락하였으며, 이후. 사방의 남녀노소들이 음식을 갖고와서 승병들에게 시주를 한다. 도성안의 부녀자들 특히 고관들의 부인들이 그렇게 하였다.
신료들은 이 모습에 반발하여 공사중지 요청을 하였고 그 이유는 남은 음식을 버리는 행위는 흉년 기간이기에 너무 아깝다는 것이었다.
세종의 경우 공양이 헛되지 않고 정부의 돈으로 시주를 하는 것이 아닌데 별 문제없다는 식으로 말을 하였다.
영의정 황희를 비록하여 사간원과 사헌부 대신들이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세종은 한발 물러나 사리각의 사리 사용을 유보한다. 척불논쟁이 이념투쟁으로 확대됨을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사건은 일단락 되는듯 하였으나, 문종과 수양대군의 어머니이자 세종의 부인인 소현왕후, 그리고 세종의 두명의 아들이 죽자 세종은 강한 혼란이 오게 된다.
황희: 에잉 나 사퇴할래
이들을 기리기 위한 내불당 건립에 수많은 대신들이 반발하지만 무대응하며 '의심가는 것은 의논하지만 의심가지 않는 것은 독단적인 태도를 취하는 임금이다' 리는 말과 함께 독단으로 결정한다.
물론 여기서 독단이란 독재가 아닌 그에 책임을 진다는 홀로 결정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후 세종은 신하들의 태도를 문제 삼았으며, 신하들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세종의 독단적인 태도만으로 그를 평가할 수는 없다. 수많은 악재로 인한 혼란과 오랜 기간 통치로 인한 피곤함 그리고 키워준 신하들에 대한 배신감 등이 그의 성격을 등장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