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실시간인기 > 실시간인기
실시간인기

동아시아 조총의 역사와 전술, 그리고 병자호란의 패배 '쌍령전투'

미국 3 1748 10 0

조총에 대한 역사와 사용했던 방법과 전술, 그리고 이를 활용했던 병자호란의 쌍령전투에 대한 내용이야.

방대하다보니 좀 부족한 내용이 있을 수 있으니까 양해부탁해!

(댓글로 확실한 정보를 같이 공유하는건 참 좋아. 하지만 조총을 동아시아에서 전술로 활용한 일본이 최고다 이런 이상한 사상은 별로..

그냥 당시에 좀 혁신적이었네 정도로 생각하자. 역사는 역사 그대로 보자.)


조총.png 동아시아 조총의 역사와 전술, 그리고 병자호란의 패배 \
"군대 무기에서 조총(鳥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어린아이도 항우(項羽)를 대적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참으로 천하에 편리한 무기다."


숙종 조 영의정을 지낸 남인 '허적'의 말 中


조총은 말 그대로 새총이야. 하늘을 나는 새도 쏘아서 맞추어 떨어뜨리는 총이다는 뜻으로 중국 명나라에서 처음 붙인 이름이지.

청나라 시대에는 조창(鳥鎗)으로 바꿔 불렀다고 해.


무턱대고 라는 뜻의 일본어인 무댓뽀-무대뽀(無鉄砲)의 어원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긴 하지만 鉄砲(teppo) 또한 소총류의 총포를 뜻하긴 하니까, 총이 없이 전쟁에 나간다. 는 의미 자체는 상통하다고 생각은 든다.


중국무역에 종사하다가 표류된 포르투갈 선원이 일본에 상륙하게 되고, 그 포르투갈 선원이 엄청나게 비싼 값으로 일본 다이묘에게 팔아.

그것을 사자마자 바로 분해해서 그 설계도를 그렸고, 수천 수만자루를 찍어냈다고 해.

(밀덕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조총의 격발방법, 장전방법 등에 따라 종류는 다양하지만 모두 다루기엔 너무나 많더라..

바퀴식 방아쇠, 부싯돌식, 19세기 이후 공이식 등.)


이후 1575년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는 나가시노 전투에서 3천명의 조총 부대를 가지고 당대 일본의 최강 기병부대를 작살냈고,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고 나서 선조가 일본으로 파견한 황윤길 일행이 사신으로 갔다가, 쓰시마 국주(대마도주) 로부터 조총 몇 자루를 받아왔다고 해.

1591년에는 일본의 사신이 직접 조총을 조선에 진상하기도 하였고 (임진왜란이 1592년이야.)


unnamed.jpg 동아시아 조총의 역사와 전술, 그리고 병자호란의 패배 \

그러니까 우리가 잘못 알고있는 사실중에 하나인

"조선은 조총의 존재를 몰라서 임진왜란 초기 패전을 하게 되었다."는 말은 낭설이야. 이미 조선은 조총에 대해 알고 있었어.

다만 그 위력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상황인데, (알고당한게 더 한심해보일수는 있겠지만..)


1593년 2월 

"전리품인 조총을 모방하여 제조하는 과정에 몇가지 문제가 있다."

같은해 12월 

"조총의 제조법이 교묘하여 세심하고 정교한 기술 없이는 제조가 어렵다."

1594년 3월 "주상에게 비변사에서 포수 훈련용 총이 부족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선조실록>

는 내용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발발 이후 그 강력함을 깨닫고 개발하려는 노력이 있긴 했네.


거기다 화약의 주 재료인 '염초'는 지금의 초석(질산칼륨)을 바탕으로 한 재료인데, 지금은 공기중에 질소랑 칼륨을 결합하는 방법으로

쉽게 제조가 가능한 원료지만, 당시 자연산 초석은 중국과 인도, 칠레에서만 대량채취가 가능했고, 초석광산이 없지만 초석밭을 일구거나

동물의 배설물 등에서도 구할 수는 있었다고 해. 유황과 함께 원료단가가 매우 쎘다는 얘기야.


(초석밭 : 흙,거름, 음식물 찌꺼기, 재 등의 혼합물을 봉분 모양으로 쌓아 하수와 소변으로 수분을 공급한 후 몇 달 동안 햇빛숙성 시키면 딱딱한 초석 껍데기가 작고 흰 꽃 모양으로 자랐다. 매우 손이 많이 가고, 지저분하며, 노동집약적 업무였다.)


세종실록.jpg 동아시아 조총의 역사와 전술, 그리고 병자호란의 패배 \

(세종실록 1권)


군기감에서 계하기를,

"군기고에 있는 염초가 다만 3천3백16근이온데, 1년간 봄 가을에 소용되는 염초는 대략 4천 근이온즉, 명년 춘절에 쓸 것도 오히려 부족하오니, 청컨데 더 제조하도록 하시옵소서."

하니, 상왕이(태종이) 그리 하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1권, 1418년 9월 19일>


조선왕조실록 사상 최초로 염초에 관한 기록이다. 연간 최소 4천근이 소요되고 비축량이 3,316근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세종의 1근은 641.9g이니 일년 소요량이 2,566kg이라는 얘기가 된다.)


찬성 허조가 아뢰기를,

"염초를 구워 내는 것이 그 공력이 적지 않아, 한 해 동안에 구워내는 것이 1천여근에 지나지 않는데도, 한 번 화붕을 설치하는데 화약을 허비함이 매우 많습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사신이 비록 화붕을 보고자 하더라도 잠깐 설치하여 화약이 매우 귀함을 보일 것입니다."


하니 주상께서 말하시길,

"염초는 외방에서 구워 내는 것을 제한다면 1년에 1천 근에 차지 않으니 지극히 귀한 편이다. 사신이 화붕을 보는 것은 다만 화약을 허비하는 것 만이 아니라, 만일 중국에서 변고가 있어서 조선의 화약이 귀하다고 하여도, 이를 청구한다면 처리가 지극히 어려울 것이니 이것이 두려운 일이다. 경의 말이 매우 옳으니 내가 매우 기꺼이 받아들이겠노라." 하였다.


<세종실록 54권, 세종 13년, 1431년 12월 24일>


명 사신을 대접하는 데에 화붕(폭죽, 불꽃놀이)에 화약쓰기가 매우 아깝다는 이야기이다.


eee.jpg 동아시아 조총의 역사와 전술, 그리고 병자호란의 패배 \


(유럽의 총포류가 급속적으로 발전했던 이유는 대항해시대 식민지개척과 무역을 통해 초석광산을 어느정도 점유할 수 있었기 때문)


185px-King_Charles_I_after_original_by_van_Dyck.jpg 동아시아 조총의 역사와 전술, 그리고 병자호란의 패배 \

(영국 국왕 찰스 1세는, 국민들에게 1년동안 남자들의 소변을 보관하여 초석농장에 기증하라 하였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 했던 주요 원인 중 하나를 초석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여담으로 대항해시대 선원들의 성욕을 억제하기 위해 음식에 간을 맞추는 데에도 사용했다고 한다, 다만 이 질산칼륨은 다량 섭취 시 심장질환을 유발할 수 있는 위험물질이다. 선원들은 죽어서 성욕을 잃게 된 것.)


초창기 화승총의 성능은 재장전 시 10분이 넘게 소요된 데다가 화력조차 형편없어서, 유효 사거리 내에서도 단단한 장수들의 갑옷을 관통하기는 어려웠다고 해. 하지만 계속 전투에 활용되면서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조총성능의 기록을 번역하면,


- 47미터 이내에서는 새의 몸통이나 깃털이 완전히 산산조각 나고, 78미터 거리에서 몸통은 남아나며, 

155미터 거리에서는 위력이 없다.

- 목표물이 기병인 경우 50미터 이내 거리에서 매우 치명적이다.

- 분당 2회 정도 발사했다.

- 가늠자와 가늠쇠가 존재했다.


이는 사수의 유효 사거리가 약 50미터, 타격이 가능한 최대 사거리는 100미터 내외 정도라는 얘기지.

근데 조선이 활용하던 활, 우리는 활의 민족이잖아? 사거리부터 재장전 속도까지 조총이 활에 비해 좋은지 당시에는 이해를 못했던 거라고 봐.

거기다 화약재료는 포방부의 나라답게 모두 대포에 쏟아붓는 실정인데, 소총포류에 대한 관심이 적었을 걸로 보여.


애깃살.jpg 동아시아 조총의 역사와 전술, 그리고 병자호란의 패배 \

(야사에 이르길 병자호란 이전부터 사용된 '애깃살'은 300여m이상을 조준사격 할 수 있어서 호란 당시 적을 공포에 떨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우습게 봤던 조총은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에서 크게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닫게 하지.

조총전술.jpg 동아시아 조총의 역사와 전술, 그리고 병자호란의 패배 \

재장전 시간이 긴 것을 보완하기 위해 3개에서 5개조 정도로 편성한 뒤에 각 열이 정확한 통제를 통해 발사하고, 

발사한 조가 재장전 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거나 다음조가 앞으로 전진해서 발사하는 전술을 보여주게 돼.

(나폴레옹 관련 영화보면 비슷한 모습 많이 보인다.)


전방을 향한 순간적 화망을 결성하고, 장전시간에 대한 단점을 보완해 거의 연사에 가까운 효과를 보게 된 거지.

특히나 기병은 타겟이 보병보다 크니까, 말이든 사람이든 맞아서 낙마시킬 수 있는 확률이 높아 대 기병전에 매우 효과적이었어.

소리 또한 얼마나 컸을까? 상대방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에 매우 충분했고, 말들 조차 놀라 나자빠질 정도였다고 하니..



용기병.jpg 동아시아 조총의 역사와 전술, 그리고 병자호란의 패배 \

서양의 기사단 또한 총포류가 나오고 나서부터 힘을 쓰지 못했는데, 경기병화 되어 기동력을 더 강화해 대응하거나

우리가 아는 스타크래프트의 용기병(Dragoon)유래인 권총 형태의 화승총을 휴대하고 운용하는 등 변혁을 시도하지만 

모두 성공하지는 못했어.

(말타고 활쏘는것도 개빡센데 총은 맞았겠냐고)


아무튼 조총은 중국, 일본, 조선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베트남, 시암, 사파비왕조, 무굴제국 등의 남,중앙,서 아시아에서도 활용은 됐다고 해.


조총은 대기병 장비로서 강력한 면모를 보였지만, 잘못 활용되면 아무 의미없는 무기임을 보여주는 전쟁사가 있어.

바로 병자호란 당시의 패전 중 하나인 쌍령전투야.


1637년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북상했던 경상도 속오군 근왕병 4만명은 1월 3일 경기도 광주 쌍령에서 기병 위주의 청군과 만났고,

당시 속오군 4만은 대부분이 조총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해.


남한산성.png 동아시아 조총의 역사와 전술, 그리고 병자호란의 패배 \

알다시피 광교산에서는 크게 승리하지만

쌍령을 기반으로 좌 우로 주둔한 허완과 민영의 군대는 처참하게 패배했고, 이 쌍령전투가 조선의 항복에 큰 영향이 있었음은 다들 알거야.


당시 청군은 300명 정도의 기병 위주의 군대였고 조선의 4만 속오군은 조총병 위주의 전열보병 이었는데, 대기병 화력이라던 조총병이 왜 패한걸까?


1. 양측의 군대 숫자가 우리가 아는 바와 다를 가능성


일단 조선의 속오군이 4만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짚어. 쌍령이 4만명이 주둔할 만한 지형은 아니기 때문이었지.

실제 투입된 병력은 6~8천명 정도로, 한 번에 4만명을 전부 동원할 수 없어서 먼저 집결한 병력으로 추정된다고도 하더라.


거기다 당시 경상 속오군을 상대한 청나라 병력이 300은 아니라고 하는데, (6,000명 정도로 추측함.)

민영이 이끄는 조선군 부대와 교전한 청 팔기군 수는 300이라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기는 해.

<인조실록 34권 1637년 2월 26일>


"날이 밝자 적기 수백이 진 앞까지 쳐올라왔는데, 이어 수천의 적기가 산성으로부터 엄습해오니, 바야흐로 산 위에서 총탄과 화살이 서로 오고갔습니다."


<승정원 일기> 허완의 아들 허장의 전투술회 상소 中


어쨌든 쌍령의 좌 우로 나뉘어 주둔했으니까 대충 민영의 4천과 청의 300이 맞부딪혀 10대 1 이상의 교환비를 보이며 개박살이 난 거지.



2. 조총 훈련의 양면성으로 인한 속오군의 한계, 그리고 첩보의 부족


속오군이라 함은 조선 임진왜란 시기에 재편된 지방군인데, 농병일치제도로써 평시엔 농사를 전시엔 병사가 되는 체계야.

즉 중앙군처럼 직업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훈련도가 당연히 낮을 수 밖에 없지.


하지만 조총은 활이나 다른 냉병장기와 다르게 습득이 쉬워서 대강 2주면 익힐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다고들 하잖아.

그래서 당시 경상 속오군이 조총위주의 부대로 편성되었다는게 정설과 같은데


이게 바로 단체 전술적 훈련이 부족했던 맹점으로 드러나. 

위에 서술했던 교대발사 전술이 위력을 발휘하려면, 발사통제가 일괄적으로 가능해야 하고 전방에 어떤 상황이 와도 겁먹지 않는

마인드 컨트롤이 확실하게 되야 한다는 전제가 붙어야 해.


근데 전방에 수백의 기병이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와중에 농민출신 군대가 조준사격을 정확하게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되는거지.

해서 유효 사거리인 50미터에 들어오기도 전에 겁에 질린 속오군이 난사를 시작했고, 조직적 일제사격은 커녕

정작 유효 사거리에 들어왔을 때는 제대로 쏘아 보 지도 못하고 겁에 질려 달아나다 서로 깔려 압사하거나 기병에 도륙이 됐다고 해.

(당시 총검이 있던 상황도 아니고 기병이 붙었는데 조총수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

(서양에서는 명령없이 발포하는 병사를 참수하는 등 일제사격 전술통제에 굉장히 신경을 썼다고 해.)


그리고 쌍령전투는 경상 속오군이 원했듯이 민영과 허완의 군대 사이 도로를 통해 청군이 진입한 게 아닌

민영의 군대부터 야음을 틈타 각개격파를 시도했다는 것으로 보아,

적군이 바로 코 앞에 있음에도 첩보전이 부족해 패배했다는 설도 있어.


(조총 유효사거리 50미터는 사람이 뛰어도 평균 15초내외인데, 말타고 오면 순식간이긴 하다.)



3. 문신이 또...


쌍령 전투의 패전원인 하나로 이야기하는것 중에 

장교들의 지휘가 매우 형편없었다는 설인데,

지휘관 허완은 사람보는 눈이 매우 깐깐했던 이순신에게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고, 유성룡에게도 천거를 받아

여진족 상대로 승전했던 경험이 있는 능력이 아예 1도 없는 졸장은 아니었어.


조선 속오군 훈련이 개판인건 지휘관이 더 잘 알았을거고, 허완의 한계는 휘하 문신들의 지휘 개입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설이야.

당시 민영의 군대 내에서 지휘권도 없는 경상감사 심연의 종사관 도경유 라는 문신이 제멋대로 비장 박충겸을 참수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청나라 군대가 민영의 군대를 침공하자 속오군은 각자 지급된 10발의 탄약을 소모한 탓에

탄약과 화약을 지급하던 도중 참수당한 박충겸의 아들이 원한을 품고 주둔한 진영의 화약고 폭발사고를 일으켰으며,

보급하던 수령 2명과 군사 수십이 그자리에서 폭사하고 조선군이 동요하는 와중에 팔기군 300에게 토멸되었다고 해.


4. 청측의 기록은 상기 내용과 조금 다르다.


교차검증을 위해 청태종 실록을 살펴보자.

癸亥先是往征朝鮮。圍其國王時有援兵自外至管兵部多羅貝勒岳託率兵敗之時席爾圖岳多貴奉岳託令領每牛彔護軍一人


每旗護軍校二人往駐岡上席爾圖岳多貴進與敵戰岳多貴被創先還席爾圖率眾擊敗敵兵仍立岡上岳託遣人諭令回軍席爾圖隨


令眾軍退而以身殿被傷墮馬死有席爾圖同年彔人郭邁下馬呼曰。將領死矣。豈可棄其屍耶。時本旗國舅阿什達爾漢牛彔下


護軍校布當克勒。聞之揚聲呼止眾軍令收席爾圖屍並砍其本旗巴彥牛彔下孫達里俄莫克圖牛彔下薩木哈圖邵塞牛彔下


科費達三人而布當克勒並不待取屍仍率眾竟至貝勒駐營處及眾軍進擊敵兵布當克勒又不前進。徑渡石橋河向本營而去布


當克勒應鞭一百貫耳鼻眾護軍亦應各鞭一百貫耳鼻孫達里薩木哈圖科費達既聞布當克勒呼止仍不用命應死


護軍校達岱牛彔下尼勘。蘇爾都牛彔下佟嘉山俄密納牛彔下喀塔亦論死。奏聞。


上命孫達里薩木哈圖科費達護軍校尼勘。佟嘉山喀塔等六人俱免死各鞭一百貫耳鼻布當克勒及臨陣不前者


四十一人俱免貫耳鼻各鞭一百




<청실록 태종문황제 1637년 윤 4월 25일 中>


요약 해석하면

1637년 윤4월 25일 홍 타이지는 1637년 1월 2일~3일간 남한산성 인근에서 벌어진 조선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실두의 시신을 되찾지 못하고 적진에서 후퇴한 장졸들에 대한 처벌을 시행한다.

당시 남한산성을 포위한 요토는 조선 근왕병이 온다는 정보에 병력을 이끌고 반격에 나선다.

요토는 실두와 요도고이에게 병력 약 5백여 명을 주어 산위에 포진하게 하였고 조선군과 치열하게 싸운다.

요토의 회군령에 병력을 퇴각시키던 실두는 상처를 입고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급히 퇴각하던 팔기군을 고마이가 저지시키고 장수의 시신을 버리고 갈 수 없다 말한다.

이에 호군교(바야라 주완 이 다) 부당커러가 도주하던 팔기 병사 3명을 베어버리고 

병졸들에게 실두의 시체를 찾아오라 명한다.

그러나 조선의 반격이 만만치 않자 부당커러도 시신 수습을 포기하고 본영으로 회군한다.

이에 법관은 부당커러와 부하 바야라 41명에게 채찍형과 귀와 코를 뚫는 형벌을 선고하였고

장교의 명을 거부한 병졸 순다리, 사무하투, 커피다의 사형을 언도하였고,

또한 호군교 니칸, 퉁쟈산, 카타도 장수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죄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홍 타이지는 모두 사형을 면하고 부당커러와 바야라 41명은 채찍형을,

니칸, 퉁쟈산, 카타, 순다리, 사무하투, 커피다는 채찍형과 귀와 코를 뚫게 하였다.


이 기록은 쌍령 전투로 추정되는데, 우리가 아는 일거에 끔찍하게 당한 전투가 아닌, 생각보다 치열했던 전투라고 기록이 남아있지.


네 가지 설에 대한 해석은 펨창들에게 맡겨볼게.

(쓰다가 한번 날렸더니 엄청 기운빠진다.)


아무튼 좋은 도구만 가지고는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사건이야.

(지금 미국처럼 그 갭이 너무나 크면 의미없는 말이긴 하지만 말야.)


긴 글 읽어줘서 고맙고


펨창들끼리 서로 싸우지말자 제발.




*출처

3 Comments
자카르타김 2020.10.28 22:03  
역사글은 언제나 ㅊㅊ

럭키포인트 20,165 개이득

맥짱 2020.10.29 09:57  
오늘 역사글 많네용

럭키포인트 4,353 개이득

댓글유도빌런 2020.10.31 16:25  
이런 쌍령~

럭키포인트 15,552 개이득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