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쿵푸팬더 1에 등장한 시푸와 타이렁.
이 둘의 관계를 한 번 써 보려 한다.
둘은 단순히 무협지에서 자주 그려지는 얽히고 뒤틀린 스승과 제자가 아닌
너무나도 복잡하지만 잘 읽히고, 굉장히 현실적이면서도 드라마틱한 관계이다.
시푸는 젊어서부터 그 유명한 쿵푸 마스터 우그웨이의 제자, 쿵푸 고수였다.
그는 어느 날 살고있는 제이드 궁전의 대문 앞에서 한 아이를 줍게 되는데.
그 아이가 바로 타이렁이었다.
타이렁은 시푸를 무척이나 잘 따랐으며 쿵푸 실력 역시 비범했다.
타고난 재능을 내보이며 시푸를 감동시켰으며 시푸 역시 타이렁을 아들처럼 대하며 많은 기술을 전수했다.
허나 우그웨이는 타이렁 내면의 사악한 면모를 직감적으로 느꼈고, 타이렁을 용의 전사로 발탁하지 않았다.
용의 제자란 전설로 내려오는 비급인 용문서를 읽을 자격을 갖춘 전사를 뜻하는데.
이를 읽으면 천하에 그를 감당할 적이 없어진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비급서.
타이렁은 이에 분노해 마을을 때려부수고 제이드 궁에 다시 쳐들어가 제 손으로 시푸까지 꺾은 후 용문서를 강제로 취하려 했으나
우그웨이에 의해 저지당한 후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렇게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매우 많을 것이다.
이 편이 훨씬 간단하니까.
아이들이나 보는 만화영화니까.
하지만 한 번만 내 말을 믿어보길.
내 해석이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꽤 시간이 흐른 후.
타이렁은 정말 우연히. 정말 운명처럼 잡은 기회로 탈옥에 성공한다.
그리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당연하게도 제이드 궁전.
시푸와 타이렁의 재회 장면.
마치 바람이라도 살랑 드는 듯 문이 열린 후 시푸는 지그시 눈을 감는다.
시푸가 눈을 뜨면 어느새 타이렁이 눈 앞에 와 있다.
이는 단순히 '여러분, 타이렁은 이렇게나 조용하면서도 치명적으로 빠르며 아주 섬뜩합니다.'
라는 식으로 읽힐 수도 있겠으나
몰입은 언제나 디테일에 있는 법.
타이렁을 주워왔던 바로 그 대문이 살며시 열린 후 시푸는 눈을 감는다.
그냥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가벼우면서도 고마운 인연인 줄 알았는데.
나는 잠깐동안 눈만 감았다가 뜬 줄로 알았는데.
내가 거둬들였던 애제자 타이렁이 이제 제 발로 제이드 궁전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있다.
타이렁이 잠깐 엇나가는 줄로만 알고 살짝만 눈을 감듯 모른 척 했을 뿐인데
타이렁은 어느새 가장 위협적인 적이 되어 이제 시푸 앞에 나타나 있다.
스승님,
제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너의 집이 아니다.
나 또한 너의 스승이 아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요?
이렇게 되어야만 하지.
짧고 간결한 대면 이후 둘은 바로 싸움에 돌입한다.
여기서 화려한 액션씬에 가려진 정말 중요한 대사들이 많다.
당신의 나약함 때문에 20년을 감옥에서 썩었어!
당신은 내가 용의 전사인 걸 알고 있었잖아.
언제나 알고 있었지!
하지만 우그웨이가 나를 부정했을 때는 어떻게 했지?
어떻게 했느냐고!
누가 나한테 꿈을 심어줬지?
누가 내 뼈가 부숴지도록 훈련시켜줬나?
내 운명을 부정한 게 누구야?
타이렁은 제이드 궁전에 깔린 무기들을 내던져 시푸를 공격하는데
면이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추는 명검을 받아내는 시푸.
검에 반사된 시푸의 표정은 착잡하고도 처참해 보인다.
내가 했던 모든 건 다 당신이 나를 자랑스러워 했으면 해서였어!
이제 내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한 번 말해봐 시푸!
나한테 말해보라고!
나는.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네가 자랑스러웠다.
넌 내 자랑거리였어.
그게 내 눈을 멀게 했지.
네가 내 뜻대로 되어가는 것을 보며 난 참 많이도 기뻤다만,
정말.
정말 미안하다.
이것이 바로 타이렁과 시푸의 진심.
타이렁은 일평생 시푸가 자신을 자랑스러워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훈련에 임했다.
자신이 용의 전사가 되면 시푸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것 같아 용의 전사에 모든 걸 내바쳤던 것.
그러나 우그웨이의 말 한 마디로 그것이 산산조각나고.
시푸마저도 그것을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들였다.
실로 세상이 무너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시푸는 사실 그런 게 다 필요없을 정도로 타이렁을 사랑하고 아꼈다.
그냥 그의 존재 자체가 시푸에겐 언제나 자랑거리였으며
타이렁이 엇나가게 된 게 그에게는 언제나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이 모든 것이 다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타이렁.
그러나 돌이키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이후 영화는 그냥 포가 개입해 타이렁을 이기고 끝나 버린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는 정말 잘 짜여졌다.
단순했던 두 캐릭터의 바람이 이뤄지지 않았고 그에서 시작되는 단순한 엇나감.
그 파장이 이렇게 응어리지고 커져 서로를 진심으로 위했던 둘이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되는 이 드라마틱함.
여태까지 이렇게 잘 짜여진 관계도를 본 적이 없음에
여러분들께도 이 감동을 나눠주고 싶어 이 글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