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성 전투
시노자키아이2
15
4016
12
0
2021.06.01 23:32
동래성이 이름에서 어느정도 유추하실수 있겠지만
부산에 있는 내성입니다. 부산성이 포구 인접지역이었다면
내륙 진출로에 있는성인데, 의외로 이 동래성전투를 모르시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사실 승전이 아니고 패전인데 그것도 일반 양민까지 결사항전하다가 모두 참수당해 죽었습니다. 가슴아픈일인데 잊혀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소개해봅니다.
아래내용은 나무위키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첨사 정발이 지키고 있던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하루만에 동래성에 도달했다. 제승방략에 규정된 대로 양산 군수 조영규와 울산 군수 이언성의 병력이 도착했고 경상 좌병사 이각과 경상 좌수사 박홍이 동래성을 구원하러 왔지만, 병력이 열세였던 탓에 딱히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심지어 이각은 동래성을 구한답시고 산에 진을 치겠다며 빠져 버렸다. 사실상 도망간 것. 양산 군수 조영규도 동래성을 구원하러 왔지만 공성전시 외곽에 별도의 병력을 배치해 구원군을 차단하는 일본군의 전술에 밀려 후퇴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래성에 도착하자 전투를 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어서 송상현에게 보여주었다.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비켜달라.
즉, 지나갈 테니 길 좀 열어달라는 소리.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戰死易假道難 (전사이 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즉, 길을 빌려주느니 싸우다 죽겠다는 소리.
이에 양군 사이에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으며, 초반에는 일본군이 패하고 후퇴했으나 곧 전열을 재정비해 다시 공격했고 결국 조선군이 중과부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게 되자 부채에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뒤 관복으로 갈아입고 북향 사배(임금을 향해 절)를 올린 뒤, 항전을 이어가다 전사했다.(관복을 입은 채로 항전)
고니시 유키나가는 송상현이 비록 적장이긴 하나 그의 용기에 감탄했고, 전투가 끝난 후 정중한 예를 갖추어 송상현의 장례를 치러주었고 추모비를 세웠으며, 부하들에게 그의 충직함을 본받으라고 훈시했다.
그 뒤 조선군 병사들은 전부 전사했으며 동래성 주민들도 저항하다가 무참히 학살돼 해자에 파묻혔고, 이는 2005년에 수안역 공사 도중에 발견되었다. 사후에 이조 판서, 찬성에 추증되었고,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과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이후 탄금대 전투에서 말아먹긴 하지만 조선군이 그 정도 규모의 병력을 모아서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시간을 벌어준 덕이다.
부산에 있는 내성입니다. 부산성이 포구 인접지역이었다면
내륙 진출로에 있는성인데, 의외로 이 동래성전투를 모르시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사실 승전이 아니고 패전인데 그것도 일반 양민까지 결사항전하다가 모두 참수당해 죽었습니다. 가슴아픈일인데 잊혀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소개해봅니다.
아래내용은 나무위키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첨사 정발이 지키고 있던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하루만에 동래성에 도달했다. 제승방략에 규정된 대로 양산 군수 조영규와 울산 군수 이언성의 병력이 도착했고 경상 좌병사 이각과 경상 좌수사 박홍이 동래성을 구원하러 왔지만, 병력이 열세였던 탓에 딱히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심지어 이각은 동래성을 구한답시고 산에 진을 치겠다며 빠져 버렸다. 사실상 도망간 것. 양산 군수 조영규도 동래성을 구원하러 왔지만 공성전시 외곽에 별도의 병력을 배치해 구원군을 차단하는 일본군의 전술에 밀려 후퇴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래성에 도착하자 전투를 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어서 송상현에게 보여주었다.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비켜달라.
즉, 지나갈 테니 길 좀 열어달라는 소리.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戰死易假道難 (전사이 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즉, 길을 빌려주느니 싸우다 죽겠다는 소리.
이에 양군 사이에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으며, 초반에는 일본군이 패하고 후퇴했으나 곧 전열을 재정비해 다시 공격했고 결국 조선군이 중과부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게 되자 부채에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뒤 관복으로 갈아입고 북향 사배(임금을 향해 절)를 올린 뒤, 항전을 이어가다 전사했다.(관복을 입은 채로 항전)
고니시 유키나가는 송상현이 비록 적장이긴 하나 그의 용기에 감탄했고, 전투가 끝난 후 정중한 예를 갖추어 송상현의 장례를 치러주었고 추모비를 세웠으며, 부하들에게 그의 충직함을 본받으라고 훈시했다.
그 뒤 조선군 병사들은 전부 전사했으며 동래성 주민들도 저항하다가 무참히 학살돼 해자에 파묻혔고, 이는 2005년에 수안역 공사 도중에 발견되었다. 사후에 이조 판서, 찬성에 추증되었고,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과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이후 탄금대 전투에서 말아먹긴 하지만 조선군이 그 정도 규모의 병력을 모아서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시간을 벌어준 덕이다.
이전글 : ㅇㅎ) 노예로 잡혀온 엘프 만화.manwha
다음글 : 삼성직원의 열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