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민군 장교의 위대한 활약
너무도 비극적이었던 전쟁 6.25
김일성의 남침으로 시작된 것으로
이번 글에서는
6.25 남침에 가담했던
한 인민군 장교의 이야기를 다뤄보려고 해
오늘 소개할 인물의 이름은
정봉욱으로
그는
일제강점기였던
1924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났으며
성장한 뒤에는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고
팔로군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어
이후 일본의 대공습을 피해
소련으로 건너갔다가
일제가
패망하고
김일성을 따라
북한에 입성한 인물이야
6.25에 참전하였고
다부동에서 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아군까지 포격(인민군과 국군이 섞여 있는 지점에도)하라는 명령을 듣게 되지
군대라는 조직의 특성상 결국 까라면 까게 되어
어쩔 수 없이 포격을 하였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군의 분투로 전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정봉욱은
전쟁에서 이기던 지던
본인은
이 사태의 책임을 뒤집어 쓰고 죽을 목숨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되었어
그리고 그는 당번병 김유각을 데리고 국군에 항복하는 것을 선택했지
이 항복은
국군에게 있어 매우 의미가 컸는데
정봉욱은
은폐 및 엄폐가 매우 잘 이뤄졌던
인민군의 포병 진지를 상세히 진술하였고
그가 가져온 정보들은
백선엽=>워커=>맥아더의 라인으로 보고 되었으며
그것을 토대로
B-29 폭격기 98대가 동원되는
폭격이 이뤄져
인민군은 결정적 타격을 입게 되었지
이렇게 다부동 전투의 승전에 공헌한
정봉욱은
이제 더 이상 인민군이 아닌
대한민국 국군으로서 전선(특별임관으로 중령부터 시작)에 서게 되었는데
인민군의 전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는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들을 세웠어
그리고 이러한 전공들을 바탕으로
정봉욱은 국군에서 승승장구 하여(다만 이는 그가 같은 '공산당 출신'인 박정희가 이끈 5.16 군사 쿠데타에 가담했던 덕분도 있었음)
1965년
인민군 출신이었던
정봉욱은 육군 제7사단장
즉 장군의 위치에 오르기에 이르렀지
그리고 정봉욱은 다시 한번 무공을 세우는데
1967년
북한군 60명이 대대적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방으로 400미터까지 진출하는 도발을 하자
사단 포병 화력을 동원하여
적 전방 GP를 박살 내버림
* 정봉욱의 명령으로 무려 600여발의 포탄이 퍼부어졌고 도발해 왔던 북한군들의 피가 흥건했다고 해
* 그리고 정봉욱은 다음날 직접 확성기를 통하여 북한군 사단장의 실명을 거론하며 욕설과 함께 엄중경고를 날렸다고 하는데... 도발해왔던 북한군 사단장은 그가 인민군 시절 알고 지낸 후배였다고...
7사단장, 3군 사관학교 초대 교장, 논산훈련소장을 지낸
정봉욱 장군의 생애는 분명 공과가 있을 거야
하지만 정봉욱 장군은
대한민국을 위해 세운 빛나는 전공들과 함께
매우 청렴하고 강직했던 군인으로 기억되는데
본인의 부인이 부대 지프차를 사용하자
소외양간에서 자게 만들었으며
장군의 신분으로 직접 잔반통을 뒤져
취사병이 업자들과 짜고 돼지고기를 빼돌리던 것을 적발하기도 하였어
그리고 그 어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인사청탁이 들어와도 모두 거절했다고 하지(청렴함으로 이름을 남긴 한신 장군도 정봉욱 장군을 보고 자기보다 더 지독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해)
또한 정봉욱 장군은
노년까지
안보 관련 활동을 하여
북한 정권의 비인간성을 비판하는 강연들을 하였는데
또 한편으로는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가진 자들이 먼저 베풀 줄 알아야 한다고 늘 강조하였다고 함
* 그리고 본인 역시 자신이 받는 연금의 절반을 불우이웃들을 위해 기부하는 삶을 살았지
* 생전에 정봉욱 장군은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에 모두 능통하였다고 해
* 정봉욱 장군은 2018년 95세의 나이로 영면하였으며 대전 국립 현충원 장군 묘지에 안장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