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에 없는 동양화만의 악습
그것은 바로 감장인(鑑藏印)이다.
고서화를 수집해 나만의 보물로 간직하며 감상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돈 많고 권력 많은 높으신 분들의 버킷리스트였는데
당나라 때 궁정에 도화사(圖畵使)를 두고
명필이나 명화를 황실이 수집하는 과정에서 '이건 내꺼니까 자랑????' 이라는 의미로
수장자인 황제가 감상하고 찍은 도장을 '감장인'이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황실만이 아니라 민간에서도 유행하게 되었으며
감장인을 통해 해당 고서화의 진품 여부, 제작연대, 누구의 손을 거쳐 소장되었는지 등을 밝힐 수 있다.
물론 아무리 자기 소유물이 됐다 하더라도
고서화 아무데나 감장인을 찍는 건 원작자에 대한 무례라고 생각했기에
정말로 심미안이 뛰어난 개념인들은
원작의 아름다움을 망치지 않으면서도 원작의 가치를 살리고 자신의 소장품이었다는 흔적을 남기려
감장인의 모양과 크기, 찍을 위치까지 세심하게 골랐다.
불행히도 이런 매우 감장인은 드물었고
상당수는 반달리즘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서화를 훼손시켰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런 몰개념한 인간들이 찍은 감장인 때문에
후세의 우리가 감상에 집중할 수 없는 대표적인 고서화로
14세기 원나라 때 화가 방종의(方從義)의 작품 '고고정도(高高亭圖)'가 있다.
대만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중인데
보다시피 붉은색으로 찍힌 도장이 여럿 보일것이다.
문제는 저 도장들 중에서 고고정도를 그린 방종의가 찍은 건 하나도 없고
죄다 후대 소장자들이 찍은 감장인이라는 점이다.
이 감장인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고고정도 하단부 왼쪽 구석에 찍힌
'길태화양사기도서기(吉泰和楊士奇圖書記)'
명나라 때 정치가, 문인이었던 태화 사람 양사기(1365~1444)가 찍었다는 의미이다.
그 바로 위에 찍힌
'상구송락심정진적(商丘宋犖審定眞跡)'
청나라 때 청백리, 문인이었던 상구 사람 송락(1634~1713)이 진품임을 감정하고 찍었다는 의미이다
고고정도 상단부 왼쪽 구석에 찍힌 '석거보급(石渠寶笈)'
청나라 때인 1744년, 그때까지 궁중에서 수장하고 있던 황제의 어필을 비롯한 서화류를 정리한
석거보급이라는 책을 편찬했는데 이 목록에 포함된 고서화라는 의미로 찍은 것이다.
고고정도 상단부 오른쪽, '고고정도'라고 쓴 글자 밑에 찍힌 '어서방감장보(御書房鑒藏寶)'
자금성 내 경양궁에 있었던 황제의 문서를 관리하는 어서방에서 보관했다는 의미로 찍은 것이다.
여기까지는 고고정도의 운치를 깨지 않으면서
그림 구석에 찍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봐줄만 하다.
헌데 문제는 바로...
개념을 똥이랑 같이 쳐 싸서 흘러보냈나 싶을 정도로
고고정도 상단부 정중앙에 찍힌 '건륭어람지보(乾隆御覽之寶)'
청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재위 1735~1796)가 그림을 감상하고 찍었다는 의미이다.
여백의 미를 중시하는 동양화에서 원작자가 일부러 공간을 비워둔 자리에다
다른 감장인들보다 무식할 정도로 큰 도장을 그것도 정가운데에 찍는 바람에
그림이 아니라 도장이 먼저 주목받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고고정도 가운데부분 우측에 찍힌 '가경어람지보(嘉慶御覽之寶)'
청나라 제7대 황제 가경제(재위 1796~1820)가 그림을 감상하고 찍었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개념없이 여백이 아닌 그림 위에 찍었지만 지네 아빠인 건륭제가 찍은 것에 비하면 선녀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에 찍힌 마지막 감장인 '선통어람지보(宣統御覽之寶)'
청나라 최후의 황제 선통제(재위 1908~1912)가 그림을 감상하고 찍었다는 의미이다.
자 지금까지 살펴본 고고정도의 감장인들이 만약 하나도 없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다른 나라에서도 저 감장인 ㅈ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는지
컴퓨터그래픽으로 고고정도에서 모두 지워버린 게 있다.
언뜻 이렇게 보면 뭐가 이쁜가 싶겠지만
이렇게 비교해 놓고 보면
ㄹㅇ 선녀 같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엿같이 제일 큰 감장인을 쳐 찍은 건륭제는
고고정도뿐만 아니라 다른 고서화에도 감장인 함부로 찍고
심지어 자기 감상평을 그림에 끼적거려대는 결례까지 범했는데
이를 본 미국의 중국화 전문가 마이크 설리번은
"지칠 줄 모르는 원기왕성한 사람이요, 탐욕스러운 미술품 수집가며
빈약하고 독단적인 감식가였으며, 자신의 제국의 역할의 한 기능으로서
중국의 미술 유산 위에다 자신의 지울 수 없는 표시를 남겨두도록 결정했던
바로 그 지칠 줄 모르게 제기를 쓰고 낙관을 한 바로 그 사람"
라며 크게 비꼬았다.
참고로 중국화만 예시로 들어서 그렇지 엄연히 동양화이니 우리나라도 다를바는 없었다.
사진은 추서 김정희의 불이선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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