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북침설, 남침유도설 등 좌파 수정주의론이 모조리 개박살 난 계기 (feat. 보리스 옐친)
여기서 '수정주의'는 세부적으로 몇 가지로 나뉘는데, 다음과 같음
1. 북침설
- 말 그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고 역사적으로 진실로 규명된 남침론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한국과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했다는 설
- 북진통일론을 주장한 이승만과 공산권 방어를 위한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북한을 선제공격했다는 설
- 북한이 주장하는 설. 냉전 시기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동독,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이 설을 지지했으며, 6.25 전쟁 참전 당사자인 중국도 과거에는 이 설을 지지함. 다만 공산권 중 유고슬라비아는 예외적으로 남침론을 지지함
- 과거 장 폴 사르트르와 같은 다수의 서방 좌파 사회주의 성향의 지식인들도 '미제의 사주를 받은 남한 괴뢰분자'들이 북한을 선제공격했다는 북침설을 믿었음
2. 남침유도설
- 한국과 미국이 북한을 자극하여 남침을 유도했다는 설
- 1952년 미국 좌파 언론인 I. F. 스톤이 제기하였고, 1960년대 D. W. 콩드가 <조선 그 불행한 역사>를 통해 발전됨
- 미국이 몰락 위기에 처한 이승만 정권을 지키고, 미국의 대 공산권 봉쇄전략을 실행하기 위해서 벌인 거대한 자작극 내지는 음모라고 정의함
- 따라서 한국과 미국의 전쟁 관련 문서들은 모두 조작된 것으로 치부함
- 브루스 커밍스 교수도 스톤의 이론적 바탕을 긍정하기도 함
- 과거 다수의 우리나라 운동권이 이 설(과 교전확대설)을 지지하였으며, 지금도 <한겨레> 등 운동권 출신 좌파 언론들이 이 설을 정설이라고 주장한 바 있음
3. 교전확대설
- 남북한 사이의 교전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는 설
- '한반도는 1945년부터 사실상 내전상태였고 1950년 6월 25일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
-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한국전쟁의 기원>을 통해 지금까지 주장하고 있음. 과거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남침 자체에도 의구심을 가졌으나 1990년대 이후 결국 북한의 남침 자체는 인정함
- 중국은 한중수교 이후 이 설을 지지하고 있음
4. 민족해방전쟁론
- 제국주의의 고통을 받는 남한 인민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이었다는 설
- 공산주의 이론에 따른 정당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전쟁을 누가 일으켰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봄
- 당연히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이 지지하는 설
- 과거 우리나라 일부 운동권이 이 설을 지지했으며, 지금도 NL계는 이 설을 지지함
그런데 이 설들이 모조리 개박살 나고 깨지게 되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1994년 6월 2일 김영삼 전 대통령과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의 한러정상회담
이 자리에서 옐친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건넨 문서는 바로...
1950~1953년 한국전쟁에 관한 아카이브 문서
즉 6.25 전쟁 전후 소련이 작성한 기밀 문서였음
이 문서는 당시 7월 중순으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 준비로 공개가 미뤄지다가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자 1994년 7월 20일 공개됨
당시 김일성 조문 문제로 NL 운동권이 ㅂ신짓을 하던 시기였는데 이 시기에 정부가 이 문건을 공개함
그리고 이렇게 공개된 이 문서를 통해 6.25 전쟁이 김일성의 주도면밀하고 집요한 계획에 의해 벌어진 남침이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됨
이 문서 속의 내용은 다음과 같음
당시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승인 요청을 48회나 거절했으나 결국 49번째에서 승인함.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음
1.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을 시점
2.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은 3000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
3. 미국과의 전면전으로의 확대 우려
4. 1949년 3월 당시 소련은 핵무기가 없었음 (개발하던 중)
소련, 중국의 외교관들을 위한 리셉션 자리
(소련 참사관들에게) 김일성: ‘중국 통일이 완료됐으니 이제는 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요. 통일을 원하는 남조선 인민의 열망을 저버리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면은, 밤에 잠이 안 옵니다.’
그러나 소련 참사관들은 반응이 없었음
(다시 소련대사에게) 김일성: ‘3일이면 응진반도를 끝내고, 며칠이면은 서울에 들어갈 수 있는데, 필리포프 동지는 왜 허락을 안 해주는지...’
* 슈티코프: 테렌티 시티코프. 소련군정 최고사령관
* 1개월 3단계: 3단계에 걸쳐 1개월 내에 적화통일을 완수하겠다는 것. 실제로 김일성은 광복 5주년인 1950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에서 적화통일 완수 축하 기념식을 열 예정이었다고 함
그러나 북한의 예상과 달리 UN군이 참전하자...
‘친애하는 이요시프 비싸리요노비치 (스탈린) 시여, 우리 자체 힘으로서는 이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의 특별한 원조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소련의 직접출동이 여의치 않다면 중국 등 다른 나라들과 국제의용군이라도 조직해 도와주십시오.’
- 김일성과 박헌영이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1950.9.29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여전히 6.25 전쟁(북한에선 '조국해방전쟁'으로 부름)이 한국과 미국에 의한 제국주의적 북침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음
- 정전협정 체결 바로 다음 날인 1950년 7월 28일 평양 군중대회에서 김일성이 한 연설
- 북한은 여전히 대외적으로도 이 북침설을 주장하며, 대내적으로도 6.25 전쟁을 이렇게 정의하고 자기네들이 승리했다고 교육하면서 정전협정 체결일인 7월 27일을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일'로 지정함
Best Comment
하지만 지금 정부에게는 현시대의 바람직한 인물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