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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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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jp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삼국사기는 우리나라 고대사를 아는데 있어 필수적인 자료 중에 하나이고, 


그나마 삼국사기로 있기에 알 수 있는 부분도 많다.




그러나 이상하게 대중에게 삼국사기는, 특히 김부식은 이미지가 묘하게 박혀 있는데 이는 신채호의 공(?)이 크다.









1.jp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이두문과 한자번역의 구별에 어두워 


한 사람이 수명이 되고 한 땅이 수개의 땅으로 변하는 등 


전후가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부분이 많아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신채호





신채호는 김부식을 거의 '역사적 죄인' 수준으로 평가하며 김부식이나 삼국사기를 시종일관 매도했고


내용에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많다, 사건중복이나 전후가 모순되는게 많다는 이유로


'역사서' 에 역사적 가치가 없다는, 역사서가 들을 수 있는 최대의 조롱을 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한것은 이렇게 한국 고대사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것이 (의도는 전혀 반대였지만)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수정론이 아님. 주의)으로 이어져서 한국은 고대사 전부 쌩구라인 나라라는 식으로 되어


생전 신채호의 성향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사학의 논리에 더 힘만 실어주는 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나라 역사 연구에 근대적인 실증론적 방법론을 도입한 사람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본인 학자들인데,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모순에 있으니 초기기록 전부 구라다' 는 식이 되어버려서




이른바 백제사를 예로 든다면,


백제의 왕 중에 외국의 역사서에 처음 이름을 보이는 사람이 바로 근초고왕이다.


근초고왕은 중국의 '진서' 와 일본의 '일본서기' 에서 모두 이름이 나오는데,




1. 삼국사기 초기기록 전혀 믿을 수 없음


2. 일단 다른나라 역사서에서 이름이 확실하게 나오는 가장 빠른 왕은 근초고왕


3. 그러니 근초고왕부터가 실제로 존재하는 왕들이고 그 이전 백제 왕들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은 판타지의 영역이다





라는 식으로, 백제사는 근초고왕부터 되서야 겨우 역사라고 부를만하고,


그 이전 삼국사기에 써진건 환웅이 웅녀에게 마늘 먹이는 수준의 이야기가 되는것이다.



근초고왕은 그나마 300년대 중반이라고 하고,


비슷한 문제로 신라는 아예 500년인 지증왕 때부터야 역사로 인정해주던게 일제시대 일본인 학자들의 시각이었다.





그러나 어쩌라는것인가? 일본인 학자들은 둘째치고


당장 우리의 신채호 선생님부터가 '삼국사기는 역사적 가치가 없다' 라는데...




물론, 당연하게도 김부식은 '삼국사기는 구라책이다' '그러니 한국 역사는 더 뒤부터 봐야 한다' 가 아니라


'삼국사기는 구라가 많다이다' '그러니 한국 역사는 더 앞으로 봐야한다' 는 논지였지만





어쨌건 그나마 남아 있는 문헌을 구라라고 해버리는 이상 증거가 없는것이다.









초창기 한국사학계에서 활동하던 이병도는 이런 일본인 학자들의 견해를 비판하며


'아니...아무리 그래도 근초고왕부터 역사라는건 좀 심하지 않나..' 하며



'못해도 고이왕 때부터는 써져있는 기록도 우리나라 역사기록이라고 할만하다'


'신라도 마찬가지로 내물 마립간 시절까지는 끌어올려야 한다' 는 논지를 주장해서




백제는 100여년 가량,


신라는 거진 150년 가량 실질적인 역사를 끌어올렸다.





1.PN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학창시절에 삼국시대 공부하다보면 고구려 태조왕, 백제 고이왕, 신라 내물 마립간이 유독 '태고내' 로 강조된건 그런 이유 때문.








그런데 이런 이병도의 나름대로는 우리나라 역사를 끌어올리기 위한 시도마저도


사실 잘 보면 그 시대의 한계를 직면하고


초창기 일본인 학자들의 '초기 기록 불신론' 의 영향 아래 있는 셈이다.


못 믿는건 똑같은데 믿을 수 있는 시기를 조금만 더 끌어올려자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본인은 고사하고 


신채호도 역사서로 취급 안하는 삼국사기인데..








1.jp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어찌되었건 이런 시각은 60년대까지도 학계에서 지배적인 시각이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부터 고고학계의 김원룡을 중심으로 실증적인 자료에 근거한 비판이 나오기 시작하고


70년대 '천관우' 를 중심으로 일대 전기를 맞이한다.


그는 오히려 '초기 기록 긍정론' 을 주장했다.










1.jp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뭔 소리야;; 이거 기록이 앞뒤가 안 맞는다니까??"






1.jp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ㅇㅇ 근데 그거 주어를 좀 바꿔보면 말이 됨."








1.jp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







이를테면, 삼국사기에 백제에 관해선



고구려의 주몽이 아들 온조와 비류를 낳고, 이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에서 남하했는데, 


온조는 위례성(서울)에 도읍하고


비류는 미추홀(인천)에 자리잡았으나, 


미추홀은 소금기도 많고 농사도 안되어 가난한 반면, 위례성은 백성들이 평안했기에


수치심을 느낀 비류가 자살하고 남은 미추홀 백성들이 온조에게 갔다는 잘 알려진 '온조 설화' 가 있고





온조와 비류의 아버지가 주몽이 아닌 우태(優台)라는 사람이었고,


우태가 죽은 뒤 형제의 어머니 소서노가 주몽에게 시집을 갔으나, 주몽이 아들 유리에게 고구려왕 자리를 넘겨주자


비류가 설득하여 형제가 남하해 백제를 세웠다는 '비류 설화' 가 있다. 


그리고 비류 설화에서는 미추홀이 살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는 없다.






삼국사기에 백제 건국설화라고 두 가지가 있어 이야기가 앞뒤가 맞지 않는데,


천관우식으로 따지면



1. 백제의 왕계는 주몽-온조의 온조계가 있고 우태-비류의 비류계가 있었다


2. 처음엔 비류계의 영향력이 쎘고 그때 비류설화가 먼저 나왔다.


3. 이후 온조계의 영향력이 커지고 백제를 장악하여 만들어진게 온조 설화다.





...라는 식이다.




이런 천관우의 시도를 바탕으로 그동안은 건드리기 뭐했던 삼국시대 초기기록에 대한 해석들이 불을 지피게 된다.







1.PN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여담으로 천관우는 '일본서기' 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주어를 바꿔보면 말이 됨.' 이라는 시각으로 살펴보면서,



그동안 일본서기라는 사서를 건드리는 것에 대해 매우 꺼리는 분위기의 국내 실정을 타파해서


백제사, 특히 가야사 등의 연구에 그야말로 일대 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사실상 없던(못쓰던) 고대 사서 하나가 한국사 연구에 하나 툭 하고 튀어나온 셈이니 말할것도 없다.







한편 그렇게 봉인되던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가히 '해금' 되고 난 뒤에 연구가 활발해지고는


80년대부터는 다시 '긍정론' 도 뛰어넘어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론' 이 대세가 되었다.




대략 "기록된 일이 벌어진것 같긴 한데, 시기라던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수정해서 한번 살펴보자" 라는것.





가령 기록에는 백제와 신라가 한판 전쟁을 펼쳤다고 나오는데, 고고학적 상황도 그렇고


당장 문헌에서 봐도-


신라가 소백 산백까지 너머까지 가서 백제랑 싸우는데, 


정작 그 시점의 다른 기록을 보면 경상도 주변의 소국들하고 싸우면서 정리하느라 바쁨


기록대로면 어제 저 멀리 소백산맥 너머까지 군대를 파견시키더니 그 부대 오늘 회군시켜서 바로 옆동네 치고 있는격-





좀 뭔가 이상해보이는 경우가 있다고 치자.


그러면 이 전투 기록을 구라라고 하는 대신에,


약간 연대를 조정해서 1세기쯤 뒤로 물려보니 


그떄쯤이면 고고학적 상황도 그렇고 두 나라가 한판 붙어볼만 한다던가,



혹은 주체를 좀 조정해서


백제가 싸우는 대상을 신라 말고 다른 세력, 이를테면 좀 가까운 쪽에 있던 진한의 소국들로 바꿔서


싸우긴 싸웠는데 대상이 좀 달랐는데 기록이 정리되는 과정에서 신라라고 정리되었다던가 하는 식이다.





이런 수정론은 의외로 생각보다 중국, 일본의 사서나


고고학적 발굴하고도 비교적 앞뒤가 상당히 맞아떨어져서



현재 지배적인 학설이고 노중국, 주보돈, 노태돈, 김태식 등 현재의 학계의 여러 거물들도 수용하고 있다.








1.jp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신채호는 훌륭한 독립운동가이며 초창기 한국사학의 틀림없는 거두였지만


일반 대중들이 종종 생각하는마냥 신채호 선생이 이렇다 하면 신채호가 말씀하셨으니 당연히 맞다는건 절대 아니고


학계 차원에선 애초에 지금도 아니고 수십년전쯤이 충분히 여러 학설들이 비판이 되고 분석되고



독립운동가 아닌 '역사학자 신채호' 로선 지금에 이르러선 


이를테면 삼국시대 말기를 전체적으로 서술하는 연구서적이 나온다치면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책의 서문 부분에 신라시대 문장가들부터 


고려, 조선 이어 일제강점기, 해방직후, 80~90년대


그리고 최근의 동향까지 한번 싹 대체적인 시각의 변화들을 한번 서술할때


"신채호에 이르러선 이러이러한 주장을 했고.." 하면서 넘어가는


연구의 흐름을 살피는 연구사의 관점에서 한번 언급되고 지나가는 정도다.












1.jp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이건 무슨 신채호를 음해하거나 무시하는것이 아니라


역사가 하나의 정통한 학문인 이상 그냥 당연한것이다.




신채호보다 30년 정도 빨리 죽은, 동시대를 공유한 테오도르 몸젠.



테오도르 몸젠은 당대 로마사 연구에 최대의 권위자 중 한명이었고 로마사 연구의 체계를 잡았다고 평가되며


로마사 연구에 관한 여러 업적으로 심지어 "노벨 문학상" 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런 테오도르 몸젠의 학설들도 현대의 로마사 연구에는 막 크게 취급하지 않는다.


아니 물론 연구 성과가 발전하고 학설이 쌓이는 그런 과정 속에서 몸젠의 역할 자체는 당연히 크게 취급하지만


몸젠이 100년전에 주장한 학설들 자체를 지금까지 써먹지는 않는다는것.



마치 100년 과학과 지금의 과학이 크게 다르듯


그때와 비교해서 지금은 연구 자료도, 보는 시각도 크게 달라지고 발전하였기에 당연한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역사에 관해서는 역사 역시 하나의 '학문' 이라는것을 간과하고


그냥 마치 절대불변의 진리 및 혹은 교양, 상식, 혹은 현대의 국뽕 충전요소나 이념적인 부분의 한 부속품, 


어쨌든 변하지 않는 1차원적인것으로 여기는 성향이 있으나




학문으로서의 역사는 끊임없이 수정되고 발전하고 하기에


아무리 뛰어난 사람의 말이라고 해도 100년이 지나면 학문으로서는 구시대 이야기가 되는건 당연한 일이다.




저위에 크게 언급한 천관우 조차도


(물론 방법론은 크게 기여했지만) 비판 받는것들이 많다.







5.jpe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차치하고, 김부식에 삼국사기에서 기록의 충실함에 관한 부분만 따지면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는데 김부식이 입맛대로 쓰고 나머지는 다 없애버렸다" 무슨 이런 이미지와 다르게


실제로는 없는 사료를 쥐어짜는 김부식의 똥꼬쇼에 가깝다.






일단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었을때가 신라가 망한지 200년이 흘렀을 시점이고


백제와 고구려가 망한지는 500년이나 흐른 뒤였다.


말이 좋아서 500년이지 현대기준에서 500년 전이면 이순신이 태어나기도 전이다.



멸망 당시에서 그렇다는거고, 삼국사기 초창기 기록인 0~300년 근처까지 가면


800년전~1100년 전이다. 지금 시점에서 거슬러가면 후삼국시대에 해당한다.





즉 애초에 삼국의 역사를 정리해서 쓴다는 일 자체가 너무 늦었다.


간략한 글을 옮기는 정도가 아닌 이상에야 제대로 된 분량의 정사를 남긴다는 입장에서 


김부식은 거의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5.jp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김유신의 현손(玄孫)으로서 신라의 집사랑(執事郞)인 장청(長淸)이 행록(行錄)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만들어서 넣은 말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일부 삭제해 버리고 기록할 만한 것들을 취하여 전(傳)을 만들었다.

-삼국사기





삼국사기에서 언급되는 인물 중에 김유신이 있다. 


김유신의 열전을 작성하며 김부식은 김유신의 후손이 쓴 행장록을 인용하며,


행장록에서 지나치게 판타지한 일화를 많이 빼고 10권 중에 3권 정도를 인용하여 김유신 열전을 작성했다.






그런데 행장록이라는것 자체가 후손이 자기 조상 이야기 쓰는것이니 조상을 추켜세우는 언급이 많고


이 행장록도 김유신이 죽고 100년~150년은 지난뒤에 써진데다


저 행장록을 '김장청'이 쓸 무렵 김장청의 집안은 반란에 연류되어 가문의 세가 크게 기운 시점에서


자기 가문을 부각시키기 위해 나온것이라 자연스레 과장이 클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김유신 열전만 보면 김유신이 백제를 패고 있는데 


삼국사기 본기에서는 백제가 신라성 수십개를 함락시키는 기이한 상황이 나오고 이런 점이 삼국사기 비판에도 사용된다.





다만 종종 여기서 비롯되는 김유신 자체가 허무맹랑한 과대평가된 인물이다 라는 극단적인 의견들에 대해서는,


유독 김유신 열전이 다소 과장이 심한것이지 막상 고구려 백제 신라의 '본기' 를 보면 


김유신의 전공이 하나 정도 빼곤 거의 다 얼추 들어맞아서 딱히 과장이 심하진 않다.



여기에 김유신은 당대에 당태종도 중국에 온 김춘추에게 김유신의 사람됨에 대해 물어볼 정도였고,


김유신과 동시대에 살던 일본의 덴지 덴노도 "신라의 김유신은 나라를 지키고 만리에 이름을 떨친 사람" 이라고 언급하는등


충분히 당대에 엄청난 이름값을 가진 인물이었다.





삼국사기에선 그런 김유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과 장보고(張保皐)의 의롭고 용맹함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흔적이 없어져 듣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신은 나라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는 것이 지금[고려]까지 이어지며, 사대부들은 물론이고 꼴베는 아이와 가축을 기르는 아이까지도 그를 알고 있다.





김부식은 을지문덕이나 장보고는 용감하고 업적이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900년전 고려시대에는 이미 중국에 역사서에 나온 이름들이 아니었으면


어떤 흔적도 없어서 그 시대 사람들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 한다.


반면에 김유신의 경우는 사대부들이나 가축 기르는 아이들도 아는 이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바꿔 말해서 그 정도로 유명했던, 


사실상 당대 고려에서 가장 유명한 삼국시대 인물이었을 김유신조차도 


김부식 본인 입으로 '만들어서 넣은 말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일부 삭제해 버리고 기록할 만한 것들을 취하겠다' 며


황당한 이야기가 많은 김유신행장록에 의지해서 열전을 써야 했을 정도다.





참고로 김부식이 잘랐다고 추정되는 김유신행장록의 나머지 7권에 대해서는 


일부가 '삼국유사' 등에 인용되었을거라고 추정되고 있는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보희가 서라벌 남산에서 오줌을 누니까 서라벌 시내에 다 찾다"


"꿈 돈주고 사서 문희가 김춘추와 만났다"


"김유신이 문희 화형쇼 해서 김춘추와 결혼시켰다" 




이런 일화 및 천관녀 일화 등이 해당하는 내용들이다.


저기까지 가면 역사기록보다는 그냥 설화에 가까운 내용들인셈.





삼국시대 전체에서 당대 가장 유명했을 스타조차 후손의 행장록에 의지하지 않으면 열전을 쓸 수 없던게 현실.







그렇다면 위에 언급한, 


중국에서 기록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몰랐을거라는 을지문덕은 어떨까?










乙支文德, 未詳其世系. 資沈鷙有智數, 兼解屬文. 

을지문덕의 세계는 상세하지 않다. 자질이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지모가 있었고, 글 짓는 것도 깨달았다[이해하였다]


解. 隋(開皇)[大業]中, 煬帝下詔征高句麗. (《隋書》)

수나라 대업중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於是, 左翊衛大將軍宇文述, 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 出樂浪道, 與九軍至鴨淥水. (《隋書․于仲文傳, 宇文述傳》)

이해에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로 나와서 9군과 함께 압록수에 이르렀다. 


文德受王命, 詣其營詐降, 實欲觀其虛實. 

을지문덕은 왕의 명령을 받아서, 그 진영으로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였는데, 실제로는 그 허실을 관찰하려 한 것이다. 


述與仲文, 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者], (則執)[必擒]之. [文德來,] 仲文等, 將(留)[執]之. 尙書右丞劉士龍, 爲慰撫使, 固止之, 遂聽文德歸, 深悔之, 遣人紿文德曰: 「更欲有(議)[言], 可復來.」 文德不顧, 遂濟鴨淥而歸.(《隋書. 于仲文傳》)

우문술과 우중문은 먼저 황제의 밀지를 받들어, 만약 왕이나 을지문덕을 만나면 반드시 사로잡으려 하였다. 우중문 등은 장차 그곳에 머물렀다. 상서우승 유사룡을 위무사로 삼고, 굳이 말리는 바람에 결국 문덕이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뒤에 이를 깊이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 문덕을 속여서 말하기를 「다시 말할 것이 있다면, 다시 오도록 하라.」문덕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압록강을 건너왔다. 


述與仲文, 旣失文德, 內不自安.(《隋書. 宇文述傳》)

우문술과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놓친 뒤에 마음 속으로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述以粮盡欲還, 仲文(謂)[議]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兵,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隋書. 于仲文傳》)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가려 하는데, 우중문은 정예부대로 문덕을 추격하면 공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술이 이를 말렸다. 우중문이 화를 내어 말했다. 「장군이 10만의 병력을 가지고 와서 조그마한 적을 격파하지 못하고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뵙겠는가?」


述等不得已而從之, 度鴨淥水追之. 文德見隋軍士有饑, 欲疲之, 每戰輒(北)[走], 述等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遂進東, 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隋書. 宇文述傳》)

술 등은 마지못하여 그 말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서 문덕을 추격하였다. 문덕은 수군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그들을 피로하게 하기 위하여 싸울 때마다 매번 패배한 척하며 도주하였다. 이렇게 하여 술은 하룻 동안에 일곱 번을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승리에 뱃심이 생기기도 하고, 또한 중의에 몰리기도 하여,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밖에서 산을 등지고 진을 쳤다. 


文德遺仲文詩曰: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 仲文答書諭之. (《隋書. 于仲文傳》)

문덕이 중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보냈다. 

신묘한 책략은 천문에 닿았고, 오묘한 계산은 땅에 이르렀네. 

전투에 이겨서 전공이 높으니, 만족함을 안다면 중지하길 바라노라. 

중문이 답서를 보내 효유하였다. 


德又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難以猝拔, 遂因其詐而還, 爲方陣而行.(《隋書. 宇文述傳》)


문덕이 또한 사자를 보내 항복을 가장하고 술에게 요청하였다. 「만일 군사를 철수한다면, 틀림없이 왕을 모시고 행재소로 가서 조견하겠다.」 술은 군사들이 피곤하고 기운이 쇠진하여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평양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갑자기 함락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여, 거짓 항복이라도 받은 상태에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방어진을 만들며 행군하였다. 


文德出軍, 四面鈔擊之, 述等且戰且行, [秋七月]至薩水, 軍半濟, 文德進軍, 擊其後軍, 殺右屯衛將軍辛世雄. 《隋書. 煬帝紀》

문덕의 군사가 나아가 그들을 사면으로 공격하니, 술 등이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는 쫓겨 갔다. 가을 7월에 살수에 이르러 군사가 반을 건너자, 문덕의 군사가 나아가 그들의 후군을 공격하여 우둔위장군 신세웅을 죽였다.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九軍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淥水, 行四百五十里. 初, 度遼九[凡]軍三十萬五千人,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隋書. 宇文述傳》)

이렇게 되자 모든 적군이 한꺼번에 허물어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9군 장졸이 달려서 패주하였는데, 하루낮 밤 사이에 압록수에 이르니 그들은 4백 50리를 간 셈이다. 처음 요수를 건너 올 때 그들은 모두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에 돌아갔을 때는 다만 2천7백 명뿐이었다.



5.jp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위의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이다.

참고로, 위에 언급한 기록들 중에 중국사서에 나오질 않고, 삼국사기에서만 독자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乙支文德, 未詳其世系. 資沈鷙有智數, 兼解屬文. 
을지문덕의 세계는 상세하지 않다. 자질이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지모가 있었고, 글 짓는 것도 깨달았다[이해하였다]


文德受王命, 詣其營詐降, 實欲觀其虛實. 
을지문덕은 왕의 명령을 받아서, 그 진영으로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였는데, 실제로는 그 허실을 관찰하려 한 것이다. 



이게 전부다.

나머지는 전부 원문 한자 뒤에 써둔 출처처럼 수서(隋書 수나라 역사서) 우중문(于仲文), 우문술(宇文述) 열전을 

복사 붙여넣기 한것이다.


삼국사기만의 내용이라는 부분을 하나하나 보자



을지문덕의 세계는 상세하지 않다.
(집안이 어땠는지 알 수 없다)

침착하고 용맹하고 지모가 있다
(행적 기록이 아닌 평론)

글 지을 줄 알았다
(우중문을 조롱한 시가 남아있으니 하는 평론)

을지문덕이 항복하려 한게 아니라 허실을 염탐하려고 한것이다
(행적 기록이 아닌, 행동에 대한 분석)





즉 이건 '역사 기록' 이라기보단 그냥 을지문덕에 대한 '평론' 이다.

 

사실상 김부식이 중국 자료 말고 인용할게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중간중간 평론을 끼워서 최대한 지모 있고, 글도 쓰며, 허실로 염탐하는 면모등을 강조하며 


그의 지략을 추켜세워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다.









5.jp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참고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 말기


수나라 전쟁, 당나라 전쟁에 관한 기록은 일체 99%가 


사실 전부 중국쪽에서 남긴 기록이다.




그냥 전부라고 해도 좋다. 전부 중국에서 남긴 기록을 김부식이 인용한것이고,


중국자료에서 나오질 않는 독자적인 국내 자료를 인용한건 없다.





저 1%라고 하는 부분은, 중국 자료 속에서 김부식이 최대한 노력해서 덧붙인 분석으로




고구려 물경 15만 대군이 당태종의 군대에 힘 한번 써보질 못하고 무너진 것으로 나오는 '주필산 전투' 에 대해




"이 전투에서 당군이 승리를 한건 물론 맞긴 하나, 내가 다른 자료를 보면


당나라 군사들도 제법 많이 죽은것 같아서 막 일방적인 학살까진 아닌것 같다.


과장한게 아닌가?" 의문을 제시하며





중국 쪽 기록과 별개로 "신성, 건안성, 주필산의 전투에서 우리 병사들과 당나라 병사들이 많이 죽었다." 



 당군의 일방적인 학살처럼 묘사된 싸움을, 고구려군 역시 분전한 모습을 강조하여 서술한 부분이다.


사실 김부식이 봤다는 


고구려군이 분전했다고 나오는 다른 자료조차도 수당가화(隋唐佳話)라는 중국 자료긴 하다.









5.jp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唐太宗聖明, 不世岀之君. 除亂比於湯·武, 致理幾於成·康. 至於用兵之際, 岀竒無窮, 所向無敵.
당태종(唐太宗)은 성명(聖明)하고 불세출(不世出)의 군(君)이다. 난(亂)을 없앤 건 탕(湯), 무(武)와 견주고, 이(理)를 다스린 건 성(成), 강(康)과 견준다. 용병(用兵)의 재주는 끝이 없고 신통하니 늘 무적(無敵)이었다.

而東征之㓛, 敗於安市, 則其城主可謂豪傑, 非常者矣.
그러나 동정(東征)에서 공력을 쏟을 때 안시에서 패했다. 그 성주(城主)는 가히 호걸이며 비상한 사람이다.

而史失其姓名, 與揚子所云, “齊·魯大臣, 史失其名.” 無異. 甚可惜也.
하지만 역사(史)에서 그 성명(姓名)을 잃어버리니 양자(楊子)가 말한 것처럼, '제로대신(齊魯大臣)은 사(史)에서 그 명(名)을 잃었다.'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심히 애석하다.





당태종은 중국 역사에서 대단히 이름 높은 군주고 고구려와의 전투에서도 초반엔 파죽지세였다. 

그러나 안시성에서 막혀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김부식은 당태종 같은 대단한 영웅을 물리친 안시성주는 실로 대단한 호걸이라고 극찬했으나

정작 그 이름조차 알 수 없어 '심하게 애석하다' 며 우울해했다.









보통 안시성주에 대해 '양만춘' 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으나

사실 이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한국은 고사하고 중국, 그것도 중국의 '소설책' 에 나오는 이름이며

그 소설책조차도 그나마 시대 가까운 당나라는 커녕

한국에 조선시대인 명나라 시대 소설에 나오는 이름이다.






5.jp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한국군에 이름을 딴 '양만춘함' 이 있으나 기실 이 양만춘이라는것은


실상을 놓고 보면 삼국지 정사에서 여포와 동탁 사이를 멀어지게 했던 이름없는 궁녀가 실제로 있긴 했고


거기서 이름을 딴 소설인물인 '초선' 과 비슷한 것이다.












1.PN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그런데 절망적인 수준의 저런 후반기 말고,


오히려 더 오래전으로 가면 의외로 삼국사기의 고구려 내용이 (상대적으로) 풍부해지고


중국 쪽 자료에서도 나오지 않는 삼국사기만의 독자적인 기록들이 나오게 된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김부식의 고구려 본기에 


고구려의 역사서인 유기, 신집이 상당히 반영되었을거라고 보고 있다.






고구려는 추모왕부터 미천왕 시기까지 역사는 의외로 꽤 자세하고 내용 자체도 단순 사실나열이 아닌


이야기의 내러티브가 짜여있는 기록들이 꽤 있다.






소수림왕 시기에 <유기>가 편찬되었고 영양왕 시기에 이 유기를 정리하여 <신집>을 으로 만들었기에


실제로 고구려가 만든 자체 역사서가 다루는 시기가 딱 그때쯤 까지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관련 자체 사료가 빈약해지는 부분이 딱 그때쯤이기 때문.





(소수림왕쯤부터 슬슬 징조가 보이더니 장수왕 시기부터


그럼 장수왕 때부터 고구려 멸망때는 왜 역사서 안 만들었냐 할 수 있는데, 


물론 멸망과정에서 기록 소실 있을 수 있지만 

평양 천도부터의 고구려 내부의 분열 떄문에 그럴틈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음)







보통 삼국시대 고대에 관한 기록이 적은걸 아쉬워하며


"유기나 신집이 어디서 나왔으면" 하는 이야기를 하지만



유기나 신집의 내용 중에 상당 부분이 삼국사기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김부식의 삼국사기 덕택으로 인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유기나 신집의 기록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것.








1.PN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또 삼국사기의 기초가 된 자료로 '구삼국사' 라는 자료가 있었는데,


현재 일부분 남아있는 곳을 보면 신화적인 색체가 매우 강하고,


삼국유사에도 반영되었다고 보인다.





위는 황당한 이야기를 최대한 쳐낸 삼국사기와


비교적 그대로 서술한, 구삼국사 등을 그대로 인용한것처럼 보이는 자료의 비교다.




유학자인 김부식은 기본적으로 귀신이 난무하는 허무맹랑한 '괴력난신' 하는 이야기는 최대한 쳐냈는데


저 위에 부분을 보면, 이런 기록을 쳐내기전에 일단


허무맹랑한 기록에서도 최대한 나름대로 의미있는 기록을 뽑으려고 노력한 모습이 보인다.






하늘에서 수천명의 사람들이 튀어나와 알아서 왕실 성곽을 만들어줬다는 주몽 시절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안개가 심해서 사람들이 앞을 못 봤다. 성곽과 궁실을 만들었다." 로,






지증왕의 성기가 35cm은 되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왕의 몹시 체격이 크고 남들보다 풍체가 뛰어났다' 로,





진평왕이 11척, 즉 250cm가 넘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왕의 기골이 장대하고 몸이 컸다" 로 







거의 판타지 소설급의 이야기에서도, 남은 기록이 적으니 이거라도 긁어모아서 


최대한 어떻게든 의미있는 기록을 뽑으려 노력한것이다.








논하여 말한다. 신라의 박씨, 석씨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고,김씨는 금궤(金樻)에 들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거나 혹은 금수레를 탔다고도 한다. 이는 너무 이상해서 믿을 수 없으나, 세속(世俗)에서는 대대로 전해져 이것을 사실이라고 여긴다. 



논하여 말한다. 신라 고사(古事)에 이르기를, “하늘이 금궤를 내렸으므로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괴상해서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신(臣)이 역사서를 편찬하려고 보니 그 전승이 오래되어 그 말을 빼버릴 수가 없다.  






애초에 삼국의 시대가 김부식의 시대에선 너무나도 오래되었고,


삼국 자체도 중국에서 율령 등을 받아들이고 기록문화를 만든건 각국의 역사에서도 한참을 지나야 했다.



즉 꼭 기록의 소실을 떠나서 엄정하게 사실 위주의 역사 기록을 한 시기 자체도 아주 많지는 않았을 것이니만큼,



입에서 입으로 내려전해온 저런 신화적인 요소를 전부 지워버리면 쓸게 거의 없어지게 되어버린다.



때문에 할 수 있는한 그런 신화적인 이야기에서도 (김부식 나름대로의) 근거있는 사실을 뽑으려고 한것.








겨울 10월, 임금이 사냥을 한다는 핑계로 병사를 내어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나라를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儻爲他所幷 則脣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온조왕 27년(서기 9)
27년(서기 9) 여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해서 그 백성을 한산(漢山)의 북쪽으로 옮기었다. 이것으로 마한이 드디어 멸망하였다.
가을 7월,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二十七年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秋七月 築大豆山城



1.PN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그런식으로 부족한 자료와 어지로운 신화적인 기술 속에서

최대한 정리를 하려고 노력한 김부식도 어쩔 수 없이 막힌 부분들이 있었다.



온조왕 시절 마한은 멸망한것으로 나오는데,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마한은 멀쩡하게 살아 있는것.

때문에 김부식은 당황하며 

"분명히 기록에는 마한이 멸망했다 했거늘, 마한이 멸망했다가 다시 부활한것인가?" 하고 고뇌한다.



현대에 고고학적 발견으로는 마한이 온조왕때 멸망은 터무니없고

심지어 백제 중기까지도 존재했다는걸 알지만,

 

고고학적 접근도 불가능하던 당시에는 김부식으로서는 영원히 풀 수 없는 문제였다.







1.PN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2.PN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3.PN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4.PN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후대 백제왕들하고 비교하면 말이 안되는 수준의 백제 시조 온조왕의 분량.






백제 기록 자체가 많이 남지 않을것을 고려하면,

백제 온조왕은 말이 안되는 수준으로 기록이 남아 있고, 

업적이라고 써진것들 역시 도저히 당시 백제가 한세대 안에 해낼 수 있는것들도 아니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위에 언급한 수정론적 관점에서 저 시기들이 다른 일에 일어난것들 모아놓은게 아니냐는 말도 있다.



즉 백제가 제대로된 기록문화도 한참 멀었고 어느정도 자리잡기 전에, 기록상 조용하게 사라지는 여러왕들의 행적이


나중에 백제인들이 역사서를 정리할때 온조때로 한꺼번에 소급한게 아니냐는것.
(물론 이런 종류 분석이 워낙 다채로워서 단언할 수 없지만)




애초에 삼국시대 자체가 위에 언급했듯 

조그만 부족국가로 시작한 나라들이 한참을 지나야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중국으로부터 기록문화도 받아들이며

구전으로 남아오던 여러 신화적 이야기를 정리하고 했을테니 만큼,




저 이야기에 나왔던 신화적인 인물이 여기서 다시 100년 지나서 나오는 수준으로 연대가 말이 안되는 부분이 많이 있고

그런 과정에서 이야기가 뒤죽박죽 섞이며 더욱더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남아있는 기록 자체도 별로 안되는데, 그 기록들도 뭐가 뭔지 모르게 어지럽게 섞여있고,

그렇다고 그것들 배제하면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지경이고,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


김부식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정리를 해보려고 시도했던 것이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모순이 생길 수 밖에 없었으나,

어떻게든 그 와중에 최대한 기록을 남기려고 시도했던게


"전후가 모순되고 앞뒤가 맞지 않아 역사적 가치가 없다" 는 조롱을 듣는 신세가 되었으니,

본인으로서도 애석할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볼수록,

김부식이 적은 자료와 어지로운 기록들 속에서

최대한 의미있게 남은 자료를 박박 긁어모으려 했다는걸 느끼게 된다.




적어도 그렇게라도 삼국사기를 통해 자료를 남겼기 때문에,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포함해서

고대사에 대한 기록이 조금이라도 더 남을 수 있었다.





이런 후대에 역사를 남기기 위한 부분은 김부식이 인종에게 올린 표문에서도 나타난다.







"우리 동방 삼국은 역사가 오래되어 마땅히 그 사실을 서책(書冊)에 기록해야 할 것이므로 

늙은 신(臣)에게 명하여 편수케 하셨지만, 스스로 돌아보건대 부족함이 많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생각컨대 성상 폐하께서 (중략) 말씀하시기를,

“지금의 학사대부(學士大夫)가 오경(五經)ㆍ제자(諸子)의 책이라든지 

진한(秦漢) 역대의 역사에 대하여는 혹 널리 통하여 자세히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우리나라의 사실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망연(茫然)하여 

그 시말(始末)을 알지 못하니 매우 유감스럽다. 

더구나 신라ㆍ고구려ㆍ백제의 삼국이 정립(鼎立)하여 능히 예(禮)로써 중국과 교통했기에 

범엽(范曄)의 한서(後漢書)라든지 송기(宋祁)의 당서(唐書)에 그 열전이 있지만, 

그 사서(史書)는 자기 국내에 관한 것을 상세히 하고 외국에 관한 것은 간략히 하여 자세히 싣지 않았다. 

또 삼국의 고기(古記)로 말하면 글이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이 누락된 것이 많으므로 

임금의 선악(善惡)이나 신하의 충사(忠邪), 나라의 안위(安危), 인민의 치란(治亂)에 관한 것을 다 드러내어 

후세에 권계(勸戒)를 보이지 못한다. 

마땅히 삼장(三長)의 재(才)를 얻어 일가(一家)의 역사를 완성하고, 

이를 만세에 물려주어 해와 별처럼 빛나게 하고 싶다.”

고 하셨습니다.(중략) 

한껏 정력을 다하여 겨우 책을 만들었으나 결국 보잘것없어 스스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바라오니 성상 폐하께옵서 이 엉성한 편찬을 양해하여 주시고 망녕되이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1.PN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2.PN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그렇지만 현대에는 신채호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차라리 삼국사기 안쓰는게 나았다"


"삼국사기는 역사적 범죄"


"그마저도 없으면 어떡하냐고? 잊혀져도 되니까 없는게 낫다"


"김부식이 옛날 역사서 태웠다"


는 둥의 소리까지 듣곤 했던 지경이다.







김부식이 자료 태웠다 운운하는데 이규보가 『동국이상국집』 이나 일연의 삼국유사 등에서 


구삼국사, 고기류를 인용한 흔적이 보이니만큼


삼국사기 이후에도 한참동안은 그런 책들 남아 있었고,


애초에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혼자 쓴게 아니라 왕실 명령으로 주관해서 감독한 사업이며,


궁중에 보관된 자료를 태우고 말고할수도 없었다. 






애초에 책 자체가 귀하던 예전에,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가장 인기 있는 책 빼고 나머지는 소실 되는건


무슨 일부러 반달을 하거나 하지 않더라도 흔한 일이었나.


『후한서』의 경우 적어도 범엽이 『후한서』를 저술하기 전에 적어도 7명 이상의 역사가가 『후한서』를 지었는데 


범엽의 『후한서』가 저술된 이후에는 그것만 남고 


그 이전의 7종류 책은 온전하게 전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점도 비슷하다.








1.PNG 김부식이 필사적으로 삼국사기를 쓰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다

 



심지어 현대에서 접하기 쉬운 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조차도


조선시대 무렵에는 이미 흔한 물건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경주부사였던 이계복은, 주변에서 점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구하기 어려워지는것을 보고 


"이러다가 우리나라의 역사가 완전히 어둠속으로 사라질 수 있겠다" 고 우려했고,


완본을 구해 새로 인쇄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이미 그 당시에서조차 제대로 된 완본을 구하는데 몇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렇게 이계복이 몇년간 고생하여 얻은 삼국사기 완본을 인쇄했으니,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국보 제322-2호 정덕본이자


현존하는 단 2개 뿐인 삼국사기 완질본이다.










이계복(李繼福)의 발문(跋文)



우리 동방 삼국(三國)의 본사(本史삼국사기)나 유사(遺事삼국유사) 두 책이 

딴 곳에서는 간행된 것이 없고 오직 본부(本府)에만 있었다. 


세월이 오래 되매 완결(완缺)되어 한 줄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 겨우 4, 5 자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건대,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여러 역사책을 두루 보고 천하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 


그리고 모든 이상한 사적에 대해서 오히려 그 견식을 넓히려 하는 것인데, 


하물며 이 나라에 살면서 그 나라의 일을 알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에 이 책을 다시 간행하려 하여 완본(完本)을 널리 구하기를 몇 해가 되어도 이를 얻지 못했다. 


그것은 일찍이 이 책이 세상에 드물게 유포되어 사람들이 쉽게 얻어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지금 이것을 고쳐 간행하지 않는다면 


장차 실전(失傳)되어 동방의 지나간 역사를 후학(後學)들이 마침내 들어 알 수가 없게 될 것이니 실로 탄식할 일이다.


 

다행히 사문(斯文) 성주목사(星州牧使) 권공(權公) 주(輳)가, 내가 이 책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완본(完本)을 구해 얻어서 나에게 보냈다. 


나는 이것을 기쁘게 받아 감사(監司) 안상국(安相國) 당(당)과 도사(都事) 박후전(朴候佺)에게 이 소식을 자세히 알렸더니 이들은 모두 좋다고 했다. 



이에 이것을 여러 고을에 나누어 간행시켜서 본부(本府)에 갖다가 간직해 두게 했다.


아아! 물건이란 오래 되면 반드시 폐해지고 폐해지면 반드시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렇게 일어났다가 폐해지고 폐해졌다가는 다시 일어나게 되는 것이 바로 이치의 떳떳한 바이다. 


이치의 떳떳함으로 일어날 때가 있는 것을 알고 


그 전하는 것을 영구하게 해서


또한 후세의 배우는 자들에게 배움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조선시대 저 무렵에도 우리 조상들은 자기 나라에 살면서 자기 나라 옛 일도 알지 못할까를 걱정하고,


지금이라도 책을 서둘러 간행하질 않는다면 완전히 실전되고 말아


후세 사람들이 지나간 영원히 역사를 알지도 못하까를 걱정하여


열심히 이를 보존해서 "후학들에게 단지 배움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뿐이다" 라고 말하며 우리들에게 남겨주었다.










500년 선조들이 그런 마음으로 몇년간 어렵사리 책을 구해 기쁜 마음으로 인쇄하고


500년이 지난 후손들에게 그렇게 남겨준 물건을 역사적 범죄라느니, 


잊혀지는게 낫다느니 하고 있는것이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다.

11 Comments
Katelyn 2022.02.23 20:48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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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2022.02.24 01:08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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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디디딩띵딩딩 2022.02.24 02:06  
반쯤 읽었는데 내일 다시 읽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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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xt 2022.02.24 03:28  
후............ 길다.
그래도 유익하고 좋은글.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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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sy 2022.02.24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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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빌런 2022.02.24 10:07  
가슴이 웅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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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틀맨 2022.02.24 11:53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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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아재 2022.02.24 15:06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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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영상 2022.02.27 16:28  
신채호 선생은 독립의식 고취를 위한 역사인식이라 정사적인 느낌보다는 정치적인 느낌이 강하죠

공감가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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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2022.02.27 22:01  
보,지 부분에서 직접쓴 글 이라는게 느껴져서 감동이고 감사한 마음이였습니다 고대 기록들이 부족해서 너무 아쉽습니다ㅠㅠ 과거 분들 입장에선 삼국사기가 졸렬하다 느껴졌을지라도 현세에서는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한 사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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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댓에굿만다는놈 2022.02.28 05:35  
다르게 말하면 김부식이 중국 기록들 뒤져가며 복붙해서 만든 수준이었다..? 도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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