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때 있었던 청소년 길빵사건
fr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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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9 11:17
1790년 음력 5월 22일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 날 당시 좌의정이었던 채제공이 갑자기 못해먹겠다고 사표를 던졌다. 왜 갑자기 그가 사표를 던진 것일까? 그에 얽힌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그런데 두 청년이 서로 건방지게 팔짱을 끼고 가마 옆에 서서 곰방대를 물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학당의 유생들이었다. 현대로 치면 중고딩들인 셈이다.
이 시건방진 중고딩들의 짓거리를 보다못한 채제공의 비서가 담배 빼라고 훈계했다.
그러자 청년들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런 다음 이렇게 내뱉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저 자를 보고 담뱃대를 빼겠나.(吾豈見渠而去竹乎)”
참고로 당시 채제공은 71세의 노인으로 두 청년의 할아버지뻘이었다.
명색이 예를 중시하는 유학을 배운다는 것들이 자기 할아버지 뻘 되시는 분한테 그것도 이 나라의 재상한테 막말을 퍼부은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채제공은 어이가 없어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채제공의 비서가 하인들을 시켜 두 청년을 옥에 가뒀다. 두 청년의 이름은 김관순과 김병성이었다.
김관순은 돈령부 참봉 김세근의 아들이었고, 김병성은 동부봉사 김이의의 아들이었다.
채제공에게 패악을 부린 청년은 바로 김관순이었다. 채제공은 하루만 이들을 붙잡아놓고 풀어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3경쯤(밤 11시~새벽 1시 사이) 되었을 때 학당의 유생 수십 명이 옥사 앞에 몰려온 것이었다.
이들은 옥문을 때려 부술 기세로 과격농성을 벌였다. 만약 두 사람을 석방하지 않으면 전옥서의 관리를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채제공은 두 청년을 형조로 넘겼다.
다음 날부터 유생들이 채제공을 욕하고 헐뜯는 사발통문을 돌리기 시작했다. 화가 난 채제공은 이들을 정식으로 고발해서 엄히 다스릴 작정을 했다.
하지만 김병성의 아버지는 하인들이 보는 앞에서 아들의 볼기를 치면서 잘못을 지적했다.
문제의 ‘담뱃대 청년’인 김관순의 할아버지도 ‘백배사죄’를 구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채제공은 결국 화를 풀고 이들을 용서해주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여진이 계속됐다.
“채제공이 유생들을 욕보였다”면서 “선비(유생)는 죽일 수 있어도 욕보일 수 없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온 것이다.
이에 채제공은 크게 분노해 이렇게 말했다.
“아니 대낮 큰 길가에서 홀옷 차림으로 담뱃대를 피워물고 대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앞으로 선비라는 이름으로 온갖 패악질을 해도 가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 다음 사의를 표하고 조정을 떠났다. 정조는 그런 채제공에게 “제발 돌아오라”고 사정한다.
그러면서 무리를 지어 전옥서로 몰려가 행패를 부린 주동자 및 가담자들을 엄벌에 처했다.
주동자는 ‘종신 과거시험 응시 금지령’의 중벌을 받았고, 가담자 4명에게는 ‘10년 과거 금지령’을 내렸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다.
이러한 사건들 때문에 현대 한국에서도 담배에 대한 예절이 엄격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때도 있었던 요즘것들은 싸가지가 없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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