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롬멜 원수의 아들
'사막의 여우', '탱크전의 천재' 나치 독일의 에르빈 롬멜 장군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롬멜 원수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1944년 10월 자신의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음독 자살했다
그는 부인인 루치아와 사이에 아들을 하나 두었고 혼외자식으로 딸이 하나 있었으며 생모가 일찍 사망한 관계로 그녀도 롬멜 가족과 함께 살았다
유태인 양로원을 압수하여 저택으로 개조한 슈투트가르트 자택 앞에서의 아들 만프레드, 롬멜 원수, 부인 루치아
만프레드, 루치아, 롬멜 원수
롬멜의 아들 만프레드는 독일군 원수의 아들임에도 독일 공군의 일반병으로 입대한 상태에서 1944년 아버지의 죽음을 맞았다 (16세)
독일의 국민적 영웅인 롬멜 원수의 명예를 훼손할 수 없었던 히틀러의 명령으로 롬멜 가족은 생명과 재산은 보존할 수 있었으나 아들 만프레드는 더 이상 나치에 충성을 바칠 필요를 못느꼈다
전후의 만프레드 롬멜
탈영 후 프랑스군에 항복한 만프레드는 전쟁이 끝나자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고향인 슈투트가르트로 돌아와 튀빙겐 대학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한다
졸업 후 변호사로 잠시 일하다 독일 남부 바덴-뷔르템부르크 주정부의 공무원이 된 그는 1974년 슈투트가르트 시장에 당선되고 22년간 봉직한다
슈투트가르트 시장 선거에 나온 만프레드
보수주의인 기독민주당 소속이었으나 전쟁 중 유태인 학살에 대한 죄의식을 항상 느끼던, 그래서 보수 속 진보를 추구하던 그는 시민의 권익 증진과 이민자들의 복리후생에 노력을 기울였고 슈투트가르트의 유태인 인구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보수적인 시재정 운영으로 슈투트가르트시 부채를 극적으로 줄였으며 한편으로는 시 대중교통의 개선 및 새로운 경기장과 전시회장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1982년 뉴욕타임즈는 만프레드 롬멜을 '독일의 차기 수상'으로 지목하였으나 만프레드는 고향을 떠나 중앙정치권으로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의 정치적 성공의 상당 부분은 '롬멜'이라는 그의 가문의 명성에서 나왔으며 당시 많은 독일인들은 전쟁 중 롬멜의 승전보와 유태인 옹호 발언, 병사들에 대한 자상함등을 기억하고 있었다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으로 부터 훈장을 수여받는 만프레드 롬멜
만프레드는 아버지의 적이었던 영국 몽고메리 원수의 아들 데이비드 몽고메리 자작, 패튼 장군의 아들 조지 패튼 소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만프레드 롬멜과 데이비드 몽고메리 자작
만프레드는 영국의 기사 작위, 프랑스의 레종 도뇌르 훈장, 독일 연방 명예 훈장 등 여러 훈장을 받았으며 메릴랜드대학 등 3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 22년간 봉직한 슈투트가르트 시장직에서 물러나 은퇴한 그는 2013년 슈투트가르트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84세.
2014년 슈투트가르트시는 만프레드 롬멜을 기념하여 슈투트가르트 공항을 만프레드 롬멜 공항으로 명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