띄어쓰기를 만든 사람
흔히 홍길동전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근래에 설공찬전이라는 조선 초기 한글 소설이 발견되었다.
본 사진은 그 설공찬전의 본문이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띄어쓰기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로써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띄어쓰기는 한글이 만들어진 시기에 같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진 것임을.
그렇다면 한글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띄어쓰기는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가?
놀랍게도 그것은 미국 출신의 선교사 호머 헐버트라는 사람에 의해서였다.
헐버트는 주시경과 함께 맞춤법과 한글을 연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도입했다.
헐버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만들어 냈으며, 민요 아리랑을 악보로 제작해 보급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도 어려운 한자보다 한글을 사용해야한다." 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그는 한글을 사랑했다.
더 나아가 그는 한국을 사랑했다.
그는 한국의 분리 독립을 지지하였고, 그 연장선상에서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당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헤이그 특사를 적극 지원,
헤이그 특사 3인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무사히 네덜란드 헤이그로 이동할 수 있도록 사전 작업을 벌여준 인물이다.
이에 헐버트는 제 4의 헤이그 특사라고 불릴 정도였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헤이그 특사는 정작 헤이그에 도착했음에도 불구, 헤이그에서 벌어지는 만국평화회의장에 들어가는데 조차 실패한다.
또한 일제는 헤이그 특사가 파견되는 과정에서 헐버트가 연관되었음을 알아내고, 헐버트를 대한제국에서 추방시켜버린다.
하지만 헐버트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서재필과 이승만 등 미국 일대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적극 지원하는 한편,
미국 각지를 돌면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비난하며 그 부당성을 알렸다. 그는 이와 관해 루스벨트 대통령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친구의 나라 한국을 배신한 사람." ─ 헐버트가 뉴욕 타임즈 기고문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비난한 내용
"고종 황제는 일본에 항복한 일이 결코 없다. 굴종하여 신성한 국체를 더럽힌 일도 없다.
한민족 모두에게 고한다. 황제가 보이신 불멸의 충의를 간직하라." ─ 1942년 워싱턴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서
이후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고, 정부 수립이 된지 1년이 된 1949년, 86세의 노인이 된 헐버트는 42년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한 달 씩이나 항해를 거쳐 와야하는 거친 여정에도 불구하고 한국 땅을 밟았던 호머 헐버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그의 말대로 현재 호머 헐버트의 묘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