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마지막 왕과 발해의 멸망
발해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도 적어 고조,무왕,문왕,선왕을 제외하면 왕들의 행적을 파악하기 어려운데 그 가운데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은 특이하게 기록이 풍부한 편입니다. 물론 그 역시 요나라의 역사서 '요서' 일부에서만 그의 행적을 찾을 수 있는데다 내정에 대한 기록이 전무한데 그럼에도 그의 기록이 상대적으로 풍부하고 몇몇 학자들이 그 일부 기록을 쫒는건 그의 행적이 발해의 멸망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인선의 즉위년도는 정확히 알수없으나 '요서'는 그가 처음 사서에 기록된 906년 부터 발해가 멸망한 926년까지 21년의 기록을 현재에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재임기인 906~926년은 동아시아의 격변기로 중원은 당나라 멸망 이후 5대 10국 시대가 열려 수십개의 나라들이 저마다 각축을 벌이던 군웅할거의 시대였고 한반도내에서도 신라가 몰락하여 왕건의 고려(궁예의 후고구려)와 견훤의 후백제가 대립하던 나말여초의 혼란기였다. 그 무렵 북방 초원에서는 야율아보기가 이끄는 거란이 팽창하여 916년에 요나라를 건국하고 발해와 대립했습니다.
이 가운데 발해는 전성기를 이끈 선왕 사후 100여년간 쇠퇴를 거듭하며 거란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혼란기에 왕이 된 대인선은 처음엔 중원,한반도와 연합해 거란에 대항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거란과 대등하게 싸울수 있던 중원의 강국 후량,후당이 각각 건국 16,13년만에 망하고 요나라에 연운16주를 바치고 새로운 중원의 페권국 후진의 황제가 된 석경당에 의해 중원은 요나라를 적대하긴 커녕 신하를 자처했고 고려도 후백제와의 대립을 이유로 발해의 원군 요청을 거부하면서 발해는 거란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펼쳐야 했습니다.
거란은 수십년동안 발해의 요동을 침공해왔는데 발해도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진 않고 924년에 대인선이 군을 일으켜 요나라가 점령한 요동을 침공하여 침략군을 물리치고 요동을 탈환하기도 했습니다.
거란은 925년 요동전투의 복수를 위해 대대적인 군사를 일으키고 기상천외한 전술로 발해를 침략하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프랑스의 수도 파리로 진격했듯 거란이 수십년동안 사용하던 요동루트를 우회하여 곧바로 발해의 수도 상경으로 진격합니다. 거란이 군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요동에 국력을 집중하던 대인선은 거란이 새로운 루트로 공격해온단 소식에 급하게 군사3만(혹은 5000)으로 요격에 나섰으나 대패하고 수도 상경이 거란군에 포위되는 위기를 맞습니다. 결국 포위 3일만에 시운이 다한걸 느낀 대인선이 거란군에 항복하면서 발해는 허망하게 멸망합니다.
처음엔 야율아보기도 대인선을 정성껏 대접하면서 멸망한 발해영토에 거주하는걸 허락하고 발해 군현에 회유조서를 내리는등 온건책을 펼쳤는데 발해땅에 파견된 거란장수가 살해되고 대인선이 발해부흥운동을 꾀하자 다시 상경으로 진격해 대인선과 그 부인을 거란 본토로 끌고갑니다. 그러면서 대인선과 그 부인(발해의 전 왕후)에게 '오로고'와 '아리지'라는 이름을 내려줬는데 이는 굴욕적이게 야율아보기와 그 부인이 타던 말들의 이름이었습니다.
대인선은 재위 초기, 위기의 상황에서 대국적인 시각으로 거란에 대항할 계획을 세웠고 이 계획이 흐지무지된 상황에서도 발해의 국력만으로 거란의 공격을 20년동안 막아내며 때론 반격을 가하기도 하는 등 군왕의 자질을 보였습니다. 허나 계획의 중심이 되어야할 중원의 패권국이 막장국가들이라 빛을 바라지 못했기에 만약 송나라가 40년만 빨리 세워졌다면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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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경로에 부여성이 있었는데 난공불락이라고 평가받고 있던 요새가 두달도 안되어 함락당함.
그리고 본문에 기재 되어 있는 것 처럼 기존에는 요동방어선을 공격해왔으나, 요동북부방어선은 부여성만 돌파하면 사실상 방어선 붕괴였기 때문에 치명적이었음..
즉, 부여성의 방어능력을 과신했고, 돌파당하자 요격하려했으나 실패.. 단 두번의 실패로 모든걸 잃은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