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숨겨진 장수
이유는 조숙창의 아버지 조충은 강동성에서 몽골군과 거란유민을 몰아낸 적이 있고 몽골군 장수와 의형제를 맺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철주에서는 결사항전을 하여 2주를 버텨낸다.
철주성 성주 이원정은 몽골군은 저항하면 학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식량이 다 떨어지자 백성들을 식량 창고에 넣어 불을 지르고 군인들과 함께 자결한다.
고려는 철주성의 분전으로 2주의 시간을 벌게된다.
이 상황에서 몽골의 북로군은 고려의 귀주성 공격을 시작한다.
동시에 몽골군은 여러성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한다.
정주성(곽주성 옆)의 장수 김경손은 12명의 별초를 모아 나가서 몽골군을 물리친다.
정주성으로 돌아오니 백성들이 몽골군과 싸우지 않겠다며 문을 닫고 김경손을 쫓아냈다.
7일동안 굶으며 13명은 귀주성으로 도착한다.
<귀주성>
귀주성에는 주변 마을에서 모인 250명의 별초와 2000~5000명의 병사가 있었다.
귀주성의 성주 박서는 별초를 주어 김경손에게 남문의 방어를 맡긴다.
귀주성에는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다. 성벽이 3번이나 무너졌다.
몽골군은 이 틈으로 공격해 들어왔고 1번은 고려군이 몸으로 막아냈다.
2번은 목책에 불을 질러 막아냈고 3번째는 쇠사슬을 묶어 막아냈다.
몽골군은 여러번의 돌파에도 귀주성 남문이 뚫리지 않자 공세를 주춤하게 되는데
이를 안 김경손 장군은 별초들에게 나가서 싸우자고 지시한다.
너희들은 목숨을 돌보지 말고 죽어도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우별초들이 모두 땅에 엎드린 채 명령에 불응하자 김경손은 그들을 성으로 돌려보낸 후 열두 용사와 함께 나가 싸웠다.
김경손은 검을 깃발을 든 기수를 활로 쏘아 즉사시키자 열 두명도 용기를 얻어 분전하였다.
날아온 화살이 김경손의 팔뚝에 맞아 피가 철철 흘러 내렸지만 북을 치며 독전을 멈추지 않았다.
네댓 번 맞붙은 후 몽고군이 퇴각하자 김경손이 대오를 정비하고 쌍소금을 불며 돌아오자 박서가 큰절로 맞이하며 울었고 김경손도 마주 절하며 울었다.
후로 박서는 성을 지키는 일은 모두 김경손에게 맡겼다.
- 고려사 박서 열전 中 -
속도가 장기인 몽골군에 속도전으로 이긴 전투였다.
몽골은 귀주성 함락이 쉽지 않자 포로로 잡았던 박문창을 풀어주어 귀주성에게 항복하라고 권한다.
박서는 박문창이 이야기하자 그자리에서 목을 베었다.
몽골군의 공세는 계속되었는데 가장 강력한 투석기인 트레뷰셋(발석거)을 이용하여 돌을 날렸고
충차로 성문을 공격하고 두차로 땅굴을 파냈다.
고려군은 땅굴은 무너뜨려 생매장시키고 충차는 쇳물을 부어 불태웠으며 공성탑은 풀을 던져 불태웠다.
김경손은 최대 격전지인 남문에서 의자에 앉아 지휘하고 있었는데 돌이 날라와 바로 머리위를 지나쳤다.
뒤에 있던 병졸이 맞아 전신이 부서져 부하들이 자리를 옮기라고 청했다.
"不可 我動則 士心皆動(불가 나아즉 병심개동) 안된다. 내가 움직이면 병사들이 동요할 것이다."
귀주성은 4개월간 버텨내지만 개경으로 곧장 진군한 본대에 고려는 항복하고 만다.
그리고 귀주성과 자주성에 항복하라고 명을 하게 된다.
내 70평생 싸워왔지만 이런 전투는 처음본다 저들은 후에 필시 재상이나 장군이 될 것이다.
- 몽골의 어느 노병 曰 -
귀주성은 결국 항복했으나 자주성은 왕명을 거부하고 저항한다.
고려는 자주성 성주를 서경으로 끌고과 왕명에 대한 거부로 참수를 하려하자
서경에 있던 몽골의 관료가 말린다.
"우리도 이런 장수는 죽이지 않았다 하물며 고려에게 이런 인물은 충신인데 왜 참수하려 하는가?"
<두차>
당시 몽골군은 유럽, 유라시아, 중동, 중국을 누비며 수많은 공성전을 성공했고 세계에서 공성전을 제일 잘 하는 나라였다.
하지만 이후의 몽골의 침략에도 고려는 수성에서 몽골군에게 승리를 거두며 몽골군을 격퇴한다.
김경손은 누구인가?
김경손의 본래 이름은 김평운이며 유학자 김태서의 아들이다.
김경손의 형 김약선은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사위였으며 최우는 김약선을 후계자로 생각할 정도로 출세가 보장된 집안이었다.
하지만 김경손은 최전방의 별볼일 없는 장군으로 부임하며 몽골군이 쳐들어 왔을때 몸을 사리지 않고 싸웠다.
박서는 김경손의 집안을 보고 김경손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나가서 몽골군을 격퇴하고 돌아왔을때 눈물을 흘리며 잘못 생각했음을 반성했다고 한다.
김경손은 이후 최항의 시기에 백령도로 유배를 가고 2년 뒤 최항은 김경손을 바다에 던져 죽인다.
백성들은 그를 높이 의지하고 받들었고 그가 죽자 슬피울었다고 한다.
이 후 몽골은 고려 조정에게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자 감당할 수 없던 고려 조정은 두가지 생각을 한다.
1. 몽골은 약탈이 목적이기 때문에 강이나 바다를 건널 생각이 없다.
2. 막을 수 없다면 피하는게 상책이다.
여러 종합적인 판단으로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하고 30년의 기나긴 전쟁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