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편] 망국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 바다의 신, 성웅 이순신
주성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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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3 11:54
전라좌,우수영의 함대 48척, 경상우수영 원균의 7척을 합해 총 55척이 된
조선 연합함대
(판옥선 52척, 거북선 3척, 소형선박 40여척)
이 세명의 해군 지휘관은 머리를 맞대어
증강된 왜군 함대를 격멸할 전략을 세웠다.
첩보전, 정보전에 굉장히 노력을 많이 기울였던 이순신은
민간정보원을 통해
선박 크기에 따른 적선 숫자까지 미리 파악해 놓았다.
적선은 총 73척이었다.
거제와 통영 만 사이의 견내량이라는 곳은
길이 4km, 폭 600m의 좁고 긴 수로였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큰 선박인 판옥선이 싸우기 불편했고,
좁아서 백병전으로 번질 위험이 높았다.
반면,
거제와 통영사이의 한산도는
틀어막으면
사방으로 적이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곳이었고
한산도는 무인도였기 때문에
왜군이 섬에 상륙해버린다해도 굶어 죽기 딱 좋은곳이었기에
판옥선 5~6척으로 적을 견내량에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
격멸하자는 전략이 세워진다.
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어나게 될 전투는
바로 임진왜란을 바꾼 3대 대첩중의 하나이자,
세계 4대 해전이라 불리는 한산도 대첩이다.
이순신은 원칙주의자였지만, 융통성이 있었고,
우국충정의 마음과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 모두 깊었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여 전쟁 중에도
병서와 역사서를 읽었으며,
직접 붓을 들어 글을 쓰기도 하였다.
위태로운 나라를 걱정하는 그 마음은
전쟁중에 쓴 그의 저서
<난중일기> 에도 잘 나타나 있다.
수국추광모 水國秋光暮 수국에 가을빛이 저무니
경한안진고 驚寒雁陣高 추위에 놀란 기러기떼 높이 나는구나
우심전전야 憂心輾轉夜 걱정에 잠못이뤄 뒤척이는 밤
잔월조궁도 殘月照弓刀 기우는 달이 활과 칼을 비추는구나
경한안진고 驚寒雁陣高 추위에 놀란 기러기떼 높이 나는구나
우심전전야 憂心輾轉夜 걱정에 잠못이뤄 뒤척이는 밤
잔월조궁도 殘月照弓刀 기우는 달이 활과 칼을 비추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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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해전에는 3가지 전투방법이 있었다.
1.백병전 : 함선을 근접시켜 근거리 전투로 강습을 검
2.충격전 : 들이 받아서 전복시키거나 부숴뜨림
3.사격전 : 사격을 통해 적 함선을 부수거나 적군을 사살함
적의 함선으로 타고가서 싸우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충격전과 백병전은 연속으로 이어진다.
근접하여 들이받은 후에 백병전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목선은 들이받아도 침몰하는게 아니라 떠있기 때문이었다.
들이받는 충격전은 로마 군이나 그리스 군같이
백병전이 강한 군이 즐겨 쓰는 방법이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는
많은 배들이 부서져 나무가 바다를 뒤덮어
바다위를 땅처럼 걸어다니며 싸웠다고 한다.
때문에 조선 수군은 사격전을 해야만 했다.
이때 사격은, 요즘처럼 포탄이 날라가서 폭발하는 작열탄이 아니라.
대개, 인명을 공격하거나, 배에 구멍을 뚫는 산탄이었다.
이순신의 전략은
이런 적과 아군의 전술차이를 파악하고
사격전을 하기 딱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아 격멸시키는 전략이었다.
이윽고 결전의 날 전야가 되었다.
이순신은 홀로 생각을 정리하러
수루에 올라가 앉았다.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一聲胡歌)는 남의 애를 끊나니"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一聲胡歌)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 장군의 심정을 잘 대변해주는 시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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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결전의 날 음력 7월 8일
한산도 대첩이 일어난다.
이순신은 소형 선박들을
양 옆의 섬 뒤에 숨겨놓고
선박 6척으로
와키자카가 수군함대 73척을 유인했다.
조선 수군의 선박을 발견한 와키자카는
앞선 패전의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함대를 이끌고
급히 눈앞에 보이는 판옥선을 쫓았다.
적의 선두함이 견내량을 빠져나와 한산도 앞바다에 당도할즈음,
왜군의 눈앞에 조선함대의 진형이 보였다.
그리고 유인 임무를 충분히 수행한 판옥선 6척은
적 함대를 유인해 끌고오다가,
영화처럼 극적으로 180도 반전하여 공격에 가담했다.
반면, 왜군의 선박은 급격한 방향전환이 힘든 배였다.
그리고 왜군선박이 오자, 북소리와 함께
이순신의 호령이 이어졌다.
" 깃발을 들어라 학익진을 펴라 !! "
와키자카는 당황하여 함대에 추격정지 명령을 내려보.지만,
그렇다고 전 함대를 급히 멈출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선두 함대가 급히 멈춘다면,
함대끼리 몇 중 추돌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거짓패퇴 유인전술이 실패하면 그대로 진형이 뚫려 역으로 섬멸 당할수있는 위기가 있다.
이순신의 전술력과 역량, 대담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마치 학이 날개를 편듯한 이 진형이
그 유명한 "학익진"이다.
지형, 지물을 십분활용한 전술
적군의 함선이 그 뒤로 아무리 많아도
협로에서 막 퍼져나오는 지형에 자리를 잡은
조선수군의 함대는
맞붙는 라인에서만큼은 머릿수의 우위를 가지고 싸울수 있었다.
또한 학익진의 배치 덕에 효율적으로
협공이 가능하도록 싸웠다.
학익진은 육군의 포위섬멸진형을 최초로 해전에 사용한 전술이다.
이순신은 거기에 더해
진형의 곳곳에 돌출된 부분을 만들어 놓아
적함대의 진로를 갈라 놓았다.
물길을 파악하고 있던 이순신은
어느 지점에서 막으면 적선이 어디로 선회 할 것이며
선회를 하면 조류를 따라 어디로 흘러가버릴것이다 까지
전부 예측해서 싸웠던 것이다.
양 옆으로 조류를 따라 섬 뒤로 떠내려 간 선박들은
숨어있던 소형선박들에 의해
다시 협공을 받아 각개격파 당했다.
(전략,전술의 기본중의 하나가 적을 분산시켜 격파하는 것이다)
" 뱃머리를 돌려라 ! 방포하라 !!!! "
판옥선들은 뱃머리를 180도로 계속해서 돌려가며
배의 좌현과 우현이 번갈아가며 장전과 발포를 하였다.
(장전속도를 줄이고 연사력을 높이기 위함)
조선 수군의 승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이 일제히 맹렬하게 불을 뿜었으며,
불화살이 적의 함선으로 날아들었다.
거의 하루종일 진행된 이 전투는
규모는 국지전이었으나,
사실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커다란 한 수였다.
- 조선 고종황제의 고문, 미국인 헐버트의 평가
뿐만 아니라, 이 역사에 남을 위대한 승리는
조선 육군에 까지 소식이 퍼져
육지의 조선군이 활력을 차릴수있도록
긍정적인 분위기를 전염시켰다.
전함 47척이 침몰 12척이 나포되어
73척 중에서 총 59척의 손실이 났으며
6,5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
지휘관 마나베는 할복,
와키자카도 부상을 입고 패잔선을 이끌고 패퇴하였다.
전함 55척 수군 1만 노꾼 1만으로 시작한 조선연합군은
전선파손 없음
사망자 3명 부상자 10명으로
경미한 피해를 입으며
압도적인 승리로 하루동안의 싸움을 마감했다.
-다음편에 계속
왜군의 함대 원턴킬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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