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志 ep 5. 유표를 거쳐 유비에게 있었지만 결국 동오의 큰 별로 살아간 반준 Pt 1
자 이제 5명이나 거쳐서 처음으로 손씨의 나라였던 오나라의 인물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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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살펴볼 위인은 유비가 땅을 치고 아까워했을 인물 3명 중의 한 명을 선택했는데요. 아실 지 모르겠지만 처음 출사가 유비였던 대단한 인물이 삼국지에 3명이 있습니다. 첫째가 북방의 명장 전예고 둘째가 구품관인법의 진군이며 세 번째가 오늘의 주인공이자 유일하게 유비 편에서 오나라로 간 사람 중에 성공적인 삶을 살다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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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준, 자는 승명(承明)입니다.
이 사람은 연의와 정사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인물 중 하나인데, 제 생각에 가장 큰 이유는 정사에서는 대우 받지 못했다가 오에서 크게 쓰임받은 케이스(심지어 친정에게 칼을 들이댄)이고, 연의는 주인공이 유비니 소인배로 취급하고 이후 등장도 안하여 공기화됩니다. 연의에서는 관우의 부하인 왕보가 "시기심이 강하고 지나치게 이익을 탐해 큰 일을 맡길 수 없다" 라며 반준을 깎아내리며 형주를 맡기기를 반대하자 관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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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여몽이 형주를 탈취하자 마자 냅다 항복해버리는 박쥐엔딩을 보여줍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뭔 실력도 없는 눈치형 문관 나부랭이가 관우가 망하자 줄을 갈아탄 간신처럼 보이시죠?
정사는 완전, 180도 다릅니다.
우선 배경부터가 빠방합니다. 형주의 대유학자인 송충1(宋忠 or 宋衷)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건안칠자2(建安七子)의 일원인 왕찬에게 칭찬을 받았을 정도의 문학적 재능충!이었다고 합니다.
첫 출사는 유표에게 강하에 종사로 이름을 올립니다. 역시 훌륭한 사람은 남다른지 첫 보직임에도 2개의 조치를 결행하는데,
1. 부패 관리 척결
2. 법률 재정비
이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높은 평판을 받습니다.
유표가 작고하고 유비가 형주의 주인이 되자, 유비에게 높게 평가받았지만 관우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화목하지 못했다고 나옵니다.
시간이 흘러 형주 공방전이 끝났을 무렵, 연의에서 광속으로 항복한 것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이 항복했음에도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무려 손권이 직접 찾아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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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안나가는 똥배짱을 부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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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아니고..손권은 반준이 매달린 침대를 끌어 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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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꼴의 반준에게 승명아..라고 부르며 위로해주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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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감격해서 오나라로 출사를 결심하고 치중으로 제수받습니다. (손권은 아이고 떼쓰는 놈 영입하기 힘들다 이랬을듯)
요 부분에서 쪼끔 의미심장한 것이 촉한의 관리인 양희가 쓴 <계한보신찬> 이라는 책에는 당시에 항복한 거물 미방, 사인, 반준의 행보를 다르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미방은 적극적인 배신자, 사인은 속아서 항복함, 그리고 반준은 '入'이라고만 달랑 써져있는데, 말 그대로 아무런 관계적인 채무없는 초야의 선비가 첫 출사를 하듯이 그저 오나라에 들어갔다고만 서술되어 있습니다. (띠용?) 이런 점으로 볼 때 결과적으로 아까운 인재를 촉한에서는 놓친 것이 맞지만, 배신자라고 욕하고 손가락질할 생각도 딱히 없었을 정도로 애초에 중임을 맡긴 적이 없었기에 저런 표현이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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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준이 항복한 이듬해에 마찬가지로 오나라로 갈아탄 번주라는 자가 무릉에서 손권에게 반란을 일으키며 습진(習珍-병명 아니에요 ㅋㅋ)도 합류해 거세게 일어나자 현지 관리가 손권에게 '병력 1만 명은 보내주셔야 됩니다' 하니까 손권이 반준에게 어떻게 할까 물어봅니다.
반준은 자신있게
“5천 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가면 충분히 번주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라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아니 이보시오 1만 명도 최소한의 진압군인데 그것도 달랑 5천만 보내서 격퇴도 아니고 생포?
손권이 당연히 궁금해서 이유를 물어보니
“번주는 남양(南陽)에 사는 옛날부터 유명한 성씨로 자못 입술만 마음대로 놀릴 뿐이지 실제로는 재주나 지략은 없습니다. 신이 그를 알게 된 까닭은 번주가 일찍이 주의 사람들에게 음식을 베푼 적이 있었는데, 해가 중천에 이르렀을 즈음에도 음식을 얻을 수 없자 10여 명이 스스로 일어났습니다. 이것도 역시 광대가 똑같은 동작을 보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
이러니 손권이 얼마나 예뻐보이겠어요? 좋아서 웃으면서 5천 명을 주니까 그 길로 난을 평정하고 번주를 처형시킵니다. (흠좀무)
추가로 보즐과 힘을 합쳐 습진(나만 가렵나)도 죽입니다.
시간이 흘러 226년, 예현이라는 인물이 죽는데 이 사람은 딸을 손권의 장남 손등의 비로 보낼 정도로 문무에 능하고 훌륭한 인물이었죠.
그런데 후임으로 반준이 임명되고 분위장군(4품 잡호장군), 상천전후(常遷亭侯)에 임명됩니다. 이어서 손권이 황제로 등극하고는 소부(少府)의 자리와 유양후(劉陽侯)라는 더 높은 후작자리까지 받습니다.
특기할 점은 오나라의 군대 제도는 세습령병제(世襲領兵制)인데, 병호를 신하에게 식읍처럼 내리는 것으로 중세 장원제도랑 비슷합니다. 즉, 주어진 땅에서는 왕이나 다름없고, 대를 이어서 세습도 가능한 구조이다 보니 보통 당사자가 죽으면 아들이 물려받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반준이 받았다는 것은 손권이 그만큼 믿고 맡기는, 일종의 품질보증마크가 딱 박혀있었다는 흔치 않은 경우입니다.
강표전<江表傳>이라는 문헌에서는 손권이 꿩 사냥을 매우 즐겨했는데, 반준이 (아 황제야 작작 좀 사냥하러 놀러다녀라) 간언하자, 손권은 “친교를 맺은 이와 헤어진 후, 때때로 잠깐 나간 것일 뿐으로, 지난날처럼 거듭 하지는 않소.” (잔소리 고만해) 라고 답하죠.
이에 반준은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못해, 만기萬機의 직무가 많고, 꿩 사냥은 급한 것이 아니며, 활시위가 끊어지고 화살 끝이 파괴됨도, 모두 해가 될 수 있으니, 특별히 신을 위해서라도 이를 그치고 버리시길 바라옵니다.” (할 거 천지야 황제놈아 이렇게 말했으면 내 얼굴을 봐서라도 좀 알아처먹어라!) 라고 쓴소리를 합니다.
그러고 반준이 나가자 손권이 꿩의 깃으로 있던 일산(우산이 아니고 양산)을 보고 무너뜨립니다. 이후로 손권은 꿩을 사냥하지 않았다고 합니다.(오오)
나중에는 태상(太常, 황실의 종묘와 제사를 주관하는 자리)으로 승진합니다. 태상이라는 자리는 구경(九卿)이라는 황실 전용 아홉 관직 중 하나로, 천자의 어의, 어물, 경비, 식사를 맡는, 군주의 신임없이는 절대로 임명될 수 없는 상징적인 자리죠. 오계의 이민족(한인 아니면 그냥 죄다 이민족이라고 했습니다 그 시대에는)이 반란을 일으키자 손권은 반준에게 부절(천자의 군권을 대행한다는 증표)을 주어 토벌을 맡겼고, 반준은 상벌을 엄격히 집행해서 머리를 베거나 사로 잡은 사람이 수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반준에게는 통찰력이랄지, 곧은 판단력이 있었는 일화가 몇 개 내려옵니다.
1. 보즐이 구구(漚口, 어딘지 모르겠지만 구로 끝나는 걸로 봐서 장강 일대인듯)에 주둔하며 여러 군에서 군사를 모아 병력을 늘리려고 했는데, 손권이 어떻게 할까 물어보니 반준이
“횡포한 장수가 민간에 있으면, 혼란스러워져 해가 되고, 게다가 보즐에게는 명성과 권세가 있어서, 있는 곳마다 아첨을 하니, 들어줘선 안됩니다.” 라며 반대하자 손권이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2. 중랑장 예장豫章의 서종徐宗은 유명한 선비였는데, 유생은 방종하게 두고 부곡(휘하의 군병과 부장들)은 관대하게 내버려두며, 절도를 받들지 않고(싸가지 밥말아 먹었다는 소리인듯), 무리를 위해 전(殿, 큰 전각)을 지어 반준은 마침내 그를 참살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여론도 신경 안쓰고, 치안도 개판 만들고, 개인적인 인성도 바닥이고, 사치도 심한 놈 본보기 잡았다는 것 같음)
3. 위나라 청주에서 귀순한 은번(隱蕃)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말재주가 뛰어나서 손권은 물론이고 여러 중신들이 교류하며 높게 평하고 칭찬했다고 합니다. 아들인 반저(潘翥)도 은번에게 음식을 대접했는데, 반준이 대노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