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국가와 결혼한 여왕,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하다. 엘리자베스 1세
주성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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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9 16:10
각국 대표팀의 축구를 응원할때면 그들을 부르는 별명이 있다.
(ㅈ밥 )
등등.... 그렇다면 스페인의 별명은 무엇일까?
그렇다. 바로 '무적함대'이다.
지금부터 스페인의 영광의 시대.
모험과 탐험의 시대
미개척 대륙과 새로운 발견이 넘쳐났던
대항해시대의 바다를 호령한
에스파니아(스페인)의 무적함대이야기와 그 몰락까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때는 14~16세기
유럽의 탐험가들이 탐험되지 않은 지역을 향해 각지로 뻗어나가며
기록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으로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먼저 이 시기 스페인의 상황부터 살펴보자
스페인은 711년 ~1492년 까지
국토회복운동인 레콘키스타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아랍의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반도 정복전쟁으로 인해 생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토 재정복운동인
레콘키스타 (Re conquista : 재정복) 가
겨우 15세기 정도 되서야 끝나가고 있었다.
유럽의 변방이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15세기가 되서야 겨우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랍세력을 몰아내고
힘을 기르기 위한 루트를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동지중해의 해상강국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중해 무역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쪽으로는 갈수 없는 상황.
남쪽으로가서 탐나는 북아프리카를 먹기에는
이제야 겨우 이베리아 반도를 탈환한 상태이므로
힘이 너무나 부족했다.
그래서 남쪽의 북아프리카로 갈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북쪽으로 가자니 북쪽에는 유럽 최강의 국가
프랑스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있었다.
레콘키스타를 에스파냐보다 먼저 완수했던 포르투갈은 고민하다가 어쩔수없이
북아프리카를 돌아 아래로 내려가보기로 한다.
그걸 주도한 사람이 포르투갈의 항해의 왕자
포르투갈이 1445년 아프리카 서쪽의 튀어나온부분인 베르데 곶을 알아채게 되고
결국 더 나아간다면 인도라는 곳까지 갈 수 있을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당시 최고의 무역품은 인도의 계피와 후추였다.
인도와 유럽의 중계무역의 이익을
실크로드의 국가들, 특히
오스만제국과 베네치아왕국이 독과점하고 있었던 상황.
생산지 가격과 유럽의 가격은 약 100배 차이가 났다.
당시 후추가루의 가치는 같은 무게의 금가루의 가치와 같다고 할 정도였다.
베르데 곶을 발견한 포르투갈은 마침내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스코 다 가마에 의해
인도항로 개척의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중간유통마진을 싹 빼고 후추를 싼 가격에사서 비싼가격에 팔수있게 된 포르투갈은
인도 직교역을 통해 이때부터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다.
그걸 보고 배아파 하는 에스파니아
하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끝이 안보이는 바다.
당시 유럽인들이 보았던 유일한 대양.
대서양뿐이었다.
그리고 그 곳을 무모한 모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가게 된다.
그리고 발견하게 된 곳이 카리브 해(캐리비안) 와
신대륙(아메리카 대륙) 이었다.
신대륙을 발견하게 된 에스파니아는
경쟁적으로 포르투갈과 아메리카 대륙을 탐사하다가
마침내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
그 대박이란 바로 황금의 엘도라도 잉카문명의 발견이었다.
스페인은 이들을 정복하고 식민화하여 수많은 황금을 유럽으로 가져와
막대한 부를 쌓게 된다.
스페인의 진출정책은 교역x 식민지 정책o
포르투갈의 진출정책은 교역o 식민지 정책x
의 양상을 띄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더 나아가 동남아,일본까지 진출
일본에 화승총을 전달해주게 되고
이것을 연구하여 개발한 총이 타네가시마 총
우리가 아는 임진왜란의 조총이 된다.)
"변방이 기회, 중심은 변화를 리드할 수 없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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