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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임란당시 일본군이 입은 피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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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실제 참전 병력은 각 사료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158,700명이 참전하였고, 나고야 성에 예비대로 10번대에서 16번대까지 11만 8,300명으로 총 28만명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측 기록에는 1592년 4월 1차로 1~9번대가 조선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외 부대가 조선에 상륙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 점은 일본 측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나고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장수가 조선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다는 것과, 1593년 6월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점호기록에 나고야의 예비대에 속한 대부분의 장수의 이름과 그들이 이끌던 부대의 병력수가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예비대로서 나고야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1~9번대의 상륙 이후로 1년 2개월 사이에 조선에 추가 상륙했다는 의미가 되며 참전한 기록이 확실한 일본군 수만을 계산할 경우, 임진왜란 초기부터 참전한 일본군은 224,774명으로 집계되는 상황입니다.


사실 어쩌면 개전 초기부터 예비대를 추가로 투입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만약 일본 측 사료에 따라 224,774명이 참전했다면, 2차 진주성 전투 당시 투입된 병력과 예비대로 남겨둔 병력이 약 12만 명이므로 나머지 병력은 1년 2개월 간의 교전 끝에 전사했거나 혹은 부상을 입어서 전선에 빠졌거나, 그도 아니면 투항을 하여 전투력의 손실을 입었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한 셈입니다.


이들 일본군이 1592년 4월에 조선에 상륙한 이후, 각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들이 개전 초기부터 벌인 전투 목록은 조선 측과 일본 측 사료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2개월 동안 조선군과 일본군은 문헌 상 19차례 격돌했고 일부 소규모 전투를 제외한 나머지 전장에서는 조선군이 대패하면서 일본군이 전장을 주도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당연히 조선군이 입은 사상자는 만만찮았고 그나마 해전에서의 승리가 위안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6월 이후로 조선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대규모 병력을 편제하여 전선에 투입하면서 이야기가 조금씩 달라지게 됩니다. 초기 2개월 간의 전역에서 일본군에게 내준 전장 주도권을 빼앗기 위하여 조선군은 각 지역에서 반격을 개시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과 조선군은 승패를 주고 받으며 점차 사상자 비율이 크게 높아지게 됩니다. 점차 투입하는 병력도 조선군이 늘리기 시작했으며 무기력하게 패배하던 초기 전장과는 다르게 피해를 크게 입힙니다.


총 17회에 걸친 주요 지상전에서는 일본군 공격이 4회에 그친 반면, 조선군 및 의병의 공격이 13회로 공세의 주도권이 바뀌었으며 전투 결과에서도 일본군이 거둔 승리가 6회인 반면, 무승부 3회, 조선군 및 의병의 승리는 8회로 늘어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일본군이 입었던 사상자의 비율이 높아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일본군 제6번대의 경우 전라도 공략을 위해 15,700명의 병력을 투입했다가 조선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여 7,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안고서 결국 철수한 것을 보면 일본군이 전투에서 승리를 했어도 사상자가 만만찮게 발생하여 결국 피로스의 승리를 거둘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웅치에서 조선군을 격파하고 이치에서 조선군을 위기로 몰아넣었음에도 후방인 금산성이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들에게 공략을 받아 끝내 철수한 배경에는 계속해서 입었던 피해가 누적되면서 이를 복구하기 어렵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입니다.


원정군의 약점을 안고 있던 일본군은 조선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즉각적인 병력 보충이 어려웠던 반면, 조선군은 패배를 겪어도 곧바로 인적 자원을 긁어모아 다시 병력을 재건하면서 다시 전장에 나왔기 때문에 같은 피해량을 입어도 전투력 회복 속도가 크게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대망의 겨울이 찾아오면서 일본군은 큰 고통을 받게 됩니다. 청야전술로 현지 보급이 막히기 시작한 데다가, 조선군이 겨울에도 불구하고 평안도-함경도까지 진격한 일본군에 대해서 공세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평양 인근 순안에 이빈이 1만에 달하는 병력을 몰고와서 장기전 태세를 갖추고 끊임없이 고니시의 군대를 괴롭히고 있었고, 중화에는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일이 버티고 있었으며 함경도는 아시다시피 뭐...이래저래 수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한성에서 철수한 이후에는 전선이 전체적으로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1593년 6월부터 1596년 5월까지 이렇다할 대규모 전투는 이전처럼 발생하지 않습니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도 일본군은 조선군을 전멸시키고 진주성을 장악하는데 성공했으나 3만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기 때문에 너무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초기 전역 동안 조선군은 31회에 달하는 교전을 치뤘으며, 이 때 투입된 병력의 도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거의 23만에 달하는 병력이 31회에 달하는 격전에서 일본군과 맞붙었고, 전쟁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정규군이었던 조선군이었다는 것을 조금 거친 예시이기는 하지만 증명한다는 내용이 됩니다.


사실 사료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기록이 적은 황해도나 강원도 역시 끊임없이 일본군과 격전을 치뤘을 것이라는 암시를 일본군의 손실 도표에서 알 수 있습니다. 초기 1년 2개월 간의 전장에서 일본군이 입은 피해는 상당한 것이었죠.



1593년 6월에 있었던 2차 진주성 공략을 위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린 작전 명령서 상의 병력은 다음과 같으며 대규모 전투를 치뤘던 1, 2, 6, 7번대 이외에도 황해도와 강원도, 충청도에 투입했던 3, 4, 5번대의 피해도 만만찮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물론 모두 전투로 인한 사상자라고 보기는 어렵겠으나 전부 비전투손실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손실 비율이 너무나도 높습니다. 즉 조선군과 의병들의 저항이 매우 격렬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죠. 지상군이 이정도의 피해를 입었는데 함대라고 다를 바는 없었습니다.



일본 수군 역시 재앙적인 타격을 받게 됩니다. 한산도에서 가용한 주력함대를 모두 투입한 이후 남은 전력은 저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위는 일본측 사료에 따른 것이며 일본 수군에 9,450여 명의 병력이 편제 상 존재하나, 이들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은 아니고 임진년 7월 이후부터 1593년 초 사이에 급히 편제된 것이므로 저들 이외에 또 다른 사상자 발생은 분명히 존재했을 것입니다.


난중일기 기록을 가져오자면, 1년 2개월 동안 조선 수군이 격파한 각종 함선은 260척이니 거의 전투력을 상실시켰다고 봐도 무방한 피해였습니다. 일본군이 침공에 투입한 함선이 700여 척이니 이 중 37%가 전투에서 손실된 셈이었죠. 조선 수군의 피해는 아시다시피 거의 전무했으니.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개전 초기 2달을 제외하고는 조선군을 크게 압도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피해를 입던 상황이었으며 쌍방 간에 큰 손실을 입었다고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선군은 손실 병력을 끊임없이 충원하고 전투력을 보완할 수 있었던 반면, 일본군은 제해권을 상실하고 추가 병력 지원을 받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면서 결과적으로 피로스의 승리 혹은 패전을 겪으며 초기 전역에서 당혹감을 감출 수 없게 되게 됩니다.


육군과는 달리 수군은 큰 피해없이 일본 수군을 압도하면서 유리하게 싸워나갔으니...


P.S.1 러시아스러운 청야 전술은 이 때도 전개됩니다. 오죽하면 포르투칼 종군 선교사가 하소연을 했을 정도.


P.S.2 병력 동원도 참 소련스러워서 끊임없이 병력 투사가 이루어집니다. 전투 손실이든 비전투 손실이든간에 어디서 또 대체 인력 데려와서 방어선 구축하고 대공세도 감행하고 했으니.


P.S.3 군수품 보급은 각 도 관찰사나 병마절도사들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했는데 당시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동원 병력이 초반에 어마어마 했던 것을 보면 행정체계가 잘 살아남아서 아직 일본군이 점령하지 못한 군량창고와 군기고의 무기들을 다 긁어모아서 싸우고는 했다고 합니다.


출처

임진왜란에 관한 새로운 증거와 의미: 참전일본군 및 손실자수, 박희봉

조선왕조실록

日本戰史 朝鮮役


https://blog.naver.com/ghdghd121/221343894944 

네이버블로거 오로라님의 블로그글에서 가져왔습니다

위 내용의 통계들을 보면 조선육군도 초반부를 제외하고는 굉장히 잘 싸웠던듯 싶네요 의병에만 의지한것이 아닌듯 싶습니다

11 Comments
하양버루 2018.08.22 17:55  
사상자니 뭐니 다 떠나서 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조선이 진 전쟁이라 생각함

특히 우리나라 특유의 청야전술을 전국토에다가 했으니, 농업국가에서 농경지 다 작살나고, 문화재는 문화재대로 다 소실되고..
궁궐도 다 불타서, 광해군대 토목공사만 미친듯이 해댔으니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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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우링 2018.08.22 17:59  
[@하양버루] 한반도에서 일어났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렇긴 합니다만 전쟁 목적성을 놓고 본다면 조선이 승리자지요 침략자를 물리쳤으니까요
 전쟁이 일어난 지역에 따라서 승리와 피해가 나뉘어진다면 100년전쟁의 프랑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러전쟁의 러시아 베트남전쟁 당시의 북베트남 고,수전쟁 당시의 고구려 등도 패배자라 해야 하지만 역사의 기록은 해당 국가들을 승리자로 기록하고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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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버루 2018.08.22 18:05  
[@까우링] 뭐 그건 관점의 차이 아니겠습니까..
단순히 개별 사건만 보면 그렇다지만, 좀 더 거시적으로 보면 관점은 달라지기도 하니까요..

일례로 요즘엔 백년전쟁의 승리를 프랑스라고 안하죠.. 영국과 프랑스 왕들의 승리라고들 하죠,,  고수전쟁도 요즘 고구려가 무조건적으로 승리했다고 하지도 않지요. 결국 고수전쟁부터 시작된 여당전쟁에 이르기까지 70년간, 약 2세대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황폐화 축적은 고구려 멸망의 대내적 요인이기도 하니까요..

역사의 기록은 그걸 기록한 해당 역사가의 관점일 뿐이니,, 누가 승리했는지도 시각에 따라 달리보이는듯 합니다
까우링 2018.08.22 18:07  
[@하양버루]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하양버루 2018.08.22 18:09  
[@까우링] 사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완전 무기력하게 당한걸로 알고있는 분들이 많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걸 알려주는 자료라서, 저도 좋은글 읽었습니다
역사 자료 자주 올려주세용
공기청정기 2018.08.22 18:52  
[@하양버루] 그럼 조선이 멸망해도 진거고 왜놈들 놀아내도 진거고 어떻게해야 이기는거지?
피해없이 클-린하게 이기는것만 이기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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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쿄쿙 2018.08.22 20:11  
[@공기청정기] 어차피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서 굳이 캐묻을 필요가 없지 뭐. 승자 없는 전쟁이였다 라고 해도 틀린말은 아니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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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jakym 2018.08.22 20:26  
[@공기청정기] 역습을 해서 열도를 먹었으면 이기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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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ㄴㅇㄹ2 2018.08.23 01:40  
[@하양버루] 수성이니까 이긴 전쟁이지.

피해는 우리가 훨씬 컸지만


베트남전이 베트남이 이겼어요? 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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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우유 2018.08.23 02:12  
조선이 일본 침략하다 도쿄 앞바다에서 수군 70% 홀랑 수장되고
회군하다 왕 홧병으로 죽어서 반란일어나 다른왕조로 교체된다음에
일본에다 잡아온 포로 돌려보내주면서 통신사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면
과연 뭐라고 역사에 기록을 했을까??
일본이 준비를 안해서 조선한테 쳐맞았다고 했을까?
조선이 무리하게 일본을 공격하다 자멸했다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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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TaxServ… 2018.08.23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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