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의 운명을 바꾸다. 오를레앙의 성녀 '잔다르크' -4-
마침내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작심하고 한번 모아 프랑스의 가스코뉴 지방으로 향해 쳐들어간다.
이 가스코뉴 지방은 돈도 많고 싸움도 잘하는 지역이었다.
('삼총사' 의 달타냥의 고향이라고 함)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필리프 6세는 더 이상 못 참겠다며
대군을 거느리고 요격하러 간다.
가뜩이나 병력도 적은데 골치아파진 에드워드3세,
프랑스를 횡단하여 자기 편이 있는 플랑드르 쪽으로 튄다.
여기서 쫓고, 튀는 치열한 추격전이 벌어진다.
몇번을 잡힐 뻔하다가 결국 더 이상 도망못가겠다며 지친 영국군은
마침내 프랑스군에게 따라잡혀 벌어지는 전투가 '크레시 전투'이다
직업군인 제도를 운영했던
영국군은 농민병이 대다수였다.
프랑스군은 아직 봉건적구조로 인해
봉건 기사들의 군대와 그 부하들의 군대였다.
훨씬 멋있었던 프랑스군대들,
프랑스의 군인들은 본인들의 멋있는 모습에 스스로 감동했다.
기사가 갑옷을 입는데 약 15분 이상 걸렸다고 한다.
그 시간 동안 시종들은 갑옷에 녹이 슬지 않도록
피마자 기름을 이용해 광이나도록 갑옷을 닦았다.
반면, 꾀죄죄한 상태로 약탈물들을 짊어진 상태의 영국군들.
프랑스군 눈에 비친 영국군은 도적떼 혹은 거지떼처럼 보였다.
언덕에 올라가 3개 진영으로 나누어 포진한다.
당시 이 전쟁에 전 유럽의 용병들이 참전했는데,
프랑스 군에는 당시 유명했던 제노바 석궁병들이 있었다.
이들은 유명했기에 상당히 비싼 용병이었다.
프랑스 군의 생각은 제노바 석궁병을 세워서
적을 약화 시킨후 본인들의 기사들이 돌격하면
아주 쉽게 이길것이라 생각했다.
싸움 전날에는 비가 왔고, 비에 맞은 생쥐꼴로
영국군이 언덕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프랑스의 정찰대장이 가서 영국군 진영을 봤더니,
올라가는 오르막길 위에
삼각형으로 진을 치고 있는 영국군.
정찰대장 본인이 봤을때, 너무 지형이 불리한것 같으니 왕에게
"날이 밝은후, 통제를 제대로 해서 체계적으로 공격합시다" 라고 한다.
당시 프랑스 군은 다양한 기사들이 섞여있어 통제가 제대로 되지 못했고,
프랑스 왕이 정찰대장의 말을 들어보니 맞는 말 같았다.
그래서 프랑스왕이 영국군의 상태를 보러갔는데...
왕이 보니까, 비 맞은 생쥐꼴로 불쌍하게 웅크리고 있는 영국군.
'저걸 우리가 굳이 작전계획을 짜야되냐?' 라고
개무시를 하면서 전투가 시작된다.
돌격명령이 아닌 각자 중구난방으로 돌격하는 프랑스 기사들,
전장터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이들에 대항하는 영국군의 주력무기는
기후가 맞지않아 복합궁을 만들기 어려웠던 상황, 단목궁으로 장력을 세게 만드려면 활의 길이가 길어야했다.
헌데, 이 롱보우에게 프랑스가 큰 코를 다친다.
온도와 습도에 민감한 활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성능이 뚝 떨어졌다.
옛날 우리나라 에서도
"부인하고는 안고 안자도 활은 안고 잔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활은 온도와 습기에 따라 탄력과 내구성의 차이가 엄청났다.
롱보우를 가지고 있던 영국 장궁병들은, 활 시위가 젖지 않도록 여분의 활 시위를 가지고 다니거나 , 활을 품에 넣고 다녔다.
(이때, 반대로 제노바 석궁병들은 활 시위 관리가 잘 안됬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니 비가 오는 상황에서 영국 궁수들이 활을 몸에 껴안고
온몸에 비를 맞으며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욱 처절해보였다.
하지만 막상 전투가 시작되니, 위에서 아래로 쏘는 지형의 이점과
롱 보우가 관통력과 사거리가 줄지 않고 제대로 된 성능을 발휘하면서
그렇게 프랑스군은 영국군에게 호되게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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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백년전쟁에서는 주로 어떤 무기들이 쓰였는지 살펴보자.
14세기 부터 본격적으로 쓰인 강철은 무기의 질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강철의 사용으로 크고 무거운 롱소드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진 상황
숏소드가 대세를 이루었다.
숏소드는 가벼워 사용하기 쉽고 찌르기에 적당했고 튼튼했다.
검날의 폭과 무게는 크게 줄어들었다.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플레이트 아머(판금갑옷)가 등장했다.
사슬갑옷의 약한 방어력에 불만이 많았던 기사들이
전신을 보호할수있는 플레이트 아머를 입기 시작했다.
이 플레이트 아머와 몸 사이에 완충작용을 해주기 위해
아퀘튼 이라는 두꺼운 섬유갑옷을 덧대입었다.
이 플레이트 아머의 전체 무게는 20 Kg 정도로 꽤 무거웠다.
이런 무겁고 비싼 갑옷은
당연히 기사 또는 돈 많은 사람만 입을 수 있었다.
일반병들은 전신갑옷보단, 상체를 보호하는 흉갑정도만 착용했다.
배서닛은 물동이를 뜻하는 베이슨에서 유래된 말이라고한다.
바이저의 모양이 뾰족해서 피그페이스라고도 불렸다고한다.
반면, 보병들은
이런 튼튼한 갑옷과 투구들 때문에 기사들은
검보다는 타격무기를 선호했다.
두세번 내리치면 대부분 다 찌그러졌다고 한다.
투구를 가격했을 떄는........
말 탄 기사들에 대항하기 위한 보병들의 무기도 진화했는데,
16세기 까지 쓰인 할베르트는
독일어로 막대기를 뜻하는 'halm'과
도끼를 뜻하는 'barte'가 합쳐진 말이다.
이 무기를 이용해 도끼로 적 기병의 다리를 절단하고
반대편의 갈고리로 적을 끌어내릴수 있었다.
적이 쓰러지면, 창끝으로 바이저를 열고
창 끝을 그 속에 박아 넣었다고 한다.
제노바 석궁병들이 가장 유명했다.
파비스라는 방패가 함께 전쟁에서 활약했다.
크기가 거의 180cm, 화살의 길이만 100cm에 육박했다.
화살촉이 강철로 되어있어 4.5mm 두께의 강철판을 관통했다고 한다.
이 롱보우 사수들을 요먼이라 불렀는데 영국의 최정예로 꼽혔다.
기본 10초당 한발씩,
더 숙련된 요먼들은 6초에 한발씩 쏠 정도였다고 한다.
크레시 전투 당시,
재장전 시간을 벌기위해 땅에 꽂아놓고 쓰는 방패인
파비스 방패가 없었던 제노바 석궁병들은
방패를 가져오도록 시켰으나, 영국군의 허름한 꼴을 보고
'그냥 없이 하겠다'며
파비스방패 없이 싸운다.
활 관리를 열심히 했던 영국장궁병과 달리
물에 젖은 제노바의 석궁은 성능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장궁병에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된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프랑스기사들은
비에 젖은 언덕길을 무작정 돌격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노련한 영국 장궁병들은 이들의 돌파력을 줄이기 위해
말에다 화살을 쏘기 시작한다.
진창이 된 언덕길에 쓰러지는 기사들,
피로도가 극심히 늘어났다.
언덕길이 쓰러진 기사들로 인해 교통체증이 일어나자,
언덕 위에서 쉬고있던 영국 기사들과 보병들이 달려나와 두드려 패기 시작한다.
배틀 훅과 할베르트로 무장한 보병들은
기사들의 바이저를 열고 그곳으로 창을 찔러 넣기 시작한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와 싸우며 전투경험이 프랑스군보다 많았던 영국군.
직업군인 체재에서 영국군은 장교의 지휘 아래 기병,보병,궁수의 협력 전투가 가능했다.
반면, 여러 동네 기사단들로 이루어진 프랑스 기사들은
동네 기사들끼리 모여 각자 돌격했다.
그렇게 싸우다 져서 후퇴하는 기사들과, 앞이 보이지 않으니
'너네들 비켜 우리가 해줄게' 라며 자신감을 가지고 돌격하는
다른 동네 기사단 끼리 엉키게 되면서 서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백병전에서는 대형이 정말 중요한데, 아군끼리 엉키게면서
영국군에게는 거의 사냥터가 되었다.
심지어는 더 올라가기 쉬운 좌익쪽으로는 공격하지도 않았다.
장궁이라 하더라도 직각으로 맞지 않는이상,
곡선으로 이루어진 플레이트 갑옷은 뚫지 못했기에
프랑스기사들은 본인을 무적의 탱크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용기는 충만해 있었으나 초조함만 가득한 상태로
프랑스군의 부대가 연속으로 15~16번 돌격했으나
프랑스 기사들과 보병은 영국군에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영국군 1만 2천(중기병 4000기),
프랑스군 3~4만(6천정도의 제노바 석궁병 제외시, 거의 대부분 기병)으로 시작 된 전투는
프랑스군 거의 3만 가까이의 전멸로 끝이났고,
이 중에는 필리프 6세의 동생과, 신성로마제국황제의 아버지인 룩셈부르크의 백작등
화려한 인사들도 다수 포함되어있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약탈을 한 후 승리를 자축하며
"확실한 항구도시를 하나 점령해 약탈의 교두보로 삼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영국군 또한 대전략이 없이, 다음에 털 도시를 찾아간 것이 칼레였다.
그래서 칼레항을 10개월간 포위하는데,
여기서 프랑스 수비대가 악착같이 수비를 해낸다.
결과적으로 시간을 소모한 영국은 크레시 전투로 인해 생긴 이득을 전부 날려먹고,
결국 칼레를 점령하긴 한다.
이때를 배경으로 조각한 것이 그 유명한 로뎅의 '칼레의 시민'이다.
악에 받친 영국군이 칼레가 점령당하지 않자 점령하면 모두죽이겠다며 벼르고 있는 상황,
결국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자 양측에서 교섭을 하는데,
이때 대표로 나간 칼레의 시민 대표 6명이 영국군에게 머리도 깎이고 수모를 겪는다.
그래도 영국왕비의 간청으로 목숨은 구한 칼레의 시민 대표들
(로뎅은 우리에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런식으로 백년전쟁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닌것처럼 되고,
도시쟁탈전의 양상으로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