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편] 망국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 바다의 신, 성웅 이순신
주성치
1
713
7
0
2019.02.13 11:58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거기에 한반도의 정세는
명나라의 합류로
수군과 육지에서 일본군에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고 있었다.
왜군은 동력을 잃고
사기가 점점 떨어져 갔으며
한반도에서 버티며 후일을 기하기에는
안정적인 보급로 없이 한반도의 겨울을 나야하는
최악의 상황이 닥칠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섬멸하기 위해 노량근처로 이동하는 조-명 연합수군은
고니시의 퇴로를 차단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사천,고성,부산,남해에 주둔하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 등 왜군 장수들은
고니시를 구출해내기 위해
수군 6만명과, 500여척이 넘는 대 함대를 이끌고
조-명 연합군의 포위를 뚫고 고니시를 구출해오는 작전을 세운다.
조-명 연합군의 병력은
조선병력 7,000명
함대 60여척
+
명 병력 18,000
함대 300여척
총 수군 25,000명과
360여척의 함대였다.
왜군 수군 연합 함대 VS 조-명 수군 연합 함대
이 두 수군 대함대가 맞붙은 노량에서 벌어진
이순신의 최후의 전투.
이것이
노량해전이다.
이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의 거의 마지막 대전투였다.
이순신은 함대 일부를 매복시켜놓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今日固决死(금일고결사) 願天必殲此賊(원천필섬차적)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이항복의 백사집에 기록된 이순신의 맹세
1598년 음력 11월 19일 노량에서 발발한 이 해전은
이순신이 벌였던 모든 전투중 가장 격렬한 전투이자,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전투이다.
목숨을 걸고 탈출하려는 왜군과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조선군.
임진왜란을 일으킨 전범 도요토미는 죽었으나,
왜에 전쟁배상금을 요구할수도 없는 상황.
이순신은 죽기살기로 싸우며 단 한척도 무사히 살려보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싸웠다.
많은 왜군을 무사히 보낸다면,
왜군이 재침략 할 것임을 이순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순신의 모든 해전 중 가장 격렬했던 전투
이 전투의 목적은 방어가 아니라
섬멸에 있었고, 양쪽 다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였다.
"방포하라!! 단 한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
한나절이 지나도록
치열하게 벌어지는 전투..
결국 이 마지막 대전, 적선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고 세상을 떠난다...
"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
- 이순신의 유언
이 것이 이순신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가 죽어가는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지,
어떤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을지는 그 자신만이 알 일이다.
마침내 전투가 끝나고
이 날의 전투 결과는,
왜군 선박 250여척 완파
150여척 파손
100여척 나포
사상자(사망+부상) 5만 5천~6만 여명 으로
왜군이 전멸에 가까운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조-명 연합군이 승리하였다.
조-명연합군의 피해는
조-명 병사 1,000여명 이상 사상
조선군 지휘관 절반이상 사망
그리고.....
조선 수군 총 지휘관 충무공 이순신 사망
死舜臣破生倭(사순신파생왜)
죽은 이순신이 산 왜적을 깨뜨리다.
- <선조실록>선조 31년 11월 27일 기사
그는 비록 죽었으나,
임진왜란의 첫 승리와
마지막의 결정적인 대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그는 하늘로 떠나갔다.
그리고
임진왜란은 노량해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노량 해전의 의미란 어떤 것일까?
이순신의 죽은 전투이기 때문에 전쟁사적 의미가 많이 쇠퇴했으나,
전쟁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전투이다.
1. 배상금을 요구할 수 없는 왜군에 대한 징벌적 차원
2. 조선에 대한 재침략 방지
크게는 이 두 가지로 노량해전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으나,
이순신 개인에게 좀 더 포커스를 맞추어 보자,
조선중기 최악의 침략전쟁
임진왜란,
사실은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100년이상 일본의 재침략 걱정에 떨었다.
정식 강화협상을 맺고 퇴각한 것이 아니기 때문.
특히 , 선조는 죽을때까지 이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사실 일본군의 퇴각준비소식에
이순신 장군 밑의 부하장수와 병사들도
일본군이 간다고 하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순간이 드디어 찾아 온 것이다.
허나, 이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에 있었던 해전중 가장 격렬한 전투이자,
가장 많은 아군피해를 낳았던 전투이다.
어떤 의미로 보면,
" 왜군이 항복하고 간다는데, 내가 굳이 목숨걸고 나가 싸울 필요가 있느냐? "
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도 고향에 남겨진 친우와 가족들이 있였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부하장수 중 절반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다.
그 바다의 신이라는 이순신조차
여기에서만큼은 많은 피해를 입은 격렬한 대 격전이었다.
노량해전의 선택은 분명한 것이었다.
" 적이 여기서 치명타를 입지 않으면, 또 쳐들어 올 것이다. "
군인의 사명이란,
살아서 집에 돌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살아서 끝까지 전장에 남아 전쟁을 막고, 방지하는 것
그도 오랜 전쟁에 지쳐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겠지만,
노량해전은 정말 군인정신으로 막았던 것이다.
내가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
이순신과 조선수군은 노량으로 가서
총 수군 전사자의 절반이상이 노량에서 사망한다.
이 부분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의 죽음에 포커스가 가려져
강조가 덜 된 부분이다.
이순신과 그 부하들은 후세를 위해 죽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세상의 끝에 선 투쟁
스스로 피흘려 부르는 희망
불멸의 승리를 향해
오라, 아득한 적이여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 <칼의노래> 김훈
23전 23승
영웅을 넘어 성웅으로,
전설을 넘어 신화가 된 바다의신, 이순신의 마지막 사투는
이기고도 죽고, 죽고도 이기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순신 사후, 그 뒷 이야기
종전 후 동아시아 3국은 어찌 되었을까?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바꾼 임진왜란
국사 시간에 배웠던, 조선 후기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임진왜란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사건들이다.
신분제 동요, 상업 발달 등등...
그리고 중국에서는 국력이 쇠퇴해져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계기가 된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
그 가문이 몰락하면서
1603년 도쿠가와 막부가 수립되며 에도시대를 열게 된다.
이리하여
일본도 개방정책에서 > 쇄국정책으로 가게되고
이것이 근대 일본을 만드는 요인중 하나로 큰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
.
.
.
.
.
.
.
.
.
.
.
.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난중일기>
철저한 군인이었던 이순신은 예전 북방에서 근무할때,
출진하여 병력을 많이 잃거나 하면 징계를 받을수있는 위험이 있음에도
출진하여 백성을 구출해오는등,
출세보다 항상 백성의 안위를 생각하는 애민정신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의 시조에서도 애민정신을 엿볼수 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싶은 시름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끓나니
당시 조명이 없던 시대라 왜군이 밤엔 습격을 하지 못했는데,
왜군들은 보름달이 밝게 떠있는 밝은 밤을
많이 이용하여 야습을 감행했던 것이다.
보름달이 밝은 것을 보고
이순신 장군은 백성들이 또 어디서 야습을 당할 것이
염려되어 애가 끓는다며 저런 시조를 읊은것이다.
일성호가는 야습을 당할시에 도움을 청하는 호각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또 한가지 역사적 사실.
이순신과 원균은 급하게 승진했으나,
선조는 원균과 이순신이 죽을때까지 평생 한번도 만난적이 없었다.
차근차근 승진했으면, 중간에 왕도 만나고 인품에 대한 평가가 됬을텐데,
과장이 갑자기 이사가 된 격
너무 고속승진하여
전쟁시 평가기준이 없어 조정또한 혼란스러웠다.
선조와 대신들 또한, 원균과 이순신에 대해 판단이 제대로 서질 않았던 것이다.
어느정도였냐 하면,
이 사람은 정말 당파에 휩쓸리지 않고 통찰력있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이덕형이 이순신 장군님이 전사하고 난 후 남해로 내려간다.
그리고 선조한테 보고를 하는데,
'사실은 자기도 원균말을 믿고, 이순신이 재주는 있으나
사람이 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지금까지 알고있었다.
그런데 내려와서 백성들이 하는 것을 보니 이게 아니더라'
라는 것을 깨달았다며 보고를 올린다.
통찰력이 있었던 이덕형은
백성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이순신의 죽음으로 백성들과 부하 장수, 병사들이
장례할때 애통해하며, 슬퍼 우는 모습을 보고,
"이순신이 내가 알던 사람이면, 백성들이 절대 이렇게 나올리가 없다"라며
종전의 믿음이 오해였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런 통찰력있는 인물조차
한양에 있을때는,
이순신이 그런 문제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이순신에 대해 선조와 조정중신들이
얼마나 오해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
.
.
.
.
.
28살 다리골절을 당함에도 끝까지 시험을 치른다.
그의 대쪽같은 성품이 잘 나타난다.
1576년 30대 초반에 무과에 급제해 북방에서 오랑캐를 토벌한 이순신
1591년 전라좌수사로 임명된뒤 수군을 강군으로 키워내며
진정한 군인의 길을 걷고자 했던
이순신 장군의 충정은
주위의 시기,질투와 무고, 파직속에서도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시대의 리더,
바다의 신, 성웅으로 존경받는 위인,
그가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힘을 다하여 나랏 일에 죽기로 맹세하고
몸을 나라에 바쳐 적을 무찔러 씩씩하기도 하며
공을 세워도 자랑하지 않고
싸움에 이겨도 뽐내지 않았으니
굳세고 바르게 하며 간성을 자임하였으므로
이정에 공 새겨지고
청사에 빛남 전하였으니
백대에 명예로우리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임진왜란이 지금의 우리에게 전하는 메세지는 무엇이 있을까?
선조의 마지막 멘트가 역시 가장 교훈적이리라 생각된다.
우리가 비판이 두려워 실현하려고 하질 않는다. "
" 전쟁을 겪어보니 중신들은 탁상공론만 좋아하고,
드러내는 이야기만 좋아하더라
그리고 이 위기상황에서도
자기의 사적인 이익을 정치에 반영하려 하더라 "
다르지 않지 않나,
어쩌면 미래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것이,
임진왜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인류역사에서
가장 경계해야 될 모습이라 할 것이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