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망국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 바다의 신, 성웅 이순신
주성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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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3 11:38
엄청난 대군을 조선에 보낸다.
이 전쟁이 16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
임진왜란이다.
전세는 이미 일본군으로 크게 기울었다.
약 7년 간의 전란
그 끝에는 조선의 승리를 이끈 위대한 장군이 있었으니
그는 훗날 그의 후손들이
가장 존경하는 장군이 된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모두 그를 알고있다.
그는 바로
" 勿令妄動 靜重如山 "
물령망동 정중여산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처럼 무겁게 행동하라"
전설을 넘어 신화가 된
그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알아보자.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기인
16세기
동아시아의 정세는 어떠했을까?
임진왜란은,
조선에만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었다.
조선뿐 아니라 중국사와, 일본사에서 모두 획기인 전쟁
동북아 역사의 판도를 바꾼 전쟁이다.
당시 중국같은 경우에는
명나라가 아직 명맥은 유지하고 있는데,
점점 삭아들어가던 시절이었다.
13대 황제 만력제시대 중반무렵부터
국운이 쇠퇴기에 접어드는 명나라.
명나라의 황제들은 역대 중국황제 중에서 일을 제일 안했다.
1년에 열흘이상 정사를 봤다라고 하는
명 황제가 두명 뿐일정도.
반면, 일본은
전국시대의 내전속에 정치적,사회적 변동이 컸다.
오랜 전란 속에 살다보니,
영주들이 굉장히 돈벌이와 기술발전, 전술개발에 투자를 많이했다.
전국시대가 종식되고
전 국토가 하나로 연결이 됬다.
그렇게 되니, 국부가 급격히 증가했다.
대외 무역도 하고, 유통망도 풀리면서
동네마다 있던 특산품이 전국시장으로 퍼졌고
시장이 커지니 농부들은 더욱 열심히 일했다.
결과적으로 단위생산가가 5배가 뛰었다.
100년 가까운 전국시대를 거치며
신무기를 들이고, 매일 같이 칼싸움을 하며 살던 일본의
군사력의 수준은 상상이상이었다.
일본군이 조총을 임진왜란에 썼기 때문에
조총이 군사적패배의 결정적 원인으로 생각하실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결코 조총만이 결정적 무기가 아니었다.
일본은 진법이 상당히 발전한 상태였고,
집단전술을 끊임없이 실전을 통해 연마했다.
일본의 육군은 임진왜란 당시
동아시아 최강이 아닌,
세계 최강의 군대였다.
전 세계 어느 국가도 그렇게 많은 군인과
높은 훈련도를 가진 국가가 없었다.
때문에, 그들도 그들의 힘이
어디까지인지 모르고 있었다.
엄청난 야욕가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는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조선에다가 '명으로 가는 길을 내어달라'
라는 말을 하며 조선으로 들어온다.
과연 그의 목적은 정말 명이었을까? 아니면 조선이 원래 목적이었을까?
대륙진출에 대한 야욕은
항상 일본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뿐만 아니라
동남아(필리핀,말레이시아 등)에도 협박장을 보냈다.
그는 자기들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팽창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작전지도에는
안남(베트남)까지 화살표가 가있었다.
그는 그만큼 자신있었던 것이다.
특히, 1592년 조선으로 출병시킨
15만 군대는 예비군 개념이 아닌,
정예부대였다.
이런 상황 조선의 전쟁준비 상태는 어떠했을까?
임진왜란을 부끄러워 하는 현대 한국인들은
' 그때, 당파싸움하느라 전쟁준비가 안되있어서 일본 한테 졌다.'
이런 식으로 변명을 자꾸 하려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훨씬 더 창피한 일이다.
대표적으로는 조선통신사를 들 수 있다.
'한쪽은 쳐들어 올것같다고 했는데, 한쪽은 아니라 그랬다.'
라고 하는 얘기.
사실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은 농업국가이고, 무역도 안했다.
조선만 그런것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농업국가에 살면,
자기 기준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왜냐면, 다른나라를 보.지 않으니까
즉, 농업국가 조선의 시선으로 일본을 바라본 통신사일행의 불협화음이었던 것이다.
무역국가가 아닌, 자급자족인 농업국가이니
타국에 대한 관심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졌고,
통신사일행들은
일본사회를 이해하는 능력이 안됬던 것이다.
전쟁을 미리 탐지를 할때에는,
첫째로 저 사람들이 전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둘째로 이 사회가 타국에 침략하면, 그것을 내부에서 지지 해줄만한 이익이 있거나 지지여론이 있는가?
하는 것과 같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보아야 하는데,
이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할 수가 없는 것이
조선통신사도 한동안 안가다가
약 150년만에 파견이 되니 어떻게 한번 보고 전쟁의 기운을 탐지 할 수 있었을까.
아무튼
조선 통신사의 상반된 보고에,
조금 친한 대마도의 왜인을 불러
침략여부를 재확인 하기도 하였다.
그 왜인이 말하기를
"일본은 조선에서 일본에 왔던 사신들 중에서 지금도 신숙주를 제일 칭찬 한다.
신숙주같은 인물을 보내라 "
신숙주는 통찰력이 깊어 딱 보면, 그나라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겠다는 것을 편지에 써서 보냈다.
편지의 의미를 축약하면,
" 우리가 통일이 되서, 이제 너희가 알던 나라가 아니다. 엄청나게 강해졌다. 그러니 그냥 우리편 들어라 "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그 편지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조선의 미흡한 전쟁준비는
정보전의 실패 뿐만아니라,
군사제도의 한계에도 문제가 있었다.
조선 군사제도의 근간은 부병제였다.
간단히 말하면, 요즘 예비군 제도 같은 것이었다.
군대를 두지 않고, 전쟁나면 예비군을 동원하여 싸운다는 것.
평시에는 농민, 전시에는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방법이야 괜찮았으나, 여기에는 함정이 하나있었다.
옛날에도 존재했던 병종(요즘으로 따지면 주특기, 궁병, 창병 등등)
그런데, 부대가 있어야
동원예비군 처럼, 모여서 자신의 주특기에 맞는 부대를 가서 훈련을 하는데,
부대가 없었다.
군대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편제,
편제가 되지 않는 군대는 오합지졸이었다.
그런데, 불특정다수의 동네사람들을 그냥 모아서
훈련을 시키려다 보니, 창병,포병,기병,궁병등의 비율이 맞지가 않았다.
이렇다보니 제대로 편제를 할수가 없었고,
할 수 있는 훈련이라고는, 제식훈련정도 밖에 없었다.
또 하나 ,
조선도 옛날부터 그 문제점을 알고 있었으나 고치지 못했던 이유가 있다.
편제를 하면, 나가서 기동훈련을 해야 했다.
그런데, 기동훈련을 하려면, 최소 일주일은 필요했다.
그러니, 밥을 줘야했다.
그런데 조선은 밥을 주지 않았다.
자기가 도시락 싸와서 해야했다.
그러니 누가 자기 말을 끌고오며, 누가 자기돈으로 도시락을 싸와서 훈련을 받으리,
열악한 재정으로 편제 훈련이 유명무실해졌던 것이다.
16세기가 되면, 국가가 돈을 벌어서 월급주면서 전문군인을 양성하는 시기 였고,
전세계가 다 그렇게 했다.
하지만, 조선은 그것이 부담스러우니,
세금도 걷지 않을테니, 부병제로 하자는 것이었는데,
국책이 이상하게 된 것이
부자와 가난한 백성이 있으면,
돈이 있으니 관직을 갖고싶은 부자에게는
관직도 주지않고 노블리스 오블리제 실천하라며
너는 부자니까 나와서 군사훈련 받으라고 하고,
가난한 백성은 부자들이 군사훈련 받는데 돈이 필요하니
군사훈련받는 사람의 농지에 가서 일을 해주거나, 그 돈을 대라 라고 하는 이상한 제도 였다.
부자한테는 군사훈련 받으라고 하고,(근데 벼슬은 안줌)
가난하여 몸밖에 없는 사람한테는 군비를 지원하라고 하는
이상한 시스템.
이리하여 조선의 대립제 [代立制] 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군역의 의무를 다른사람이 대신 지게 하는 제도)
결국 전쟁 초기 장부상에는 9만의 병력이 조선에 있었으나,
막상 전쟁이 터져 동원을 하고 보니 싸울 병력이 없었다.
우리는 여태 이것을 조선이 부패해서 그랬다고 알고있었지만,
이것은
제도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반면 일본은,
오랜 전란을 거치며, 가장 효율적인 제도를 만들어 냈고
군인과 농민이 나뉘어져 있었다.
군인은 훈련만 받으니 싸움도 잘했다.
농민은 농사만 지으니 돈을 댔다.
그러니 돈도 풍족하고 군인도 잘싸웠다.
조선은 농병일치의 사회
농사도 지어야 하고 , 군인훈련도 받아야 했던 상황
훈련은 훈련대로 엉망이고,
농민은 농민대로 제때 농사를 못지어 가난했다.
죽도 밥도 안되는 상황이 됬던 것이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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