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은 추출법과 일본 이야기
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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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2 10:40
예로부터 은광석에서 순수 은을 뽑는 방법은 고급 기술이었고 대부분의 나라는 은광석을 그냥 계속 가열해서 잿더미에서 은을 뽑아내는 방법을 썼는데 투자대비 결과물이 시원치않아 순수 은은 고가의 화폐로 사용되었다.
때는 연산군 시절 연산군은 사치를 즐겨서 항상 돈에 목말라 있었는데, 어느날 양인 김감불, 노비 김건동이 연산군 앞에서 화학실험을 진행하였다.
김감불, 김건동은 자신들이 개발한 방법이라며 금속의 녹는점 차이를 이용해 납과 은이 섞여있는 저품질 은광석 덩어리에서 순수한 은을 쫙쫙 뽑아내었다.
당시로선 최첨단 제련기술, 양인 + 노비가 시현한 실험인데도 연산군이 직접 참관했단 이유로 조선왕조실록에 유일하게 기록된 화학실험
연산군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함경도의 은광에서 이 방법을 이용해 은을 대량으로 뽑아내라고 지시하였다.
그런데 호조판서가 한발 더 나아가 이 기술을 민간에 뿌려서 민간사업자가 은을 생산하게 하고 우리는 세금 눈탱이 씌워서 앉아서 돈벌자고 연산군에게 제시, 연산군은 좋은 생각이라며 즉시 시행하라고 명령함.
良人金甘佛、掌隷院奴金儉同以鉛鐵錬銀以進曰: "鉛一斤, 錬得銀二錢。 鉛是我國所産, 銀可足用。 其錬造之法, 於水鐵鑪鍋內, 用猛灰作圈, 片截鉛鐵塡其中, 因以破陶器, 四圍覆之, 熾炭上下以鑠之。" 傳曰: "其試之。"양인(良人) 김감불(金甘佛)과 장례원(掌隷院) 종 김검동(金儉同)이, 납[鉛鐵]으로 은(銀)을 불리어 바치며 아뢰기를,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는데, 납은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리는 법은 무쇠 화로나 남비 안에 매운재를 둘러 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서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어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아래로 피워 녹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시험해 보라." 하였다.연산군일기 49권, 연산 9년 5월 18일 계미 3조
이 과정에서 연산군의 후궁 장숙용 집안이 채굴권도 받고 면세혜택도 받는 등 국정농단에 악용되어 조선조정이 실제로 벌어들인 돈은 많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은 제련법은 혁신적이라 순수 은의 대량생산을 불러왔고 조선내부에 은이 엄청 많아졌다.
은을 공용화폐로 사용하는 명나라와의 교역은 역대급으로 늘어서 조선왕조실록엔 "황해도부터 의주까지 짐을 실은 수레가 가득하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은 은 3천냥씩 쥐고 간다" 등의 기록이 남아있고 "조선-명 국경일대는 은이 너무 많아 물가가 북경과 다를바 없다" 등의 기록도 남아있다.
일본이 조선에서 들여온 회취법을 이용해 은을 제련하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 오른쪽 아래는 일본인들이 조선 인삼 등 수입품 대금 결제용로 주로 쓰던 은 덩어리인 정은(丁銀). (사진 출처 :『江戶時代館』, 일본 쇼각칸 발행)
하지만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신 정부의 1차 목표는 적폐청산이 되는데...
사치문화는 즉시 적폐행
은의 대량 생산도 적폐행
당연히 은을 뽑아내던 신기술도 적폐행
그냥 은 채굴 자체가 적폐행
이에 따라 은광 업자들, 상인들은 날벼락을 맞게 된다.
중종시대 몇몇 신하들이 재정부양을 목적으로 은 채굴을 허용하자 해서 은광 개발이 일시 허용됐지만 곧 중단되는 등 조선의 은광 산업은 몰락의 길을 걷게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뜬금없이 난리가 났다.
柳緖宗多有所失, 故不計殞命, 期於得情刑訊可也。 但倭人交通, 多貿鉛鐵, 吹鍊作銀, 使倭人傳習其術事, 以臺諫所啓推鞫。 緖宗雖武班之人, 官至判官, 不爲無識, 且吹鍊作銀, 不可人人爲之, 必有匠人, 然後乃可爲也。 其家中有匠人與否, 未可知也, 但事證無據, 不可指的, 受刑一次得病, 又加再次, 殞命可慮, 以此罪照律, 則免死爲難。유서종(柳緖宗)은 잘못이 많으니 죽는 것을 헤아리지 말고 실정을 얻을 때까지 형신(刑訊)하라. 다만 왜인과 서로 통하여 연철을 많이 사다가 불려서 은을 만들고 왜인에게 그 방법을 전습한 일은 대간이 아뢴 대로 국문하라. 서종은 비록 무반(武班)사람이라 해도 벼슬이 판관(判官)에 이르러 무식하지 않다. 또 불려서 은을 만드는 일은 사람마다 하는 일이 아니요, 반드시 장인(匠人)이 있은 후에라야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집에 장인이 있고 없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일이 증거가 없으니 지적할 수는 없고 형벌을 한 번 받고 병이 났으니 또 재차 형벌을 가하면 죽을까 걱정이다.중종실록 91권, 중종 34년 8월 19일 계미 1조
1526년 하카타의 일본 상인이 조선의 기술자 두명을 초청해 조선의 은 제련법을 도입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일본 시마네현의 이와미 은광이(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이들 작품인데 일본의 은광은 납이 많이 섞여있어 아주 저품질의 은광이었으나 금속의 녹는점이 다른것을 이용하여 순수 은을 추출하는 조선의 기술은 이들에 하늘에서 내려온 축복이었다.
1584년 이와미 은광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넘어갔고 이곳에서 생산된 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자금으로 요긴하게 쓰인다.
일본에서 연은분리법이 최초로 시도된, 이와미 긴잔 유적의 입구.
일본은 세계2위의 은 생산국으로 올라서고, 포르투갈은 일본에 와서 총포나 무기를 일본에 팔고 일본에서 받은 은으로 명나라에 들려서 명나라의 특산품을 사서 본국으로 귀환하는 무역이 이뤄짐
막대한 은을 바탕으로 일본은 많은 무기를 확보하고 충분한 병사를 유지할수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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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과했지. 은 제련을 왕실 고유의 권한으로해서 민간에 권리를 빌려주는 형식으로 했으면 어땠을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