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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예쁜 꽃을 따다주세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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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_last_supper-002.jpg "저 예쁜 꽃을 따다주세요, 아빠."

역사에는 많은 일화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재밌는 이야기도 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고, 보고 배울만한 이야기도 있고 반면교사로 삼을만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 지금과는 많이 다른 시대상 때문에 인물들의 감정이나 행동 원리를 바로 파악하기 어려워 그걸 살펴보는 이쪽에서도, 현대인의 시각에서 벗어나서 당시의 시각으로 바라보려고 애쓰고 노력할때도 있습니다. 생각보다 아주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2010년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청년층이 600년전 원말명초기 문인의 심리를 파악해보는 일은 말입니다.




 그런데, 어떠한 경우에는, 서로 전혀 다른 환경과 수백년의 세월을 지나서도 변하지 않는 감정이라는것도 있고, 역시 그 수백년의 세월을 지나서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본문 이미지 "저 예쁜 꽃을 따다주세요, 아빠."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 격동의 원말명초기에 고계(高啓)라는 이름의 한 젊은 문인이 있었습니다.




 종종 청구자(靑邱子)라고도 불리는 고계는, 원말명초 시기는 물론이거니와 명나라의 300년 역사를 포함해서도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시인 중에 한 명 입니다. 정작 고계가 명나라에서 단지 6년 만을 살았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문학사적으로, 빛나는 문치로 유명했던 송나라가 멸망한 후, 시문 역시 약화되었을때 고계는 대혼란기인 원말명초 시기의 문인으로서 옛 당시와 송시를 두루 읽고 배운 후, 단순히 옛것을 모방하는 차원을 넘어 자기가 그것을 소화하여 독창적이고 신선한 시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특히나 상대적으로 고계 이후, 명나라 중기 이후의 시인들은 지나치게 규격에 얾매였다는 평을 받기 때문에 고계가 더 특출하는 평을 받는 면도 있구요.




 '시의 세계' 에서 그렇게나 명망 높은 고계였지만, 원말명초라는 혼돈의 시대상은 현실을 살아가는 청년 고계에게 있어서도 힘겨운 시간들이었습니다.




 당시와 송시 등 옛 시를 두루 가리지 않고 익혔다는 면모에서 알 수 있듯이, 고계 본인은 시를 아주 좋아하는 한 명의 청년일 뿐이 었지만, 기존의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고 사방에서 전쟁이 펼쳐지며,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던 당대의 시대상은 그가 마음 편하게 시나 읽게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문학사적으로 빛나는 시인이었던 고계는 그러나 동시에 창검의 시대였던 당시에서는 그저 무력한 일개 지식인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본문 이미지 "저 예쁜 꽃을 따다주세요, 아빠."





 보통 후대인들에게 '영웅 호걸' 이라는 식으로 기억되는 군웅들은 끊임없이 사람을 모으고 무기를 쥐어보내고 전쟁을 펼치고 수탈을 거듭하며 이른바 '세상을 바꾸는 비범한 행보' 을 이어갔지만, 고계는 영웅도 아니고 호걸도 아닌, 그저 소시민이었을 뿐입니다. 그에게는 세상을 바꾸거나 한다는 식의 능력도, 그런 길을 걸을만한 용감한 동시에 잔혹한 의지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정말로 순수하게 바라는 건 그저 시를 읽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글을 세운 문인으로서 고계는 당대의 혼란에 책임을 느끼고,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스스로 "공자께서는 그 나이에 이르도록 천하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셨지만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자조하기도 하고, 



 "이런 더러운 세상, 남아로 태어나 칼 한자루를 쥐고 성공하기 전에는 되돌아오지 않으리." 하였다가도, 아내가


 
 "저를 버리셔도 원망하지야 않겠습니다만은, 저 아이들이 무슨 죄인가요?" 하고 아내가 매달리자 차마 떠나지 못하고 그저 탄식만 남기기도 했습니다. 여러모로 난세에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본인도 더 상처입는 소박함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고계는 18살에 결혼을 했습니다. 아내는 부호의 딸이였기 때문에 그 덕택으로 고계 역시 한동안은 큰 어려움을 몰랐고, 20살 초반이 되자 자유분방하게 이곳 저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여행을 하며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좋은 집안에서 자라 좋은 집안과 결혼하고, 어려움과 구김살을 모르고 자랐던 고계는, 대혼란기에 피폐해져 고통받는 사람들과 절망밖에 없는 세상을 드디어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된 겁니다.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고계 본인이 품었던 이상과 꿈도 이런 여행을 하는 와중에 점차 희미해져서 "이럴수가 있나." 라는 사회 비판적인 시, 또한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인데, 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건가?" "왜 나에겐 세상을 바꿀 능력이 없을까? 난 왜 이리도 무능력할까." 같은 식의 자조적인 시를 지었습니다.




 본인도 느꼈다시피 소시민에 불과하던 고계는 세상을 바꿀 웅대한 계책은 내놓지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굳게 마음을 먹고 세상만사의 참극의 두 손으로 가리지도 못한 채 전전긍긍 하다가 다만 "은거하자." "가족과 조용히 살면서, 소박하게 행복을 누리자." 라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래서 25살 무렵에 여행을 멈추고 정착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꿈을 버리고 정착해서 조용히 살자, 고 결정한건 여러가지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가족이 큰 이유였습니다. 마침 고계에게는 어린 딸이 막 태어났던 겁니다. 홀몸이라면 모를까, 어린 자식도 있으니 "내가 이 아이들을 지켜야 해." 라는 마음이, 아마도 그가 이런 마음을 먹게 만들었을 겁니다.




 그의 나이가 이제 서른 살이 될 무렵, 고계는 거처를 소주(蘇州), 오늘날의 쑤저우로 옳기고 이사했습니다. 당시에 소주, 항주 등은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발달한 도시였고, 시와 회화 같은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습니다. 틀림없이 자식들을 데리고 살기엔 아주 좋았을 겁니다.




 고계는 이 곳에서 조용하지만, 꿈만 같았던 행복한 삶을 보냅니다. 무엇보다 여행을 끝냈을 무렵 한살이었던 딸이 이무렵 다섯살이 되었는데, 이 아이가 여간 이쁘고 사랑스러운게 아닌 겁니다. 




 이 조그마한 계집애가 너무 이뻤던 고계는, 딸이 이제 다섯살이라 자기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 있는데도 틈만 나면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품에 안고 과자를 주고, 딸이 그걸 조그마한 손으로 받아먹을 때마다 너무나 큰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조용히 무릎에 앉혀놓고 자리에 앉아서, 자기가 좋아하는 시를 딸에게 가르쳐주는 겁니다.




 그러면, 딸은 꼬마아이의 어눌하고도 청명한 목소리로 이를 따라하고...




 아침에 선잠을 자며 누워 있다가 문득 시끄러워서 눈을 비비고 일어나 돌아볼라치면, 조그만 딸이 화장대 앞에서 무엇인가 덕지덕지 바르고 있습니다. 보아하니 자기 누나가 화장을 한 게 샘이 나서 떼를 쓰나 봅니다. 




 화장도 흉내내는 꼬마아이는 예쁜 비단 옷을 보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좋아했지만, 본래는 가진게 부족함이 없었어도 혼란한 시기를 거치며 집안살림이 약화된 고계는 그런 비단을 사주지 못해 늘 마음이 아팠습니다. 본래 고계의 집안은 엄청난 대부호는 아니어도 먹고 사는데 문제는 없었을 집안이었지만, 대혼란기를 맞이하게 되자 상황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부족함 없었던 재산도 빈털터리가 되었고, 마음 속에 있는 포부도 어려운 세상을 만나 쓰이지 못하면서 고계는 늘 소주의 거리를 시름에 잠겨 걸어다녔습니다. 앞날에 대한 막막함, 시국에 대한 우려, 그런 시국에서 뜻을 펼치지도 못하는 울분...



 그렇게 시름에 잠겼다가도,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아빠다!" 하면서 어린 딸이 마당까지 뛰어와 자신을 맞이해줍니다. 그럴때마다 고계는 거짓말처럼 자신의 몸에서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다시 힘이 돌아오는것을 느끼곤 어린 딸을 안아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복도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본문 이미지 "저 예쁜 꽃을 따다주세요, 아빠."



 고계가 소주로 이사했던 바로 그 해 11월, 소주성은 대규모의 병력에 의해서 포위되었습니다. 이유인즉, 소주성은 당대의 군웅 '장사성' 의 통치 아래에 있었고, 그 장사성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주원장의 명나라군이 마침내 대도시 소주에까지 이르렀던 겁니다. 소주는 굉장히 부유했던 도시기에 명나라군도 필사적으로 함락을 시키려 했고, 물샐틈 없는 포위를 지속했습니다.



 당연히 장사성군도 소주라는 요충지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지만, 명나라 군 역시 강력했기에 포위전은 길게 이어졌습니다. 무려 해를 넘기고 10개월이 지나도록 포위가 계속되며 고립된 소주 내부는 점차 피폐해져가고, 당연히 인심도 엉망이 되어가고, 제반 사정도 말이 아니었던 참입니다.




 그런데 이때, 고계의 사랑스러웠던 어린 딸이 병마에 시달립니다.




 안그래도 어린 아이가 쉽게 죽던 시대고, 포위전이 지속되어 성 내부의 상황도 말이 아니었으니 역병에 걸렸을 수도 있었습니다. 어찌되었건 힘 없는 어린 아이는 급속도로 약해졌고, 고계는 놀라서 딸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봤지만 본래 돈도 없는데다, 성이 포위되었으니 변변히 좋은 의사를 써보거나 약을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발발 동동 구르던 사이에, 결국 시름시름 앓던 딸은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피눈물이 날 심정이었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 아이를 묻을 관을 구하는것 조차도 쉽지 않았습니다. 겨우겨우 관을 구하고,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근처의 산비탈에 고계는 딸을 묻어야 했습니다.




 명나라군의 포위는 정확히 10개월을 채우고 나서 끝이 났습니다.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던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괜찮았지만, 장사성 정권과 연관이 있던 사람들은 끌려가 처형 당했습니다. 고계 본인은 애매하게 거리를 때어놓아 무사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도 장사성의 일파로 몰려 명나라군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소위 '영웅들의 이야기', '거대한 역사의 이야기' 인 명사 태조본기에서는, 고계라는 한 개인의 일생에 재앙이 되었던 이 사건을 그저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사일, 서달이 평강을 점령하고 장사성을 붙잡으니, 오나라 지역이 평정되었다. 辛巳,徐達克平江,執士誠,吳地平。




 단 13글자. 태조본기에서 13글자로 언급하고 있는 이 사건은, 고계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들을 모조리 휩쓸어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딸을 잃고, 친한 친구들을 전쟁이라는 큰 파도에 고계는 무력하게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 모든 재앙이 언제 있엇냐는듯,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강변 근처에 있던 고계의 집에도 봄의 강물이 쪼르르 흐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모든 게 이전과 변함없지만, 어린 딸만은 이 자리에 없을 뿐입니다. 




 화사하고 적막한 봄날. 멍하니 있던 고계는 참지 못해 한잔 술을 꺼내들고 마셨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속에 뻥 뚫린 공허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강가를 바라보니, 꽃이 그 자리에 피어있습니다.




 그날, 강과 뜰에 꽃이 만발했던 그 날, 어린 딸은 자신의 손을 잡고 걸아가며, 저 꽃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예쁜 꽃, 따다주세요. 아빠."




 날이 황혼에 저물자, 결국 고계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아래의 시, '꽃을 보니 죽은 딸 서가 생각나서(見花憶亡女書)' 는, 고계가 그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인 시 내용입니다. 위의 내용은 해당 시를 참조했습니다.







中女我所憐六歳自抱持

懐中看哺果膝上教誦詩

晨起学姉粧鏡台強臨窺

稍知愛羅綺家貧未能為

嗟我久失意雨雪走路岐

暮帰見歓迎憂懐毎成怡


如何属疾朝        却思去年春

復値事変時       花開旧園池

聞驚遽沈殞       令我折好枝

薬餌不得施       今年花復開

倉皇具薄棺       客居遠江湄

哭送向遠陂       家全爾独歿

茫茫已難尋      夕幔風凄其








둘째 딸 서가 하도 귀여워서


여섯 살이 되었어도 안아주었다.


품에 안고 과자 먹는 것을 바라보았고


무릎에 앉혀놓고 시 낭송을 가르쳤다.


아침에 일어나선 언니의 화장을 흉내내느라


떼를 쓰며 경대 앞으로 가 들여다 보았다. 


예쁜 비단옷 좋아하는 줄 알면서도


집안이 가난하여 지어주지 못했었지.


안타깝게도 나는 실의한지 오래라


눈과 비를 맞으며 갈림을 헤메고 있었었지.


저녁에 귀가하여 반갑게 맞는 둘째를 보면


그때마다 내 근심 걱정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모질게도 둘쨰가 몹쓸 병에 걸렸는데


때마침 다시금 사변이 일어났던 떄였으니


난리 통에 놀라 갑자기 숨을 거두어


약과 음식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였다.


황급히 보잘것 없는 관이나마 마련해서


통곡 속에 멀리 산비탈에 묻고 말았을 뿐.


망망한 천지에서 그 얘의 영혼 찾을 수 없고


생각할수록 가엾어 계속 가슴이 쓰라리다.


그런데 지난해 봄을 생각해보면


정뜬 뜰과 연몿에 꽃이 만발했고


둘째는 내 손을 잡고 나무 밑을 거닐며


나에게 예쁜 꽃가지를 따달라고 했었다.


금년에도 꽃은 다시 아름답게 피었지만


나는 멀리 떨어진 강변에 거처하고 있다.


온 가족 중에 너 혼자 없어


꽃을 보아도 공연히 눈물만 흐른다.


한잔 술을 들어도 위로가 되지 않는데


황혼녁 장맠에 바람 불어


그저 처량하기만 할 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네이버 역사카폐 '신불해'님의 글입니다.

5 Comments
전국구칼잡이 2019.06.30 03:21  
bn

럭키포인트 14,613 개이득

레이캐슬 2019.06.30 15:15  
읽다가 길어서 패스했네요 ㅠㅠ 시간날때 정독해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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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2019.06.30 23:20  
ㅜㅜ

럭키포인트 29,305 개이득

이즈 2019.07.01 21:05  
하...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했을까...
전쟁을 안겪어본건 정말 다행한 일이란 생각과 불과 몇십년전 전쟁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네요

럭키포인트 15,121 개이득

dlcjs 2019.07.21 16:39  
길다

럭키포인트 23,376 개이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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