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까들도 인정하는 제갈량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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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0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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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내의 명가이자 대지주이며 형제와 일족들이 다들 출세가도를 달린 사마씨에 사마의 본인은 조조가 반 강제로 두번이나 출사를 요구해서 벼슬길을 시작한 인물로서 젊을 때도 금수저였는데 시간이 가면서 본인이 다이아수저를 만들어서 물려준 인간이죠.
반대로 제갈량은 서주대학살과 난세를 피해 낭야에서 예장, 양양까지 숙부 따라 기러기처럼 떠밀려온 외지인에 호족인 황승언의 딸과 맺어지면서 그나마 젊은 학사중에 형주에서 인지도 생긴 수준이 되었다가 조조가 내려와서 방귀 좀 뀌던 형주인사들은 유종따라 가버리죠. 그러니 유기를 따른 나머지 형주인사들이 곧 유비를 따르게 되면서 유비가 가장 신임하는 형주계 인사인 제갈량이 곧 형주계 인사들의 목소리와 힘을 가지게 되죠. 물론 유비에게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제갈량은 능력도 있고 헌신적인 신하였지만 사실 형주에서 2군급 호족의 젊은 사위이자 신인 정도였다가 갑자기 형주계 전체 인사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입장이 되면 오만하고 안하무인이 될 만도 한데 그러지 않은 점이 존경할만한 이유라고 봅니다.
실제로 유비, 촉한을 섬긴 인사들을 보면 비(非) 형북(혹은 양양) 출신들이 꽤 많습니다. 예외가 상랑과 마량 정도인데, 마량은 재야에 있다가 적벽대전 이후 유비가 형남4군에 입성하면서 등용되고 상랑은 양양 출신이지만 유표가 임저현의 장, 즉 남군 지역에 지방관으로 임명했고 그가 죽은 후 조조가 내려오기 전에 유비를 따르기로 결정했기에 촉한의 신하가 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