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족의 혼인이 간택제가 된 이유
조선 태종때 간택제가 시작되기 전 왕족의 혼인은
일반 백성들처럼 상대집에 혼인의사를 밝히고
상대집은 승낙하거나 거절하는
'중매' 방식의 혼인이었다.
이것이 '간택' 형식으로 바뀌게 된 이유를 알아보자
택이란 왕실에서 혼인할 나이가된 왕족이 있을 경우
모집공고를 내고 지원자를 받아 왕실어른들의 서류심사와 면접을 거쳐
최종 합격자를 선별하는것이 간택임.
그럼 조선 태종때 왜 갑자기 간택제가 된거일까??
그 사연은 이러함
우선 역대 조선임금중에서도 가장 공주들을 사랑했다고 평가받는 왕이 태종임.
자신이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일까
유독 자식들에게는 우애를 강조했었음.
특히 첫째인 양녕대군을 폐세자하고
셋째인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삼았을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원래 세자였다가 폐세자가 된 왕자가 살아남은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도 그럴게 일반적으로 왕위에 오른후 제일 먼저 할게 자신의 왕위에 가장 위험한 요소인 '전 세자'를 제거하는것이었음.)
세자를 바꾸면서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을 불러
눈물을 흘리며 형제들의 우애를 강조한 태종의 일화는 유명할 정도
그러했던 태종은 공주들도 엄청 사랑했음
그러다 6번째 공주인 '정신옹주'가 결혼할때가되자
당시 춘천부사였던 '이속' 에게 중매할 사람을 보내 그의 아들과 결혼의사를 물어봄.
그런데 이속이 여기서 태종이 보낸 신하에게 상상도 못할 발언을 하였음.
이속: 내아들은 이미 죽었다.
신하: 아니 뭔소리에요... 아까 살아있는거 제가 봤는데...
이속: 궁녀의 딸이라면 내아들은 이미 죽었다.
신하: ?!
이게 무슨말이냐 6번째 공주인 정신옹주의 어머니는
본래 궁녀로 태종의 승은을 받아 후궁이 된 케이스였음.
즉 이속의 발언은
'미천한 궁녀의 딸이랑 내 아들 결혼 못시킨다!'
라는 패드립을 박아버린거임.
신하는 돌아와 이속의 발언을 그대로 태종에게 전했고....
태종: .... 그놈이 천한 궁녀의 딸에게 자기 아들을 못보낸다고 했다고?????
태종: 그새끼 당장 잡아와
태종은 이속에게 곤장 100대형을 내리고
전재산을 몰수 + 신분도 천민으로 강등후 유배를 보냈고,
(목숨을 살려준것에서 태종의 자비로움을 느낄수있음)
그의 아들은 금혼령을 내려 평생 혼인을 하지못하게하였음.
참고로
부마 즉 공주의 남편이 되면 친지들만 이득 보는거지 부마 본인은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첩을 두거나 재혼을 하는 것 등이 금지된다고 알려져 있는데, 과거금지는 성종때, 재혼 금지는 숙종때 부터 시행되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축첩금지를 제외하면 부마라고 특별히 불이익이 있지는 않았다.
웃긴 건 이속이 중매쟁이를 쫓아보낸 시점에서 이속의 아들은 부마가 되기로 결정난 것도 아니고, 그저 일개 후보자 이하로 부마 대상에 적당한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 사주를 보러 다니던 많은 청년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는 거다. 그런데도 그렇게 건방을 떨며 왕녀의 외가의 신분을 갖다가 트집을 잡았던 것.
입조심 하도록 하자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