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청년의 의거
이재명 의사(1890~1910)
1904년 미국으로 이민 간 이재명은 1907년 귀국하였고
1909년 1월 이토 히로부미가 평양을 방문하기로 했을 때 암살을 계획했으나
안창호의 만류로 하지 못했다.
같은 해인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이토가 죽자
김정익, 이동수와 함께 이완용, 이용구, 송병준을 암살하기로 한다.
1909년 12월 22일 벨기에 왕국의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재명은 인력거를 타려는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를 칼로 3번 찔렀다.
중상을 입은 이완용은 대한의원(현 서울대병원)에서 대수술을
받은 뒤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1926년 까지 폐렴으로 고통받다 사망했다.
이재명은 1910년 9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했고,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복장(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재판정에서 그는
"피고와 같이 흉행한 자가 몇이나 되는가?"
라는 물음에
"야만 섬나라의 불학무식한 놈아! 너는 '흉'자만 알았지 '의'자는 모르느냐.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
라 답했다.
그리고
"피고의 일에 찬성한 자는 몇이나 되는가?"
라는 물음에
"2천만이다!"
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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