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편] 망국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 바다의 신, 성웅 이순신
주성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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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3 11:56
원균이 지휘한 칠천량해전의 대패로,
수군의 재해권이 일본으로 완전히 넘어간 상황.
왜군은 해상보급,지원에 힘입어 전세를 반전시켜
전라도로 들어가 휩쓸고 다니기 시작한다.
바다가 뚫려버리니 바다에서 바로 전라도로 진입할 수 있게 된 상황.
왜군은 진군하여 남원까지도 함락시킨다.
전라도를 휩쓰는 왜군들, 특히 남원성에서 일어난 전투와 그 학살극은
왜군이 벌인 임진왜란에서 가장 참혹한 학살극이었다.
(지금도 무덤들이 있다고 전해짐)
이제 왜군은 계획대로
전라도를 기반으로 다시 한양을 점령하려 한다.
마침내 전주성까지 함락된 조선
임진왜란 7년 전란중에서
가장 위험한 위기
왜군의 칼날이 한양의 목구멍에까지 당도해 있었다.
국가가 멸망당하기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정유년 1597년
원균을 비롯한 서인들의 무고로
옥사를 치르고 나온 이순신.
선조에게 죽임을 당할뻔 했으나,
일부 신하들이 목숨을 걸고 간언을 한 끝에
백의종군을 명 받고
권율장군 밑에서 백의종군 한다.
고난과 역경, 시기와 질투
최선을 다하여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싸웠으나
나라는 오히려 이순신을 죄인 취급하며
버렸다.
이때 이순신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1597년 4월 1일
옥문을 나왔다. 더해지는 슬픔을 이길 길이 없었다.
-난중일기 中
백의종군은,
미디어에서는 죄인에게 직위를 뺏고,
병사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마치 관심병사마냥
일반병사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종군하는 것으로 비췄지만,
실제 백의종군은 일종의 고문직이었다.
죄인으로써 직위는 박탈되었으나,
권율의 부대를 따라다니며,
군사 자문을 하는 일종의 명예직인것.
일반병들이 백의종군 중인
前 장군을 하대하거나, 무시하거나 하면,
그것도 군법에 걸린다.
그러던중....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
그 도중에 어머님의 부고 사실을 전해듣게 된다.
1597년 4월 13일
얼마후 종 순화가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그 슬픔을 이루 다 적을수가 없다.
<난중일기>의 첫 시작부터
어머니에 대한 얘기였을 정도로
효심이 지극했던 이순신에게
어머니의 부고 소식은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이순신은 끝내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다..
1597년 4월 16일
집에 도착하여 빈소를 차렸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나는 기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일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1597년 4월 19일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에 나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것만 같지 못하구나
-난중일기 中
1597년 5월 5일
오늘은 단오절인데, 천리밖에 멀리와서 종군하여
어머님 장례도 못 모시고 곡하고 우는것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로 이런 앙갚음을 당하는가.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이순신은 이후 모친상 3년간 육식을 하지 않았다.)
그런 이순신에게 칠천량의 대패 소식까지 전해진다.
아끼던 부하와 병사들이 1만이 죽고, 1만은 와해되어 뿔뿔히 흩어졌다.
공들여 만든 거북선과 판옥선 또한 모두 소실되었다.
세상 전부를 잃은 듯한 그 기분은 참혹하기 그지 없었고,
감당키 힘든 전쟁에 부하들과 백성들을 끌어들인 것에 대해
자책까지 하고 있었다.
祭死亡 軍卒文(제사망 군졸문)
윗사람을 따르고 상관을 섬겨 너희들은 직책을 다하였건만,
부하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일
나는 그런 덕이 모자랐다.
그대 혼 들을 한자리에 부르노니
여기에 차린 제물 받으오시라
일본군의 기세가 모든 것을 삼켜버릴듯했다.
전주성까지 함락한 왜군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병력과, 군수품, 병량과 합류하여 한양만 떨어뜨리면 끝나는 상황이었다.
선조는 조정 중신들을 모아 놓고
"정녕 내 나라를 구할 장수는 더 이상 없는 것인가?"
라며 한탄하며 물었고.
라고 진언하였다.
결국 어쩔수없이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선조
(복직을 시키지만 품계를 낮춰 정 3품으로 주는 찌질한 면모까지 보인다. 이러면 지휘 체계에 혼선이 올수있다.)
이제 왜군을 실질적으로 막아낼수있는
전투기회는 사실상 단 한번 뿐이었다.
단 한번이라도 크게 패한다면, 조선은 멸망한다.
단 한번이라도 크게 패한다면, 조선은 멸망한다.
단 한번이라도 크게 패한다면, 조선은 멸망한다.
브금보급하러왔음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하여 전선을 수습한 이순신
하지만,
겨우 12척 남은배와 소수병력가지고
일본군의 300여척의 넘는 대 전투함 선단과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선조는 수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은 수군을 이끌고 육군에 합류하여 싸우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명령은 객관적으로 보았을때,
합리적이고 옳은 명령이었다.
해전에서 싸우기엔 너무 큰 병력차.
그냥 무의미하게 병력과 함선을 잃을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선조에게 이런 장계를 올리며 거부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말이 나온다.
今臣戰船금신전선 尙有十二상유십이
戰船雖寡전선수과 微臣不死則미신불사즉 不敢侮我矣불감모아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우리를 감히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순신은 그 장계를 올리고
수군을 재건하는데 전력을 쏟으며
서해로 가는 길목인 명량해협 에서 적에 맞서 싸울 계획을 세운다.
이억기의 뒤를 이은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합류로 13척이 된 판옥선
그러나 수군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에 곤두박질 쳐 있었다.
심지어는 장군들 마저도 자포자기 하여
"조선은 끝났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하들은 이 싸움을 자살행위라며
전투를 반대했다.
모두가 포기한 전투
이순신 만이 포기 하지 않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 자살 행위입니다 장군! 이 싸움은 불가합니다. 그러다 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
이순신은 부하들을 독려해가며 사기를 올리려 했지만
사실은 그도 명량을 죽을 장소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위대한 명장들이 으레 그렇듯,
항상 이기는 싸움만 하는 이순신 장군
그는 누구보다 현실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는 현실을 애써 외면했다.
이순신 장군이 가장 존경스러운 부분은
철저한 군인이었다는 점이다.
"항상 이기는 싸움만 한다."
하지만, 진정한 군인에게는,
이길 수 없으나 물러설 수 없을때가 있다.
이순신에게는 명량이 그런 것이었다.
전선이 12척 밖에 남지 않았으나
망국의 위기에서 조선을
방어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여기 뿐.
그렇다면, 죽더라도 싸워야했던 것이다.
마침내 명량해전
하루 전 9월 15일,
이순신은 여러 장수와 부하들을 불러다 놓고 입을 열었다.
" 병법에 이르기를 必死則生 必生則死 라고 하였다.
반드시 죽고자하면 살것이고,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것이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
- 난중일기 中
" 이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만 있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
" 더 이상 살곳도 물러설 곳도 없다 "
"나를 따르라!!"
" 전군 출정하라 "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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