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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가 쓴 저능아물에 빙의했다

불량우유 0 1217


 

어, 어쩌죠? 코르 왕국군이 벌써 국경을 넘었대요… 규모는 어, 음… 큰 손가락이 하나, 둘, 셋… 아, 3만 명이랬어요! 우린 작은 손가락이 하나, 둘… 음! 5천 명이잖아요… 너무 절망적인 상황이에요… 그래도 그동안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줬던 장붕쿤이라면, 분명 좋은 생각이 있겠죠?"

 

 저능아물에 빙의한 것도 벌써 1년, 나는 약소국의 책사 노릇을 하며 살고 있다. 내부 반란부터 주변 야만족의 약탈까지, 그러다 이번엔 이웃 왕국의 침공까지 겪었다.

 

 하지만, 괜찮다. 저능아물이니까.

 

 나는 한껏 분위기를 잡으며 공주를 안심시켰다.

 

 "괜찮다. 상대가 우리보다 세 배는 넘는 규모라고 해도, 오랜 행군에 의해 지친 상황.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건 기습이다! 수적 우위는 피로로 상쇄한다는 거지."

 

 "아아… 장붕쿤의 전략… 너무 대단해요…! 역시, 책을 사는 사람, 책사다워요…!"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에, 공주가 눈을 빛내며 은근히 몸을 기대왔고, 부드러운 몸이 맞닿았다.

 

 하지만 그 감촉을 만끽하기엔 아직 일렀다. 두리뭉술한 전략을 내세웠으니, 분명…!

 

 "기습을 펼쳐야 할 우리 병사들이 아이부터 노인까지 끌어모은 징집병들이 대다수라는 거랑, 우리 왕국은 평원이 대부분이라 매복할만한 지형이 없는 사소한 문제가 있지만… 장붕쿤은 저 같은 것보다 훨씬 똑똑하니까요…! 분명 장붕쿤은 이런 것도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한 거겠죠?"

 

 "엣."

 

 "우음…? 방금 엣, 이라고 하셨나요…?"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방금 엣이라고 한 건 너였다."

 

 "아, 그, 그랬나요…? 긴장했나 봐요. 저도 모르게 그만…."

 

 역시. '천재가 쓴' 저능아물이야.

 

 멍청하다고 설정한 등장인물들이라고 해도, 멍청한 행동 한 꺼풀을 벗겨보면 은은하게 지성의 편린이 흘러나온다. 소설에선 다들 작가가 작성한 멍청한 이야기만 하느라 티가 나지 않았지만, 현실이 되고 여러모로 소설의 원래 전개와 달라진 지금은 등장인물들에게 작가의 지성이 반영된 거겠지….

 

 나는, 황급히 표정을 관리하며 다시 말했다.

 

 "평원이라고 매복을 할 수 없다? 그런 게 어디 있나. 잘 생각해봐라."

 

 "네? 아, 아아…! 그렇군요! 땅을 파고 천을 덮어 위장한다면… 매복과 기습이 가능할지도 몰라요… 장붕쿤은 여기까지 내다보신 건가요옷…! 역시 대단해… 하, 하지만… 징집병들은 제대로 쓸 수 있는 전력이 아닌데, 매복할 수 있는 병력은 그렇게 많지 않을 거에요… 피해도 별로 못 줄 거고…."

 

 땅을 파서 매복한다… 그런 수가 있었군. 채택이다. 기특한 이세계 챗GPT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으, 으헤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단 한 명만 쓰러뜨려도 성공이니까."

 

 "그런가요? 이해는 잘 안 가지만… 장붕쿤은 책사니까, 분명 장붕쿤의 말이 맞을 거에요!"

 

 등장인물들의 실제 지능은 나보다 훨씬 높을지 몰라도, 멍청하다는 설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공주는 분명 혼자서도 전략을 짜낼 지성이 있지만, 나와 대화하지 않았다면 전혀 그런 발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면, 멍청하니까.

 

 적들도 마찬가지. 저들에게는 나처럼 지적인 사고를 유도할 촉매가 없다. 3만 명 중 한 명이 죽었을 뿐인데도, 기습한 병력은 한 줌에 불과한데도… 그냥 기습을 당했고, 이미 누가 한 명 죽었다. 나도 죽을지도 모른다. 그럼 도망가는 게 당연하다.

 

 이 세계에서 지능보다 중요한 건 기세.

 

 그리고 하자 많은 발상을 보완해 줄 인간형 챗GPT.

 

 

 

 

 나는 오늘도 저능아물의 책사를 연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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