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민족 이름을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으로 바꿨다가 생긴 참사
나라 없는 유랑 민족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집시(Gypsy)일 것이다.

그들은 9세기 또는 10세기경 인도 북부에서 유래했으며, 이후 서쪽으로 이동하여 유럽에 도달했다. 최초의 집시들이 왜 남아시아를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여러 가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 명확한 답은 없다.

그들은 유럽인과 통혼도 많이 해 겉보기에는 유럽인과 비슷한 외모도 많지만 DNA 조사를 하면 남아시아 유전자가 뚜렷하게 검출 된다고 함 신기한 tmi
아무튼 떠돌이 민족인 집시들은 유럽 전역에서 꾸준히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고 노예가 되거나, 인종청소 표적이 되어 홀로코스트에서 학살을 당하고 다시다난한 일을 겪게 된다.
그리고 제국주의, 파시즘의 광기가 유럽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이후 유럽이 자아성찰을 하기 시작한 건 다들 알텐데
우리가 좀 많이 잘못한 것 같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 뭉치지 못한 집시들 역시 홀로코스트로 인한 민족 박해를 겪고 힘을 합쳐 단일된 목소리를 낼 필요성이 있다 느꼈고 그 결과 1971년 런던에서 영국, 독일, 헝가리, 아일랜드, 스페인, 유고슬라비아, 핀란드, 노르웨이, 체코슬라바키아 등 유럽 각지에서 모인 집시가 주축이 되어 제 1회 세계 롬족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기존에 사용되던 민족 명칭인 ‘집시’라는 표현이 문제로 지적되었다고 한다.
"집시는 우리를 이집트인으로 오해한 유럽인들이 붙인 멸칭이잖아? 우린 북인도에서 유래된 집단인데 말이지. 집시에 부정적인 어감도 있고. 그러니까 롬족으로 바꾸면 어떨까?"

"아주 좋아요. 유럽인들이 집시를 모욕적인 언사로 사용하는 것을 자주 봤어요. 집시에서 롬족으로 바꿉시다!"
집시를 대체한 롬인(Romani)은 ‘떠돌이 하위 카스트’를 의미하는 고대 산스크리트어 ḍomba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단어 자체도 드라비다어 계열의 단어인 domba, ḍomba(곡예사, 저글러, 광대 카스트)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집시에서 "롬인"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명칭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현재 EU 역시 집시보다는 롬인/롬족으로 부를 것을 권고하고 있다.
영국 집시들은 집시라는 명칭을 자랑스럽게 여기거나 집시가 롬인보다 훨씬 중립적인 명칭이란 주장도 있다.
하지만 뜻밖에도 다른 쪽에서 문제가 발생했으니....
바로 중부 유럽, 남유럽, 동유럽 전부 한 부분씩 찍먹하는 유럽의 나라, 루마니아였다.
루마니아인(Romanians)들은 동유럽의 슬라브 바다에서 유일하게 로망스어를 사용하는 집단으로, 로마 제국이 다키아 왕국을 정복하고 정착한 로마 병사들과 로마 문화에 동화되어 로망스어를 구사하게 된 원주민들을 민족 유래로 두고 있다.
중세 시대에는 외국에서는 이들을 '로망스어를 사용하는 자들'이란 의미의 블라흐(Vlachs)로 불렸는데, 본인들은 루마니아인이라는 의미의 Rumâni/Români로 지칭했다고 한다. (최초의 기록은 16세기부터)
19세기 초, 민족주의가 태동하며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정치인들은 고대 로마와 연관성이 있는 이 루마니아인이라는 명칭을 선호했으며 1820년부터 루마니아어 사용자 전체를 하나의 독립된 민족으로 지칭하는 민족주의적 표현으로 점점 널리 사용되었다고 설명한다.
다시 돌아와서 집시의 변경된 이름인 롬인의 스펠링은 Romani
그리고 루마니아인 Romanian
어라?
더욱이 오해에 불을 지핀 것이 있었으니
그래서 루마니아의 집시들은 루마니아 국적을 갖고 있었다. 롬인들이 사고 칠때마다 언론에 "로마니" 혹은 "루마니아인"으로 특필됐다.
유럽인들의 집시 증오는 상상을 초월해서
레딧에서는 "유럽 서브에 히틀러가 집시를 학살했다는 내용을 게시함. 히틀러를 긍정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차단됨"이란 농담이 유명
히틀러의 집시 학살 = 긍정적인 업적이란 살벌한 의미였다
그래서 온라인에서 미국인과 유럽인이 서로 인종차별 문제로 싸울 때 너네는 흑인을 총으로 쏘잖아 vs 너네는 집시 이야기만 나오면 히틀러로 돌변하잖아 가 주요 레퍼토리임
(왜 집시가 유럽에서 미움받는지, 그리고 유럽 국가들은 집시를 사회에 동화하려고 노력한 적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복잡하고 민감한 주제라 이 글에서 짧고 가볍게 다루기에는 무리가 있어 컷하겠음)
루마니아는 좀 멀찍히 떨어진 서유럽 국가 같은 곳에서 루마니아인들의 민족이 "집시"로 오해받고 "집시의 나라"란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얻게 되고 말았다.
그야 유럽 언론에서 나오는 집시들은 온갖 범죄 사실 뿐인데 로마니 범죄...로마니...로마니아? 루마니아? 아, 로마니들의 민족 국가구나란 연상 게임이 되어버렸으니. 코로나 시대 어느 서유럽 매장에서는 로마니 금지라고 쓰고 싶었던 것 같은데 루마니아인 금지란 안내문까지 등장함
역으로 루마니아인이 범죄를 저질렀는데 루마니아인들이 저건 루마니아인이 아니라 집시라고 우기는 로마니 방패 현상까지 생김
요약: 차별을 해소하고자 민족 명칭을 바꿨더니 집시 이미지가 개선되긴 커녕 루마니아인까지 집시로 오해받음

(이 글의 주제는 국내에서 가장 루마니아 정보가 풍부한 블로그 로므니아 아카이브에서도 다룬 적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