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에 미쳐있었던 로마인들 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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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에게는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배운 고유한 악덕들이 있는데, 그것은 배우들에 대한 열광, 그리고 검투사 경기와 전차 경주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다.타키투스, 웅변가들에 관하여Dialogus de oratoribus 29.3-4
서기 1세기, 로마 외곽의 묘지에서는 적색 팍티오(팀)에서 전차를 몰던 기수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펠릭스(행운아)'라는 이름의 이 기수는 경기 중 충돌 사고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가족과 관계자, 그리고 적색 팍티오의 팬들이 모인 이 장례식에서 그들은 고인을 추모한 후 화장하기 위해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다.
사건은 펠릭스를 태우는 불길이 최고조에 이를 때 발생했다. 팬들 중 한명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화장더미에 뛰어들어 분신 자살한 것이다. 이 사건은 로마의 일일 관보acta diurna에 실려 화제가 되었는데, 적색 팍티오를 향한 열정과 헌신의 분위기에 위협을 느낀 다른 팍티오의 팬들이 이는 열기에 정신을 잃은 사람이 우연히 장작더미로 쓰러진 단순한 사고였을 뿐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대 플리니우스가 전하는 이 일화(박물지 7.168) 는 전차 경기에 대한 로마인들의 사랑을 드러낸다. 사실 우리가 미디어 등에서 가장 쉽게 접하는 로마의 스펙타클은 검투사 경기일 것이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진정으로 미쳐있었던 스펙타클은 전차 경주였다.
로마시에는 여러 전차 경기장이 있었지만, 가장 거대한 전차 경기장은 최대 15만(일설에 따르면 2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경기장Circus maximus으로, 대경기장 자체가 로마 제국 전체에서 가장 거대하고 웅장한 건축물이자, 가장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경이였다. 이 대경기장에서의 전차 경기는 12대의 사두 전차가 먼저 7바퀴를 돌면 승리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제정 초기에는 보통 하루 12회의 경주가 벌어졌지만 서기 46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기에는 그 두배인 24회로 늘어난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황제들은 종종 하루 30회씩 경기를 했고, 도미티아누스는 서기 88년에 열린 백년제에서 무려 하루에 100회의 경기를 열었다.
이런 전차 경기가 제정 초기에는 연간 13일 열렸는데, 서기 4세기로 가면 64일로 늘어난다. 모두가 전차 경기를 원하니 늘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갈수록 늘어나는 경기에 동원되는 수백필의 말과 기수, 거기에 따르는 보조 인력들을 공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를 도맡은 것이 '팍티오'였다. 기원전 1세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일종의 구단인 이 팍티오는 기사 계급이 수장으로 있던 거대 기업체로 수백필의 말은 물론 기수와 보조기수, 훈련중인 유망주들, 그리고 이들을 보조하는 의사와 수의사, 회계사, 훈련사, 마부 등 수백명의 인력이 딸려있었다.
이 팍티오는 색으로 구분했고 로마에는 크게 적, 녹, 청, 백의 네 팍티오가 있었다. 로마인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특정 팍티오의 팬들이었다. 소녀들의 무덤에서도 전차 경기 관련 토큰들이 출토되고,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자신이 지지하는 팍티오의 색으로 물들인 옷을 입히기도 했다. 이는 황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황제도 자신이 지지하는 팍티오가 있었고 네로, 카라칼라, 엘라가발루스 같은 황제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팍티오의 색의 옷을 입고 직접 전차를 몰기도 했다. 한 기름 장수는 묘비에 자신은 청색 팍티오 지지자라고 새겨넣었다(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 6.9719). 팬심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진 셈이다.
전차 경기는 굉장히 위험했고 바로 그것이 로마인들이 전차 경기에 열광했던 이유였다. 사두전차는 매우 섬세한 조작을 요했다. 특히 코너를 돌 때는 네 마리 말의 고삐를 기술적으로 조종해 말의 속도를 조절하지 않으면 전차가 전복되기 쉬웠고 전차끼리의 경쟁에 의한 충돌도 잦았다. 전차를 모는 기수들은 네 마리 말의 고삐를 허리에 묶고 왼손으로 조종하고, 오른손으로는 채찍을 들었는데 그래서 사고로 전차에서 튕겨나가면 질주하는 말에 끌려다닐 수 밖에 없었다. 많은 기수들이 20대가 지나기 전에 목숨을 잃었다. 전차 기수는 매우 어린 나이부터 훈련을 시작했고 10대 초반에 출전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더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플로루스, 여기 누워 있다. 두 마리 말의 전차를 모는 어린 기수였던 나는 빠르게 달리고자 했지만, 더 빠르게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야누아리우스는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수양아들을 위해 이 묘비를 세웠다.Inscriptiones Latinae Selectae 5300
기수들은 왜 목숨을 걸어야 했던 위험한 전차 경기에 참가한 것일까? 성공한 기수들의 금전적 보상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제정기 전차 경기의 1등 상금은 5만 세스테르티우스였다. 군단병의 연봉이 대략 1,200 세스테르티우스, 성공한 수공업자가 한해 2,000 세스테르티우스를 벌었던 것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의 금액이다. 기수들은 평범한 임금 노동자가 평생 일해도 쳐다볼 수도 없는 금액을 벌었던 것이다. 이 분야의 일인자는 서기 2세기의 전차 챔피언 가이우스 아풀레이우스 디오클레스였는데 18세부터 출전한 그는 24년간 총 4257번의 경주에서 1462번 승리하면서 3천5백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벌었다. 이 금액은 로마 시민 전체의 연간 곡물 소비량을 충당할 정도의 액수였다. 1세기의 전차 기수 크레스켄스 역시 13세부터 출전해 22세로 사망할때까지 9년간 총 155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벌었다. 이 때문에 그들이 손쉽게(?) 벌어들이는 천문학적인 수입에 질시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이 법정에서 그 많은 서류 뭉치를 보면서 일을 해서 번 금액을 큰 소리로 말해주세요. 그들의 수입을 확인해보면 변호사 100명이 벌어들이는 수입이 적색 팍티오 기수인 라케르타의 수입보다 적다는 것을 알 겁니다.유베날리우스, 풍자시 7.105-114
나는 온종일 피호민이나 하는 하찮은 일을 하고 납 주화 100개를 버는데, 경주 승자인 스코르푸스는 한 시간 만에 금 15덩이를 벌어들이지 않는가?마르티알리스, 경구집Epigrammata 10.74
역설적으로 이러한 전차 기수들의 지위는 이중적이었다. 비문으로 확인되는 그들의 출신은 대부분 노예(물론 노예로 경주하다가 번 돈으로 자신을 사는 것도 가능했다), 해방노예, 외국인(특히 그리스 출신)들이었다. 로마 법률은 전차 기수를 명예를 상실한 자infamis로 규정하고 공직 보유를 막았기에 로마 시민 출신은 극히 드물었다. 비천한 출신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공한 전차 기수는 엄청난 수입을 벌 수 있었고 그 인기 또한 대단했다. 그들은 로마 시대의 슈퍼스타였다. 유명한 기수는 황제와 교류하거나 황제의 선물을 하사받는 등 개인적인 연줄을 만들 수 있었고, 황제에게 로마 시민권을 받거나 정치적 지위에 임명된 기수들도 있었다. 6세기의 유명한 기수 포르피리우스는 황제가 황금으로 된 조상을 세워주기도 할 정도였다.
일부 엘리트 지식인들은 비천한 노예 출신들이 감히 막대한 부와 인기, 그리고 황제와의 연줄을 만드는 것에 분노하여 비판하기도 했으나 사실 대부분의 엘리트 계층들 또한 전차 경기와 자신들이 지지하는 팍티오에 미쳐있었기에(비판자들 역시 수상할정도로 전차 경기의 세부를 잘 알고 있다)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상아로 만든 기수들의 인형이나, 경주나 사고 장면을 그린 벽화는 엘리트 계층의 집을 장식했다. 각 팍티오와 기수들의 전적은 세심히 기록되었고, 현대의 스포츠 팬들이 좋아하는 선수들의 통계를 외우듯 전차 경기 팬들은 전적을 외웠다. 전차 기수들 역시 비문에 자신의 전적과 팍티오 이적 이력을 자랑스럽게 적었다.
나는 백색 팍티오에서 102번 승리했다. 초보 말로 1번 승리했다. 한 대의 전차로 83번, 두 대의 전차로 17번, 세 대의 전차로 2번 승리했다.나는 적색 팍티오에서 78번 승리했다. 한 대의 전차로 42번, 두 대의 전차로 32번, 세 대의 전차로 3번, 네 대의 전차로 1번 승리했다.나는 청색 팍티오에서 583번 승리했다. 육두 전차로 1번, 초보 말로 1번 승리했다. 한 대의 전차로 334번, 두 대의 전차로 184번, 세 대의 전차로 65번 승리했다.나는 녹색 팍티오에서 364번 승리했다. 한 대의 전차로 116번, 두 대의 전차로 184번, 세 대의 전차로 64번 승리했다.나는 살아 있는 동안 나 스스로 이 비를 세웠다.Inscriptiones Latinae Selectae 5288
로마의 스펙타클을 격렬히 비난했던 기독교가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된 이후로 검투사 경기는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전차 경기는 기독교만도 어찌하지 못했다. 전차 경기는 비잔틴 시대에도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종목이었다. 이 시기의 팍티오 지지자들은 훌리건화되어 수시로 폭동을 일으켰고, 한번은 황제를 갈아치우려는 대폭동을 일으키다가 진압군에게 3만 명이 살해당하기도 했다(니카 폭동). 그럼에도 전차 경기는 중단되지 않았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이 무너져가면서 재정이 악화되자 전차 경기는 서서히 축소되었고 12세기 이후부터는 더 이상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타키투스가 비난한 로마인들의 '전차 경주에 대한 광적인 집착'은 엘리트 계층이나 기독교의 비판도, 3만명이 죽은 대폭동도 아닌, 그저 그것을 치를 돈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끝나버린 것이다.
참고자료
배은숙. (2021). 로마 전차 경기장에서의 하루: 로마의 일상을 지배한 질주의 문화. 글항아리.
Christesen, P., & Kyle, D. G. (Eds.). (2013). A companion to sport and spectacle in Greek and Roman antiquity. Wiley-Blackwel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