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 급제를 뺏겨버린 조선시대 흙수저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있어서 과거 급제는 일생의 목표와도 같았다.
과거에 급제하면 4대 동안 양반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 이후에는 몰락 양반이 될 수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게다가 양인의 신분이면 응시 조건이 주어졌기에,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일생의 목표와도 같았다.
자신 하나만 급제해도 손자 대까지는 양반 신분이 유지될 수 있어서 더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조선 초기 김의정(金義精 또는 金義貞)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도 어떻게든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노력하던 조선시대의 흔한 양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450년(문종 즉위년)에 열린 식년시(정기 과거 시험)에 응시해서 당당히 장원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 영광은 며칠도 가지 못했다.
문과(文科)·무과(武科)를 방방(放榜)1113) 하여, 문과(文科)에 권남(權擥) 등 33인에게, 무과(武科)에 유균(柳均) 등 28인에게 급제(及第)를 내려 주고, 권남을 사헌 감찰(司憲監察)로 임명하고, 유균을 사복판관(司僕判官)으로 삼았다. 권남은 권제(權踶)의 아들인데 재주가 있다는 평판이 있었으나 오래도록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향시(鄕試)·회시(會試)에 모두 으뜸[魁]을 차지하고, 전시(殿試)에 이르러 대책(對策)에서 시관(試官)이 처음에 제 4등에 두고 생원(生員) 김의정(金義精)을 으뜸으로 삼으니, 사람들이 모두 불평하여 말하기를,
"김의정은 계통이 한미(寒微)한 가문에서 나왔고, 또 명망(名望)이 없는데, 비록 대책(對策)을 잘 지었다고 하더라도 으뜸 자리에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였다. 한밤중에 이르러 임금이 권남의 대책을 바치라고 명하여 이를 읽어 보니, 권남이 극력 중 신미(信眉)·학열(學悅) 무리의 간사(姦詐)하였던 일을 비방하여 말하기를,
"옛날 신돈(辛旽)1114) 이라는 중 하나가 오히려 고려(高麗) 5백 년의 왕업(王業)을 망치기에 족하였는데, 하물며 이 두 중이겠는가?"
하였다. 읽기를 마치고 임금이 말하기를,
"권남이 회시(會試)에 장원(壯元)을 하였고 또 본래 명성이 있었는데, 이제 대책을 보니 또한 훌륭한 작품이다. 권남을 장원으로 삼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허후(許詡)가 대답하기를,
"다시 권남의 대책을 보니, 진실로 훌륭한 작품입니다. 다만 시폐(時弊)를 바로 진술(陳述)하였기 때문에 말이 불공(不恭)한 데가 있었던 까닭으로 제 4등에 두었습니다. 이제 권남의 고하(高下)를 성상의 마음에서 재량(裁量)하소서."
하여, 드디어 제 1등으로 두었다. 권남의 부자가 서로 잇달아 장원(壯元)하니, 당시의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겼다. 무릇 문과(文科)의 등제(等第)의 고하(高下)는 시관(試官)이 그 사람의 성명(姓名)을 보지 않고 먼저 글의 잘 되고 못 된 것을 보고 그 등급을 정한 다음에 성명을 뜯어 보는 것은 공도(公道)를 보이고자 함이었다. 권남의 일은 비록 임금의 지극한 공도(公道)에서 나왔으나 당시의 의논이 후일의 폐단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조선왕조실록 문종 즉위년 10월 12일 임오 2번째기사
조정에서 김의정의 부친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장원 급제를 철회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김의정의 부친은 당시 칠반천역 중 하나인 수군으로 종사하고 있었다.
칠반천역이라 함은 조례(중앙군 아전), 나장(경찰, 순라군, 옥졸 등의 우두머리), 일수(지방 아전), 조군(조운에 종사하는 직종), 수군, 봉군(봉화에 종사하는 직종), 역보(역에 배속되어 일하는 직종)이라 하여 신량역천으로 신분은 양민이지만 사실상 천민으로 대접받는 신분이었다.
그런 칠반천역의 자식인 김의정을 두고 장원에 어울리지 않다는 말이 나온 거다.
집안이 별로니까 아무리 정답이 뛰어나도 장원이 안된다고 대놓고 조정에서 말했다.
조정에서 칠반천역의 자식인 김의정 대신 장원으로 추천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권람(權擥)이다.
권람은 3차 시험인 전시 이전에 1,2차 시험인 향시와 회시에서 장원을 차지한 바 있었다.
게다가 집안 또한 좋았다.
아버지는 장원 급제를 한 바 있고, 우찬성까지 지낸 권제였다.
할아버지는 정몽주의 제자이면서 고려 후기 신진사대부 중 한 명이었고, 조선 건국 이후에는 최초의 대제학이었던 권근이었다.
게다가 왕실과도 혼맥이 있어서 작은 엄마가 태종 이방원의 딸인 경안공주였으니, 그야말로 금수저라고 볼 수 있었다.
분명 조정에서도 반발이 없지 않았던 걸로 비춰지지만, 결국 인맥을 바탕으로 권람은 3차 시험인 전시에서 4위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원에 내정되고 만다.
김의정은 장원 급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되려 2등으로 급제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관직 생활도 순탄하지 않았던 걸로 추측된다.
기록이 남아있는 게 많지 않으며, 남아있는 기록에서도 현감을 역임한 정도만 확인된다. 직후에 벌어진 일련의 정치적 사건도 영향을 끼쳤으리라 판단된다.
결국 조선시대 흙수저였던 김의정은 금수저였던 권람에게 장원 급제를 뺏기고 만다.
역사 속의 씁쓸한 하나의 단면이라고 볼 수 있을 거다.
ps 1. 장원을 강탈한 권람은 한번 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한명회의 절친이었다. 그래서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 측에서 활동했고, 이후 좌의정까지 지내면서 권세를 누리다가 삶을 마친다.
ps 2. 위에 언급된 권람의 부친인 권제는 높은 관직을 지냈지만, 자신의 딸을 발로 차죽인 바 있는 패륜범이다. 이로 인해 처벌을 받았지만, 이후 고려사를 편찬한 공으로 사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