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의 용, 하늘의 카간이 되다 - 당 태종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놓칠 리가 없는 돌궐,
일릭 카간은 그해 8월 직접 10여 만 기를 이끌고 장안을 위협했다.
울지경덕이 경양현에서 돌궐을 대파하긴 했으나, 여전히 동돌궐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은 유지되었다.

이에 이세민은 6명만 이끌고 위수에서 일릭 카간에게 '왜 약조를 깨고 군사를 이끌고 왔느냐!'며 꾸짖자 일릭 카간이 놀라 말에서 내려 절하였고, 서로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를 '위수지맹'이라 일컫는다.
는 게 <구당서>, <자치통감>의 기록인데 이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는 당나라는 상당히 굴욕적인 내용으로 돌궐과 합의했으며, 이는 아직 현무문의 변 이후 내정을 완벽하게 다지지 못했으며, 돌궐의 세력이 막강했음을 의미한다.
당 태종은 돌궐의 카간이 고립되어 있는 상황인데, 지금 공격하면 폼이 나지 않는다니, 지금 싸우면 반드시 죽고 죽여 원한이 생긴다니의 각종 변명을 하는 당 태종의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당 태종은 돌궐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실제로 돌궐의 카간에 복속하고 있는 오아시스 도시나, 다른 투르크 부락들은 일릭 카간의 통치 방식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부락의 동원으로 침략을 해 약탈한 물자들을 얻는 방식은 카간의 독점 형태가 아닌 동원에 참여한 부락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렇기에 일릭 카간은 소그드 상인들만을 상당히 중용했고(이는 타 부락과 공유해야할 의무가 없다) , 타 부락들의 과세 비율을 높혀 불만을 샀다.
당 태종은 이런 사실들을 이용해 설연타에게 '카간'의 칭호를 내리고 원조를 해 동돌궐과 경쟁을 하게 하기도 했다.
'지금 군대를 거두어 싸우지 않고 옥과 비단으로 그들을 유혹하면 우둔한 돌궐의 교만함과 방자함이 반드시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니 그들이 멸망하는 점진적인 과정이 여기에 있다!'
라고 말하였고, 놀랍게도 이후 돌궐 제 2제국의 비문에서 동돌궐이 멸망한 원인을 지적하는데 이와 내용이 일치한다.
결국 이러한 이유들로 동돌궐은 등잔 앞에 촛불 신세였고, 투르크계 부락인 설연타는 몽골 초원으로 와 동돌궐을 격파 후 유목 국가를 건설, 해, 거란, 습 등의 부락 또한 당에 복속하는 등 동돌궐의 해체가 시작되었다.
627년, 심지어 자연재해까지 발생해버리는 등 결국 동돌궐은 음산 산맥을 중심으로 한 고비 남부 지역을 차지한 세력 정도로 전락해버렸다.
그럼에도 당 태종은 성급히 돌궐에 대한 정복을 시작하지 않았고, 위수에서 맺었던 맹약을 핑계로 내실을 다지는 데에 몰두했다.
629년, 대주도독 장공근은 일릭 카간은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다는 주장을 했고 결국 당 태종은 일릭 카간이 하주의 양사도를 도왔다는 것을 명분을 삼아 대대적인 원정을 시작했다,
그해 12월 일릭 카간과 불화가 존재했던 주변 부락들은 당에게 복속했고, 630년 정월, 이정은 일릭 카간의 본거지를 밤을 틈타 습격했고, 일릭 카간은 고비로 도망쳤다.
이에 일릭 카간은 조정에 들어와 사죄하고, 나라를 바치며 항복하겠다고 간정해 이를 당 태종은 받아주
는 척을 하며 다시 한 번 이정을 시켜 급습을 했다.
결국 일릭 카간은 생포되었고, 동돌궐은 와해되어 일부는 설연타로, 일부는 서역으로, 일부는 당나라로 항복했다.
이는 돌궐이 으쉬바라 카간 이후 상실한 돌궐 중심의 세계 질서를 되찾으려는 돌궐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고, 다시 한 번 중원의 국가가 세계 질서를 주도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630년 3월, 동돌궐을 멸망시킨 당 태종에게 부락들의 추장들이 장안에 들어와 태극궁 앞에서 천가한(텡그리 카간)(天可汗)이란 칭호를 바쳤다.
그러자 당 태종은 "난 황제인데, 어찌 오랑캐의 카간의 일을 한단 말인가?" 라고 답 했고, 이에 문무백관들은 만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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