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구한말의 기술 교육 기관 하나
숭실대 얘기임
지금 숭실대학교의 전신인 숭실학당이 1800년대 말에 평양에 문을 열었을 때임.
당시 숭실학교 설립자 윌리엄 베어드 목사는 학생들이 머리는 좋은데 형편이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직접 노동을 해 돈을 벌자는 운동을 벌였음. 일명 자조사업.
보통 선교사들이라면 농업 쪽으로 자강운동을 했을 것 같지만 이 사람은 좀 달랐음.
1902년 베어드 목사는 미국에서 후원을 받아 학교 교정 내에 기계창이라는 공장 내지 작업장을 지어버림. 영어명은 후원자의 이름을 딴 '안나 데이비스 기계창(The Anna Davis Industrial Shop)'.
공장 형태는 T자 모양이었음. 이곳에서 학생들은 원한다면 목공, 철공, 주물, 유리공업을 배우면서 학비를 충당했음. 베어드는 이곳에서 학생들이 노동의 가치를 배우길 바랬음.
숭실대학이 성장함에 따라 기계창에 참여하는 인원도 꾸준히 증가했고, 그에 따라 기계창이 담당할 수 있는 작업 범위도 목공, 단조에서 주물가공, 유리가공, 연관공사, 심지어 학교 건물의 증․개축까지 점차 넓어졌다. 기계창은 주로 학교 설비 및 평양 장로교 구내 공관들에 필요한 가구, 무쇠공작품 및 도금, 유리가공품들을 제작하고 건물의 기술설비들을 유지․보수하는 일을 담당했는데, 점차 다른 감리교 학교들, 평양 거주 서양인들도 기계창의 주요 고객으로 포함되었다. 1928년에는 전기방적기가 도입되어, 직조, 재단이 기계창의 작업 범위에 포함되었고, 곧 교복을 제작․판매해 새로운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베어드는 선교본부에 보내는 연례보고를 통해 기계창이 숭실대학과 숭실중학에서 재정 확보와 학생들의 기술 훈련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언급하며, 향후 더 많은 분야가 생기고 더 전문화된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학교와 감독자가 기술개발을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학생들 스스로 자신의 일에 흥미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자신만의 전문화된 기술을 가질 수 있도록 독려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베어드는 이러한 기계창이 학생들의 자조를 위한 공간이지 직업교육장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작업자의 숙련도 및 성실성 따라 임금을 차등 지급하고, 작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해고도 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해 본격적인 작업 윤리가 작동하는 공장체계를 갖추고자 했다.
...이렇듯 기계창은 학생들의 기술 작업장이자 일종의 공업 상점으로 엄밀하게는 대학 학제에 포함된 학과 교육은 아니었다. 그러나 숭실전문이 운영되는 동안 거의 절반가량의 학생들이 기계창에서 반나절 혹은 온종일 노동한 경험이 있었고, 이들에게 기계창은 학교의 수업 못지않게 중요한 학습 공간이 되었다. 숭실 중학과 대학을 거쳐 1930년대 프랫트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72년 숭전대학교의 초대 총장이 되기도 한 공학자, 김형남의 회고에 따르면, 중학시설부터 기계창에 소속되어 유리제품 배달, 목공작업 등을 했고, 대학생이 된 이후에는 철공부로 옮겨 주물, 협관 작업, 책상과 의자 제작을 담당했는데, 이러한 경험들은 훗날 자신의 유학을 결정하고, 직업을 선택할 때 큰 지침이 되었다. 더욱이 숭실대학은 기계창에서 익힌 기술들이 단순히 관리감독자인 맥머트리의 지시에 따라 단순한 작업을 수행하는데 그치지 않고, 학생들 스스로 기술 공정을 설계하고 기획할 수 있도록, 기계설계 수업을 숭실전문의 정규수업 교과로 개설했다. 맥머트리가 직접 과목을 맡아 주당 6시간 강의를 진행했다.
...나열된 기술 목록들은 59개 분야에 이르는데, 농업, 상업, 수산, 광업 등 산업별 분류와 각종 식품제조 분야를 제외한 유리제조, 목공, 전기, 주철, 철공장, 연와, 재봉, 모직 등 각종 공산품 제조 기술들은 공업상점 기계창에서 생산되고, 이미 기술자 훈련도 이뤄지고 있는 것들이었다. 즉 기계창은 서구의 오래된 기술들을 평양사회에 활기를 불어넣을 새로운 기술로 탈바꿈시켜 공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1907년부터는 미국 록아일랜드 조병창에서 주임으로 있었던 로버트 맥머트리(한국명 맹로법) 장로가 기계창에 부임해서는 공장을 총괄했음
록아일랜드 시절 뭘 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아직 못 찾았는데, 하여간 맥머트리 장로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 외에도 주변 건물들을 보수해주기도 했다 함.
무기 만들던 조병창 주임 출신이라 그런가 정밀도와 품질에 상당히 엄격했나봄. 학생들은 융통성 없는 스코틀랜드인이라고 뒷담을 까기도 한 듯?
1864년생이고 1946년에 사망함.
그외에도 숭실학교는 설립 당시부터 어렵게 구한 9명의 교수진 중 4명을 과학 분야에 배치했을 정도로 이공계 분야 수업에 진심이었음
1910년대 초에 물리 천문 지질 생물학 분야에 하나씩 다 교수들을 가지고 있었으니깐. 1924년에는 기숙사 한 동 전체를 응용과학실험실로 바꾸었음
숭실학교 화학실험실은 평양 지역 산업체들이 만든 제품들의 성분조사도 해주면서 일종의 산학협력도 했다더라구.
이는 한국사 최초의 산학협력 시스템임.
다만 설립자 베어드 목사는 그렇다고 세속주의까지 긍정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선교사로서 어디까지나 전도라는 목적에서 학교 커리큘럼을 짰다고 함.
세속적인 방식으로 비기독교인에게도 문을 열어야 한다는 언더우드 등과 달리 기독교인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길 원했음.
어쨌거나, 기계창의 공정들과 서비스들은 다음과 같음
1) 인쇄 - 1900년부터 시작됨
2) 단조
3) 주조 - 술 말고 금속 주조. 보통 평양 일대 교회에서 쓸 종들을 만들었다나
4) 제관 - 연통 제작
5) 목공
6) 기물 수리
7) 농기구 수리
8) 건물 수리
이곳에서 배운 사람들은 아주 많음. 숭전대의 종합대 전환 후 초대 총장인 김형남 박사도 기계창에서 5년간 일하며 노동의 가치를 깨달은 후 미국으로 유학해 화학을 전공했고
대한석탄공사 초대 총재 김성호 역시 숭실학당과 기계창에서 배우고 일하면서 자수성가의 가치를 깨달았음. 이후 미국으로 유학, 독립운동을 함과 동시에 화학을 배워옴
한국식물생태학 학계의 창시자인 김준민 박사 역시 숭실학당 기계창과 부속농장, 그리고 과학관에서 일하면서 초기 경력을 쌓은 후 유학가서 생물학을 배워왔음.
아직도 숭실대는 이곳 기계창의 역사적 의의를 자랑스러워하고, 설립자들과 이곳에서 일한 선배들이 이루고자 했던 가치를 기리고 있음.
출처
맹로법과 기계창
평양의 기독교 공동체와 숭실전문학교의 과학기술 교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