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유명했던 왜군 장수들의 전쟁후 운명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에 가담했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후,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할복을 거부하고 붙잡혔음. 결국 1600년에 이시다 미츠나리와 함께 참수형에 처해졌음. 그의 영지(24만 석)는 모두 몰수되었음.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이시다 미츠나리와의 불화로 인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합류했음. 세키가하라 전투 후 도쿠가와 막부의 승리에 큰 공을 세웠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옛 영지인 히고국을 차지하여 51만 5천 석에 달하는 거대 다이묘로 성장했음. 이후 1611년에 49세의 나이로 사망했음.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음. 전투 막바지에 적진을 뚫고 퇴각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살아남았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를 제거하는 것보다 회유하는 것이 이득이라 판단하여 그의 가문을 용서해 주었고, 영지 일부를 삭감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음. 이후 그는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고, 1619년에 85세의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음.
임진왜란 당시 : 쓰시마 번주로서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에서 참전하며 항해, 통역, 교섭을 담당했다.
전쟁 후 조선과의 단절로 경제 위기를 맞자 도쿠가와 막부와 손잡고 국교 회복을 추진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음. 1607년 조선 통신사 파견을 성사시키고 1609년 기유약조 체결로 조선과의 독점 무역권을 확보했다. 이후 조선과 일본의 외교·교역 중개자로 활동하다 1615년 사망했다.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
처세술에 능한 인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합류했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32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고, 에도 막부 시대에까지 고위직을 유지하며 권력을 누렸음. 1630년 74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자연사했음.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음. 하지만 그의 아들인 구키 모리타카는 동군에 가담했음. 전투 후 구키 모리타카는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탄원하여 구명 허가를 받아냈음. 하지만 구명 소식이 구키 요시타카에게 전해지기 전에, 가신의 권유로 1600년 59세에 할복했음.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초반에는 서군이었지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을 보고 곧바로 동군으로 돌아섰음. 이 덕분에 자신의 영지를 지킬 수 있었으며, 이후 1626년 72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