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국왕별 화기개발사 요약


건국 초라 바빠서 특별한 관심 없음
왜구도 잦아들고 여진족도 꽉 잡고 있어서 수요도 적음
최무선을 데려왔으나 틀딱이라 별 활약 못함
여진족한테 선시비 걸었다 개털린 덕분에(ㅋㅋ) 화기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짐
최무선 아들 최해산을 적극적으로 기용해서 화포 개발 주도
화약 성능 개량, 신무기 개발 등 여러 기술적 성과
해전에서 사용되던 화포를 육상에서도 운용하기 시작함
화통군 증원, 화약감조청 설립 등 제도적으로도 뒷받침
화기 개발의 황금기
악화된 대여진 관계로 여진족이 안보의 핵심 위협으로 부상하는 시대에 맞춰 화포 경량화를 통한 대기병 전술 개발에 주력
북부 국경선에 적극적인 화기 배치, 감시시설 강화, 야전포 도입, 이만주 토벌 시도
신기전, 천자총통을 비롯한 다종다양한 화포 개발 및 개량, 개인용 소형화기 연구
전문 화기반 총통위, 염초 생산 및 연구 기관 사표국 설립, 국가의 염초 생산기술 독점 및 생산량 증대
토목의 변으로 인한 안보 경각심 증가
개인적으로는 화기 개발에 관심이 많았고 신무기 화차 개량에도 깊게 관여해 성과를 거둠
그러나 세종 말기부터 이어진 잦은 흉년으로 인한 재정 악화 및 염초 생산 제도의 폐단, 그리고 본인의 이른 죽음으로 인한 장기적인 화기 개발 동력 상실
본래 화기 전문반이던 총통위는 치안활동과 국왕 호위에 주로 동원되는 등 성격이 변질됨.
약한 왕권, 불안한 정국, 경제난으로 인해 화기개발이 멈춤
흉년으로 인한 재정 악화로 화기 생산량 감산, 이후에는 아예 생산 중단
본인 또한 얼마 못가서 삼촌에게 단종당함.
지속적인 경제난과 정국 혼란이 겹치며 화기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누적되어 왔음.
또한 북방에선 여진족이 부상하고 내부에선 반란이 일어남.
과전법의 폐단이 극에 달하며 악화된 재정과 증가한 군사적 압력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군제개혁 실시.
기술적 혁신보다는 실무 정책을 통한 체제 재정비에 집중함
과전법 폐지, 진관체제 도입, 중앙정부의 화기 통제 강화, 지방의 화기 상태 개선, 민간 염초 생산 규제 폐지, 두 차례의 여진 정벌과 이만주 토벌, 이시애의 난 진압 성공 등.
대기병용 경량화 화기인 신제총통의 개발은 태종-세종 화기개발정책을 성공적으로 계승했다는 사실을 보여줌.
짧은 집권 기간이었지만 세조의 정책을 계승해 여진 전선에 관심을 기울임.
집권 초기에는 이미 확보된 화기 수량이 넉넉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음.
화차를 재발견하고 총병의 중요도를 높인 <오위진법>을 편찬함.
그러나 안보 압력 감소와 재정문제로 인한 대대적 군축기조와 함께 국방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며 전반적 누수가 발생.
여진정벌 하겠다고 2만명 데려가서 9명(오타아님) 죽이고 돌아오는 개그를 보여줌.
화기 장인들의 처우가 나빠지고 화기가 있어도 사용법을 몰라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김.
애기연산은 대포에 관심 없고 파티 좋아해
파티하는데 시끄러우니까 화약고는 궁 밖으로 옮겨
그래도 사냥할 때는 화약 펑펑 써야지
화약 전문 파진군이 연산군 대에 와해되어 기술을 전수할 고참병조차 없어지고 오발사고로 병사들이 픽픽 죽어나가는 상황이 됨.
하다하다 장인 없어져서 불꽃놀이도 못함.
삼포왜란이 발생하며 주적이 여진 기병에서 일본 해군으로 전환
바닥을 찍은 군사력 속에서 해이해진 군 기강을 다잡고 군사력 재건을 시도함.
변화된 적에 맞추어 경량화 기조를 폐기하고 벽력포라는 거포를 개발함.
을묘왜변 당시 유럽에서 조총을 수입하고 함선도 업그레이드해 더욱 강해진 일본 해군의 전력에 크게 당황.
함대전을 위한 대형 화포의 개발에 집중하고 군기 개선 및 수군 재건을 위해 노력. 판옥선도 이때 개발함.
근데 돈 없어서 한계가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