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서제의 비극, 그리고 진비의 최후


융유 황후
1889년, 광서제 18살 되던 해. 서태후는 황후를 간택한다. 하지만 이건 그냥 쇼였다. 서태후는 자기 조카 여씨(나중에 융유황후가 됨)를 황후로 앉히기로 작정하고 있었고, 간택이랍시고 후보를 올린 건 그냥 형식적인 절차였다.
그런데 변수가 생긴다. 광서제가 진비 후보를 보자마자 눈 돌아간다. 실제로 진비를 황후로 밀어붙이려 했지만, 서태후한테 혼쭐나고 빠꾸 먹는다. 결국 서태후 조카가 황후 자리에 앉지만, 광서제는 그날부터 황후를 철저히 무시한다.
애정도 없고, 자식도 없다. 그냥 이름뿐인 황후였다. 광서제는 진비를 너무 총애한 나머지, 자매인 근비까지 후궁으로 받아들인다.

광서제
요즘식으로 말하면 세트 영입. 진비는 외모도 뛰어났지만 성격도 똑 부러졌고, 서양 문물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여자가 황제 옆에 붙어 있으니, 서태후 입장에선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자기 손아귀에서 벗어날까봐 진비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1898년, 광서제는 개혁파 대신들의 지지를 받아 변법자강 운동에 나선다. 청나라를 근대국가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당연히 서태후와 보수파들은 이를 견딜 수 없었고, 결국 그 해 9월 무술정변이 일어난다.
광서제는 섬서당에 유폐되고, 권력은 다시 서태후 손으로 넘어간다. 진비도 같이 끌려간다. '후궁 주제에 정치에 개입했다', '황제를 부추겼다'는 명목이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단 하나. 서태후가 진비를 진작부터 싫어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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