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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어째서 실패했는지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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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영국은 서부전선이라는 지상에서만 고난을 겪지 않았다


오히려 바다에서 더욱 취약했다


물론 이게 독일의 해군력에 패배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의 항구 봉쇄를 허용했다


바다에서 독일군에게 노출된 건 협상국과 중립국의 상선이었고, 수단은 잠수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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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프랑스는 수입에 최고로 의존하는 품목이 달랐다


영국은 식량이었다


1914년 8월에 영국 빵 5개 중 4개는 수입산 밀로 만들어졌다


5개 중 3개엔 수입산 버터가 들어갔다


영국의 식량 수입 의존도는 전쟁 전부터 매우 높았고, 전세계를 아우르는 식량 무역망이 존재했다


이렇게나 거대한 무역로를 보호하기는 영국 해군으로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영국은 전쟁이 터지자 운임을 점점 올리는 선주들의 수익을 통제하는 등 여러 조치를 취했다


그런 조치 중 하나는 초과이득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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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식량을 수입에 덜 의존했다


전선이 고착된 후에도 여전히 넓은 농업지대가 존재했고 여자, 노인, 아이가 성인 남성의 빈 노동력을 채웠다


하지만 프랑스는 국가에서 두번째로 산업화된 지역이 점령당하면서 수많은 광산을 잃고 말았다


석탄의 경우엔 채굴량이 약 50%가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총력전 때문에 석탄 수요가 치솟아올랐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의 포탄 위기가 1915년 8월에야 해소되었다


군수공장만 석탄을 먹는 것이 아니다


군 보급과 배치에 필수적인 열차도 석탄을 소모하고, 민간인의 음식 조리와 겨울나기에도 석탄이 필요하다


게다가 프랑스 해운업계는 전쟁 전부터 악명높았고


조선소를 군수공장으로 전환했기에 침몰하는 상선을 보충하기가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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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국가는 본토에서 주로 나는 자원이 달랐기에 수입으로 채워야 할 자원도 달랐다


배 숫자가 무한하지 않으니 이 문제로 갈등이 엄청났다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영국의 전통적인 역할은 동맹에게 자원을 공급하는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이를 겪은 적 있는 프랑스는 당연히 영국이 우리에게 자원을 공급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잠수함 공격으로 점점 줄어드는 용적 톤수 때문에 운임이 상승했고 보험료가 갈수록 높아졌다


당연히 석탄 가격이 폭등했고 광산 소유주와 선주들의 지갑이 두둑해졌다


영국은 그들의 지갑을 초과이득세로 다시 털어가려 했으나


영국이 금고를 채우려 그런다고 오해한 프랑스의 분노를 사고 말았다


예를 들어, 프랑스 상원 외무위원회는 프랑스 무역업자가 영국 무역업자에게 내야하는 막대한 운임에 항의했다


군수장관 알베르 토마는 1916년 4월에 로이드 조지에게


영국이 높은 운임이라는 형태로 프랑스에 초과이득세를 물리는 문제를 처리해야 오해를 막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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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프랑스는 해운 공격이라는 독일의 전략에 매우 취약했다


로이드 조지가 1916년 12월에 총리가 된 후 첫 연설에서 표현하길


'해운이란 심하게 손상되면 국가의 목숨이 끊어지는 경동맥입니다.'


 영국이 걱정했던 대양함대보다 잠수함이 생존에 훨씬 거대한 위협이었다


독일은 1917년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라는 전략적 도박을 시도했다


이는 경고 없이 눈에 보이는 모든 상선을 공격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이 도박은 거의 성공할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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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무렵, 대양을 항해하는 전세계 선박 8445척 중 4174척이 영국의 것이었다


프랑스의 것은 357척에 불과했다 


당연히 잠수함에 잃는 화물선 대부분이 영국 것이었다


1916년 동안 1달에 공격받아 잃는 용적 톤수가 6만톤에서 12만톤 이상으로 증가했다


 1916년 4월까지는 건조량이 손실량을 따라갈 수 있었으나, 곧 따라잡혔다


1916년 말엔 150만톤의 선박을 잃었는데, 영국이 진수한 선박은 50만톤에 불과했다


여기에 솜 전투로 군에 대규모 군수물자를 공급해야 했기에 다른 물자를 옮기는 데 쓸 선박이 부족해졌다


동맹들에게 해줘야 했던 공급도 제한된 용적 톤수에 부담을 주었다


영국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물자 공급용 특수 목적 선박을 할당했고


그렇게 두 국가가 상선을 징발할 필요를 줄여주는 대신 정기용선료를 부과했다


1915, 1916년에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용선한 영국 상선은 600척이었다


게다가 영국은 프랑스로 달마다 20000톤의 냉동육과 13000톤의 석유제품을 수송했다


그리하여 프랑스가 수입의 48%를 영국배로 하고 26%만 자기 소유의 배로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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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자원이 줄어드는 한편 협상국들의 수요가 계속 증가하여 갈등이 터져나왔다


1916년 각료회의의 주요 주제는 운임이었다


프랑스 상무장관 에티엔 클레망텔은 회의 중 '영국의 도움을 구걸'이라는 표현을 쓴 바가 있다


프랑스 전쟁부 경제과는 1916년 4월에 화물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거기에 따르면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높은 운임에 시달림에도 영국과 중립국 해운사들이 주주에게 거액의 배당을 주고있다'


다음달에 나온 보고서가 내린 결론에 따르면


'영국 재무부가 엄밀하게 공정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재정 조치로 이득을 보고 있다.'


그 보고서의 전체적인 어조는 프랑스군이 서부전선에서 맡은 부담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


특히 '국경에서 흐르는 피가 무역업자들의 재산의 원천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라는 표현에서 말이다


조프르 또한 1916년 7월 14일에 영국이 포탄을 한달에 겨우 145000발밖에 생산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이것이 시장에서 독일이 쫒겨나며 생긴 자리를 영국이 차지하는 데 급급하느라 생긴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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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부당한 주장이다


게다가 프랑스는 작은 선단과 자원지대 상실에도 불구하고 선주들에 대한 통제를 느슨히 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회사들이 겪은 제일 높은 선박 징발율은 32%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회사가 이보다 훨씬 낮은 수치로 징발당했다


프랑스는 상선을 1918년 2월에야 완전히 징발했다


프랑스 선주들은 높은 운임으로 이득을 취했고, 몇몇 회사는 더 큰 욕심을 부려 영국에서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통제를 어렵게 만드는 자치 선단이 존재했다


민간 식량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상무부 선단이 존재했고


일명 석탄함대였던 공공사업부 선단도 존재했다


해군부 또한 함대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선단을 보유했고


전쟁부는 1916년 중반까지 프랑스에서 가장 거대한 용선 회사를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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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문제는 항만폭주 때문에 더욱 심각해졌다


르아브르 항만은 1916년에 1913년보다 60% 많은 용적 톤수를 처리했고 99% 많은 상품을 취급했으나


노동자 수는 전쟁 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60개중 14개의 하역용 부두를 영국에게 넘긴 루앙에선 1916년까지 통항량이 2배로 증가했다


프랑스 석탄 수입의 1/3이 여기로 들어오기에 루앙이 특히 까다로운 상황이었다


솜 전투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영국 군수차관 크리스토퍼 에디슨에 따르면


'주요 장애물은 시대에 뒤떨어져 많은 양의 군수품을 처리할 수 없는 프랑스 항구에 있는 듯 하다. 지난 2주 동안 프랑스 철도가 처리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군수품이 도착했다.'


 영국은 1916년 6월에 프랑스의 주요 항구들을 감독하고 무개화차 부족이 지연의 주원인임을 알아냈다


이런 이유로 석탄 하역이 느려 배가 영국으로 늦게 돌아갔다


배가 늦으니 수출용 철강이 항구에 쌓이게 되었다


프랑스는 철강 부족에도 시달렸다


슐리펜 계획으로 철강 산업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배가 하역시설과 대형 크레인 부족 때문에 철강을 내리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일이 가끔 벌어졌다


사실 항구 혼잡으로 인한 수입량 감소는 잠수함으로 인한 수입량 감소만큼이나 컸다


유보트가 가장 활발했던 1917년에도 입항 지연으로 인한 손해가 바다로 침몰한 화물량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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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설명한 모든 문제로 인해 국가통제가 확립되어야 했다


용선과 징발이 1914년에 시작되었고 1915년 11월에 선박허가위원회가 설립되었다


1916년 1월엔 군사적 목적의 필수품 수입 물량을 협상국들에 어떻게 할당할지 결정하는 해운통제위원회가 나타났다


동시에 영국 봉쇄부가 설립되었다


운임과 보험료 상승으로 인한 가격 상승을 지속적으로 확인했다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요금을 표준화하여 일명 Blue Book 요금이 등장했다


적어도 영국에선 전쟁 발발 2년 후 일반적인 영리기업이 붕괴 중이었고 감소하는 용적 톤수만큼 통제가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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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국가통제는 비효율적이었지만 어쨌든 영국을 모범으로 삼았다


해군장관 라카즈 제독은 1916년 4월 4일에 푸앵카레에게 국가 필수 물자만 운송해야 한다는 법안을 제출하여


국가의 이익과 협상국의 이익 모두에서 행동의 일치를 보이자고 제안했다


프랑스의 모든 상선이 목적지가 어디든 해양부에게 특별 면제받지 않는 한 필수품만 수송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프랑스는 수입품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상선 사용을 엄격하게 통제할 필요를 느꼈다


1916년 2월 29일에 제정된 그 법령은 해운위원회가 작성했다


국회의원들이 프랑스의 해운이 비효율적임을 지적하며 이를 개선하기 위한 정치적 압력을 해운위원회에 넣었다


이제 쾌속선이 병력이 아닌 물자만 실어야 하게 되었고, 하역 후엔 빈 채로 돌아가야 했다


3월 24일 운임 인상에 대한 질의가 끝난 후 이루어진 정부 신임투표에서 협상국의 공동선단 창설 요구가 등장했다


1916년 11월엔 철도수송, 수운, 해운을 아우르는 운송 및 수입 총괄 기관이 해운위원회를 대체했다


이 총괄 기관은 운송 계획을 수립하고 수입품 우선순위를 정하고 공공서비스 용도로 용선된 배 입출항을 통제했다


또한 각 부의 자치 선단을 흡수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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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항만 폭주는 영국이 조치했다


에릭 게데스가 철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글라스 헤이그와 만나러 프랑스로 떠났다


프랑스군이 베르됭과 솜에서 싸우는 동안 영국이 프랑스의 항구와 철도를 감독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게데스는 즉각 솜 전투를 위한 철도를 개선할 수 있었고


프랑스가 철도 권한을 영국군에게 넘겼기에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남아있었다


해운통제위원회는 프랑스 항구의 수용력을 고려해 프랑스에 할당된 석탄 수입량을 줄이고 허가증 발급을 줄였는데


이러한 조치가 오해를 낳아 프랑스인들의 분노를 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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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강한 통제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싸고 숫자가 부족한 외국배에 더 크게 의존해야만 했다


 1916년 1월에 이루어진 상황 검토에 따르면 영국 해운이 협상국 수요를 채워주려면 150만톤의 할당량이 필요했는데


이는 영국이 협상국을 위해 징발하거나 용선해준 용적 톤수를 넘어서는 수치였다


1916년 말에 프랑스로 물자를 운송하고 하역하는 데 따르는 문제가 심각해져 갔다


영불해협 양측에서 문제를 해결할 더 체계적인 방법을 조속히 시도해야 한다는 인식이 커졌다


특히 잠수함에 의한 손실이 너무나 심각한 나머지 언론에서도 보도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프랑스 산업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프랑스 의회에서 이러한 수송 위기를 길게 논의했다


하원은 11월에 3번의 길고 감정적인 회기를 열었고, 주로 석탄 부족으로 초래된 위기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댔다


상원에선 12월 19일에 비밀 회기를 열었는데


클레망소가 여기서 석탄 부족 때문에 문을 닫거나 생산량이 떨어진 공장 목록을 발표했다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의 석탄 위기가 재앙적인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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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국의 전쟁수행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각자 자원 공급, 군수물자 공급으로 역할을 나눴다


프랑스는 국가에서 두번째로 산업화된 지역이 점령된 상태에서 총력전을 수행했음에도 3억발이 넘는 포탄을 생산하며


세르비아군, 벨기에군, 루마니아군, 그리스군, 미군을 무장시켰고


영국군, 러시아군, 이탈리아군에 수많은 군수물자를 보급했다


프랑스는 이를 위해 1915년에만 130만톤의 철과 강철을 수입했는데, 이 중 89%가 영국산이었다


군수 노력을 1916년 초 30만톤을 잠수함에 잃고 운임이 5배로 상승했음에도 달성했다


예로, 카디프에서 영불해협의 프랑스 항구로 석탄 1톤을 옮기는 비용은 4실링 3펜스에서 1916년 7월에 23실링으로 올랐다


타인에서 대서양 항구로 옮기는 비용은 같은 기간 5실링 9펜스에서 35실링으로 올랐다


프랑화로 보면, 카디프에서 마르세유까지 석탄을 옮기는 비용이 원래 8.5프랑이었다가 1916년 3월에 90프랑으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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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에 협상국 해운에 질서를 부여하고 조정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들이 행해졌고 체계화되었다


이는 전쟁 전에 체결한 금융 협정의 연장으로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영국의 전통적인 활동 영역이었던 금융이 협력의 동력기관으로 기능했다


1915년 2월에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에 경제 지원을 해주기로 결정했다


이어 4월에 양국의 재무장관인 로이드 조지와 알렉상드르 리보가 추가 협정을 이루었는데


프랑스가 런던에서 150만 프랑 신용장을 트고 런던에 금을 대출해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다음 달엔 프랑스가 미국에서 물자를 구입하기 위한 구매 대리인으로 영국을 따라 J.P 모건을 선택했다


영국 내 구매는 더 일찍 공식화 되었다


프랑스 대사 폴 캉봉은 1914년 8월 5일에 영국 외무부로 찾아가


프랑스군이 식량, 피복, 기타 군수품을 영국에서 구입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제한된 물자에 대한 양국의 경쟁을 최소화해 가격 상승을 억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8월 17일에 국제조달위원회(Commission Internationale de Ravitaillement)가 설립되었다


이는 야심찬 이름에 비해 미약한 조직이었으나 단단한 협력의 첫발인 조직임은 부정할 수 없다


국제조달위원회, 이하 CIR 덕분에 금융 및 구매 협조를 확장할 수 있었다


CIR은 구매품의 육상, 해상 수송을 해군부 및 상무원과 접촉하는 대표를 통해 조정했다


 CIR은 구매품을 직접 이동시키기 위한 용적 톤수를 부여받은 덕분에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용적 톤수가 포탄 제조용 철강을 프랑스로 보낸 다음, 영국에게 필요한 건초를 싣고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협상국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알아내기 위한 중앙집권적 수단이 없었기에 


CIR가 불충분한 도구임이 곧 밝혀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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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선박을 영국과 협상국들에 할당하는 영국 해운통제위원회가 1916년 4월에 수요 조사를 실시했다


영국 수요에 프랑스, 이탈리아의 요구를 더했더니


전쟁 첫해의 수입 무역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선 용적 톤수가 325만톤 더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위원회가 협상국에 할당된 영국 용적 톤수를 4월 1일의 수치로 제한해야 한다고 5월에 권고했다


위원회는 심지어 프랑스에게 용적 톤수 할당 약속을 철회하겠다는 위협도 했다


훗날 유럽연합의 아버지가 되는 장 모네가 자신의 협상력과 인맥을 동원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알고보니 해운통제위원회가 계산을 대충 한 것이었다


잘못된 계산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필수 물자 부족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들 더욱 강하게 인지하기 시작했다


7월엔 협상국의 용선을 중앙집중화 하기 위해


석탄, 곡물, 광석을 관장하는 용선위원회 3개를 CIR에 설치하자는 안건이 나왔다


이는 CIR에게 모든 선박의 허가증 발급, 거부 권한을 전부 넘기는 계획이었으나, 성공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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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전쟁부에서 포병과 군수를 책임진 알베르 토마는 더 강력한 협상국 협조와 물자 통제를 밀어붙이고자 했다


1915년 8월 런던에서 열린 군수 회의에서 토마는 영불 단일 군수부 설립을 주장했다


11월 회의에선 건설계획, 주문, 원자재 공급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격월로 회의를 여는 중앙군수부를 주장했다


로이드 조지는 토마를 지지했으나, 양국 군부가 급진적인 개방에 난색을 표했기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프랑스의 압력으로 알베르 토마와 에드윈 몬타구가 1916년 9월 6일에 한가지 계획에 공동 서명했는데


바로 협상국간 군수국 설립이었다


목적은 미국 시장에서 공동구매였다


원자재, 무기, 탄약, 폭발물, 기계장비 주문서들을 우선 군수국에 제출하고, 주문서를 하나로 통합해 공급자에게 넘겼다


이 협정으로 물건을 유럽으로 배송하기 위한 해운이 중앙집중화 되어 일이 훨씬 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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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영국의 식량 공급 위기였다


독일은 유틀란트 해전 이후 더 크고 강력한 규모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했다


제한된 용적 톤수 문제와 영국의 식량 문제로 골치 아픈 분위기에서


에티엔 클레망텔이 1916년 11월에 런던에서 교섭을 벌여 밀집행위원회 설립과 교통수단 마련을 위한 협정을 맺었다


여기에 서명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자국이 소모할 밀은


각자의 선박이나 밀집행위원회가 용선한 보조 선박, 대용 선박으로 수송하기로 했다


대용 선박은 협상국 혹은 중립국이 밀 수송에 쓸 용적 톤수와 교환해 용선해주는 배를 뜻했다


밀집행위원회 덕분에 빵 하나를 놓고 아군끼리 서로 머리채를 잡으며 싸우지 않게 되었다


이제 호주 밀이 영국보다 가까이 있는 이탈리아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밀을 사러 미국까지 가는 이탈리아 공선이 밀을 사러 호주까지 가는 영국 공선과 지중해에서 마주치는 일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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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12월 3일, 밀집행위원회 발족은 즉시 해운과 관련된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영불 협정으로 이어졌다


이는 해운 협의의 안정적 기반을 제공하는 대신 긴급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계약이었다는 점에서 임시방편 성격이 강했다


긴급사태의 예로 1916년 8월과 11월 사이 프랑스의 영국 석탄 수입량이 30% 감소하며 운임이 상승한 일이 있었다


협정을 통해 프랑스에 할당된 용적 톤수는 유지되었지만 그 용적 톤수를 어떻게 사용할 지는 제한하지 않게 되었다


이 협정의 가장 중요한 점은 협력을 더 풍부하고 정확한 자료를 사용해 확대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와 영국이 해운업계 고용 명세서를 매월 공유하게 되었고 


프랑스 밀을 밀집행위원회와 협의하여 운송하게 되었고


프랑스로 석탄을 운반한 선박이 갱도 버팀목을 싣고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중립국에 용선한 용적 톤수를 중앙집중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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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부는 상호 용적 톤수 협정이 가져다 줄 엄청난 이점을 환영했다


프랑스측 기록에 따르면 고통스럽고 비참한 협정 이전의 상황은


프랑스가 할당받은 용적 톤수를 완전히 자유롭게 운행할 수 있는 현 상황과 대조적이었다


프랑스가 잡은 유리한 위치를 위협하는 것은 두가지였다


첫번째로, 프랑스가 조건을 유지하지 못하면 영국이 해운을 다시 통제한다는 협정 내용이었다


두번째로, 이탈리아가 협정에 참여하면 프랑스와 같은 조건을 받아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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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보자면, 유틀란트 해전으로 독일이 결코 수상전에서 승리할 수 없음이 증명되었고


그래서 재개된 잠수함 작전이 협상국과 중립국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영국의 통제 강화 속도가 협상국의 식량, 석탄, 기타 물자 수요 증가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음이 밝혀졌다


프랑스의 약한 통제력이 잠수함 작전에 대항하기 완전히 불충분함이 밝혀졌다


프랑스는 조선을 사실상 중단했고, 사업가들이 관행 변화에 저항했고, 상선단 징발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잠수함 작전의 효과를 상쇄하기 위한 메커니즘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통제와 운임 인상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만연한 반감은 상무부장관이 영국과 유익한 협정을 맺기 힘들게 방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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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런던에선 1월 말과 2월 둘째주까지 기온이 늘 영하였다


파리에선 기온이 2월에 영하 13도까지 떨어졌고, 4월엔 영하 14도까지 떨어졌다


이 때문에 석탄 수요가 증가했다


영국에겐 많지만 프랑스에겐 슐리펜 계획 때문에 거의 없었던 석탄 말이다


석탄은 다루기 까답고 굉장히 무겁고 부피가 큰 화물이며, 석탄을 수송하는 데 석탄이 필요하다


게다가 북미와 남미의 작황이 좋지 않았다


호주에는 밀 농사가 풍년이었지만, 호주는 멀리있는 대륙이다


즉 호주 밀을 유럽으로 가져오려면 제일 많은 석탄을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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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 가격과 운임 상승은 협상국의 가장 크고 해소되지 않는 갈등거리였다


전쟁이 시작되고 1915년 11월까지 석탄 가격이 2배로 상승했다


석탄 수입량은 1913년에서 1918년까지 23% 떨어졌다


군수품 생산 때문에 급증한 석탄 수요도 생각하면 이 문제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프랑스 전쟁부는 석탄을 영국에 너무 의존하면 전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려워했다


영국은 석탄이 부족하지 않았기에 프랑스와 프랑스보다 궁핍한 이탈리아에게 석탄을 선박과 함께 공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이 국내 석탄 가격을 법으로 제한했기 때문에 협상국과 중립국이 영국산 석탄 가격을 부당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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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상무원은 영국이 필수품으로 동맹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갈취하여 증오를 사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인정했으나


어쨌거나 석탄과 선단의 주인인 영국은 수입국들에게 조건을 부과할 자격이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모든 석탄 수입 신청을 중앙집권화 하고 유통을 감독하라는 영국의 압력에 굴복해 운임을 제한해야만 했다


프랑스가 소매가를 통제하고 민간 석탄세를 도입해 석탄 상인들의 초과이익을 제한하게 되었다


프랑스 공공사업부장관 모리스 상바는 영국의 압력을 의회에 통제 강화안을 제안하기 위해 이용했다


그는 단호하게 세금 없인 석탄도 없다고 외치고 다녔다


프랑스의 내부 통제에 대한 보상으로 영국이 1916년 5월에 석탄 판매가를 제한하기로 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석탄 위원회들이 협력하며 주문을 중앙집권화 하고 용선을 감독했다


그리고 주문들의 우선순위를 결정했고 혼잡도를 고려해 석탄을 내릴 항구를 선택했으며


수출자, 선주, 프랑스 소비자를 위해 석탄 최대가를 고정했다


협정의 결과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프랑스의 석탄 수입량이 4월에 1600000톤이었는데, 곧 2000000톤으로 늘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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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국과 맺은 협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1916년 말, 잠수함 때문에 위기가 임계점에 달한 것이다


영불해협에서 수많은 배가 침몰했고


고작 15척의 유보트가 지중해에서 백만톤의 상선을 침몰시켰다


1916년 10월부터 12월에 중립국의 용적 톤수가 300000톤 사라졌다


노르웨이 배는 특히 영국 석탄을 프랑스로 운송하는 데 쓰였는데


이들이 북해와 영불해협에 진입하고 싶지 않아 항구에서 떠나기를 거부하기 시작햇다


잠수함은 간접적으로도 해운에 타격을 입혔다


11월과 12월엔 잠수함 활동이 감지되기만 해도 30~40%의 배가 항구에 발이 묶였다


12월에 영국에서 프랑스로 출발하는 중립국 상선의 수가 10월의 수치와 비교해 2/3으로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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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정부의 우려도 갈수록 커졌다


장관들이 1917년 1월과 2월에 새로 출범한 로이드 조지 정부를 찾아갔다


프랑스의 석탄 재고가 아주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기에 군사작전을 위해 더 많은 배와 석탄을 요구하기 위함이었다


2000000톤으로 늘어났던 석탄 수입량이 1200000톤으로 줄어들었다


석탄 부족 때문에 공장 120개가 문을 닫았다


한 철도 회사는 석탄 재고가 5일치밖에 없었다


파드칼레만이 충분한 석탄 재고를 보유했는데, 이곳은 영국군의 군사작전 지역이라 영국군에게 이용 우선권이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영국이 석탄 문제를 전쟁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간주해야 한다는 독촉장을 보내야 했다


문제는 중립국들이 프랑스, 이탈리아와 무역을 거부하고 영국과만 무역하기 시작해 심각해졌다


잠수함이 그걸 가리지는 않았지만 영국에게 석탄을 수입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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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인 호송선단 체계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군함에 호위받는 선단은 대항해시대 때부터 존재했던 개념이니 새로운 발상은 아니었다


게다가 병력 수송선은 이미 호위받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 해군부가 모든 배를 호송하자는 개념을 거부했다


호송선단이 거대한 과녁이고, 가장 느린 배에 맞춰줘야 하고, 배가 모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이유에서였다


민간 전문가들도 그들과 의견을 나란히 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내각장관 모리스 행키가 긴 제안서로 로이드 조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전쟁내각 회의 이후 1917년 4월 27일에 제1해군본부위원 젤리코 제독이 호송선단 체계에 동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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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호송선단 체계를 채택하도록 압력을 넣은 장본인은 사실 프랑스였다


영국 해군부를 설득한 핵심인물은 세르비아군 잔존 병력을 구출하고 코르푸로 후송한 해운 조직의 베테랑 방디에다


방디에는 1916년 12월 30일 런던에서 이는 삶과 죽음의 문제이며, 석탄 없이는 살 수도 싸울 수도 없다고 웅변했다


그는 호송이라는 단어에 영국 내각이 즉각적인 거부감을 보이자 집단 항해, 구조선이라는 표현을 제안했다


그는 영국 제독들에게도 같은 절차를 채택해야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역을 재개하기 위해 여러분 모두 어쩔 수 없이 호송선단을 편성하게 될 것이오. 과거에 프랑스는 해적으로 이미 두번이나 여러분에게 이를 강요한 바가 있소. 여러분은 다시 한번 강요받을 것이오. 본인이 요청하는 석탄 무역 조직이 여러분의 운영 능력을 시험하는 무대가 될 것이오.'


방디에가 무례한 언변으로 해군부를 설득하진 못했으나


그가 데려온 참모진이 내놓은 세심한 석탄 무역 연구는 설득에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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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해군이 여전히 호송선단이라는 단어를 싫어해 통제된 항해라는 용어를 썼지만, 어쨌거나 이 체계는 대단했다


1917년 3월과 5월 사이 4000척의 선박 중 오직 9척 만이 침몰했다


1917년 12월까지 펜전스-브레스트 경로에서 5051척의 배가 5500000톤의 선탁을 수송했는데


그 과정에서 잃은 배는 17척에 불과했다


전쟁의 나머지 동안 프랑스 석탄 무역 경로 4개에서 발생한 손실량은 전체 선박 숫자의 0.13%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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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석탄 무역 항해를 책임진 사람은 대잠수함전대장 R. G. H. 핸더슨이었다


2명의 프랑스 해군장교을 연락용으로 포츠마우스에 배치했다


그 2명은 곧 포츠마우스식 작업 방식을 파악했고, 지연을 피하기 위해 다른 항구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포츠마우스식이 뭔지는 모르겠음)


그들의 의견은 높은 평가를 받았고 제안이 바로 실행되었다


영국 빅토리6전대 제독에 따르면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제안은 고려할 가치가 충분하다.'


석탄 무역이라는 중대한 문제에서 영국 해군부가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긴 했으나 체계는 잘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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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영국 해군의 압도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고,


1917년 1월 런던에서 열린 해군 회의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자신의 제안을 강력하게 밀어붙여 실행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지중해에서 배를 보호할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가 주제로 나오자


프랑스 대표가 우샹 앞바다에서 실행되고 있던 프랑스 해군의 호송 전술을 설명했다


회의 결과 호송선단 체계를 지중해로 확대하기 전에 먼저 북해 석탄 무역에서 실험하기로 했다


여기서 행키와 조지를 설득한 주요 인물은 핸더슨이었다


그는 해군부가 호송선단에 붙여야 한다고 보고한 군함 숫자가 심각한 과장임을 둘에게 보여주었다


위에서 언급한 행키의 제안서는 사실 핸더슨의 증명과 해운부의 노르만 레슬리가 영감을 준 것이다


하지만 해군부는 여전히 납득하지 않았다


1917년 중반부턴 더이상 호송선단에 반대하지 않긴 했으나 심적으로는 아니었다


그들은 이게 해전사의 마지막 호송선단이라고 결정했고, 호송선단의 성공에 회의적인 결론을 내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커 카드를 쥔 선수는 바다를 지배하는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2월 22일, 총리가 영국에 긴급 호소문을 보내 석탄 위기로 프랑스 군수공장이 폐쇄될 지경이라고 경고했다


영국은 프랑스가 아프리카 식민지와 알자스를 교환해 평화협상을 맺는 경우를 두려워했다


방디에는 런던에서 애초에 이길 수밖에 없는 판을 벌였다


로이드 조지는 해군부에 호송선단을 강요한 공로는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이 편찬한 공식사에 따르면, 공로는 성공적인 공격을 벌인 프랑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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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디에가 런던에서 호송선단을 강요하는 동안, 독일에선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대한 논의를 끝마치고 있었다


협상국이 독일의 평화 제안을 거부하자 이 전략적 도박에 걸린 돈이 늘어났다


독일은 영국이 1916년 곡물 수송에 사용한 용적 톤수를 계산하고 영국의 척추를 부러뜨려 굶겨 죽일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잠수함에 피해가 누적된 미국이 격노하여 전력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기 전에 말이다


영국을 감싸는 모든 바다와 지중해 대부분을 작전구역으로 삼은 독일의 목표는


1달에 600000톤을 6개월 동안 침몰시켜 1917년 가을에 승리의 평화 협정을 맺는 것이었다


1917년 1월 9일 회의 이후 2월 1일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시작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자원을 공격하기로 한 독일의 결심은 1917년을 위기의 해로 만들었다


독일 잠수함은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2월부터 6월까지 평균 침몰량이 월 647000톤에 달했다


최악의 달은 4월이었는데, 영국을 떠난 원양선 4척 중 1척은 살아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하반기에 호송선단이 가치를 입증하며 손실량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또한 영국은 배에 표준화된 설계를 적용하고 찍어내며 손실에 대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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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식량을 수입에 의존했기에 특히 취약했으나, 잠수함 작전이 시작될 무렵 총리는 정력 넘치는 로이드 조지였다


그는 즉시 더 엄격한 통제에 나섰다


조지는 유능한 사업가들을 신설한 식량, 해운부에 발탁한 후 통제관이라는 단어만 봐도 명확한 지위를 부여했다


선주 조셉 맥클레이는 해운통제관이 되었고, 식료품 소매 체인점 소유주 데본포트는 해운통제관이 되었다


이 새로운 부에 이어 수입을 통제하기 위한 다양한 위원회를 설립했다


1917년 초 영국 정부는 여객선까지 포함해 용적 톤수 총징발을 결의했다


이제 수익보다 전쟁 수요가 훨씬 중요해졌다


다양한 부에서 내놓은 공급 계획을 해운부가 관장하는 용적톤수우선순위위원회가 중앙에서 통제했다


용적톤수우선순위위원회는 전쟁내각이 결정한 우선순위에 따라 선박 적재 면적을 할당했고


선박 적재 면적을 채우기 위해 배를 찾는 일은 해운통제관에게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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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2가지 조치를 추가로 취했다


그들은 1916년 12월 협정 검토를 요구하며 프랑스에 할당한 선박을 몇몇을 철수시켰다


프랑스가 어떤 배를 철수시킬지 결정하지 못하자 맥클레이가 4월 24일에 목록을 제시했다


 두번째 조치는 영국이 프랑스에서 주로 수입하는 품목이 피아노같은 사치품이었기에


수입 제한을 걸어 프랑스 무역 수지에 부적절한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이러한 통제에 프랑스인들은 분개했다


프랑스 대사가 전후 영국의 상무산업연구위원회에서 발언했듯이, 땅과 세대를 잃은 프랑스는


전선의 병사들에게 프랑스 경제생활의 톱니바퀴인 영불해협 무역이 계속될 것이라고 약속해야 했다


프랑스가 부채를 줄이기 위해선 영국에 수출을 해야 했다


프랑스에서 1914~1916년의 사상자를 근거로 우리가 특혜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미국, 포르투갈, 영국 자치령들의 특혜를 인정할 수 없다는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다


클레망소는 샹파뉴 제조자들에게 영국 시장에 접근을 거부당했는데,


정작 독일 스파클링 와인 제조자들은 영국 시장에서 구매자를 찾는 중인 황당한 상황이라는 불만을 접수했다


그러면서 영국산 럼과 진은 프랑스에 수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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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망텔, 루쇠르 등 몇몇 장관들이 영국 경제력의 우위를 인정하고 항복하며 뒤로 물러날 필요를 인정했으나


프랑스 선주들과 사업가들은 규제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영국은 1916년 12월 합의로 얻은 것보다 큰 이득을 보지 못했다


영국군이 플랑드르 공세를 계획하며 프랑스 항구에 하선한 대량의 물자 중 철쭉이 발견되어 불리한 여론이 일었다


 프랑스 수입업자들은 중립국 배를 이용하기 위해 더 높은 운임을 감수했다


한 프랑스 철도회사는 노르웨이 증기선 1척을 1달 동안 용선하며 톤당 55실링을 지불하기로 했는데


해운통제관이 부과한 영국 증기선 이용비는 41실링이었다


프랑스 식량부장관은 이런 저항을 승인하며 살해당하느니 강도질당하는 게 낫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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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 위기가 군사작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5월 4~5일에 열린 영불 해군회의에서 해운 부족 때문에 마케도니아 전역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양국 정부의 육군, 해군 조언가들은 군사 문제가 전적으로 해운 문제에 지배되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참모총장 로버트슨은 해양 병참선이 이미 파괴되었다는 과장된 표현도 사용했다


한편 미국이 참전하며 미군에게 제공할 장비와 수송선 수요 증가도 문제가 되었다


미국이 참전해봤자 무언가 할 수 있기 전에 잠수함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독일의 판단이 옳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는 미국의 비상함대위원단이 미국 조선소가 건조 중인 모든 함선의 징발을 요청하자 다시 한번 부각되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가 미국에 항의했으나


미국 국무장관 로버트 랜싱은 미국이 배에 설정한 우선순위가 자국군 수송과 보급이라고 대답했다


또한 대서양 호위용 미 군함 36척의 영국 해군 합류는 영국이 배 163척을 징발해 미국에 제공한 조치를 보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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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점점 강하게 가해지는 해운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에티엔 클레망텔이 7월 말에 런던으로 떠났다


영국의 수입 규제를 철폐하고 더 많은 배를 얻기 위해서였다


영국이 1916년 12월 협정으로 프랑스에 할당한 해운 자율권이 잠수함 활동 때문에 약화되었기에 이를 회복해야만 했다


클레망텔이 협상을 위해 취한 입장은 이러하다


12월에 프랑스로 할당된 용적 톤수가 유지되어야만 한다


프랑스와 영국이 앙상블을 구성하여 다른 협상국들에게 해운으로 물자를 공급해야 한다


그러니 프랑스의 성공은 영국의 성공에 달려있다



클레망텔은 런던으로 가기 전 이러한 견해를 담은 성명서를 썼다


그는 베르됭 전투가 끝난 후 프랑스군의 군사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영국에서 커지고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매우 우호적이나 매우 단호한 태도로 나중에 혹은 전후에는 불가능할 양보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프랑스에겐 영국에게 협력을 요구할 자격이 있었다


영국이 선호한 수요 일부를 채워주는 방식이 아니라 자원을 가능한 무조건적으로 제공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에 따르면 후자가 프랑스의 존엄과 양립할 수 있는 유일한 협력 방식이다


그러나 클레망텔은 프랑스의 상업 문화에 대한 영국의 불만이 정당함을 인정했으며


7월 전에 프랑스가 상선을 통제했다면 영국이 선박 일부를 회수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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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망텔의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프랑스에 할당된 배 숫자를 12월 협정대로 유지한다


두번째로 두 국가의 국력을 통합한다


세번째로 중립국 해운에 압력을 넣기 위해 미국의 협조를 받는다


네번째로 억류한 적국 선박, 새로 진수한 선박 사용법에 대한 합의를 이룬다


마지막으로 전후에도 일정 기간동안 전시 조치를 유지한다


총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이 포괄적인 계획은 클레망텔 정책의 성격화 범위를 정확히 드러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용적 톤수 통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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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도착하자 1916년 12월 협정의 수송 문제를 다루기 위해 런던에 파견되었던 프랑스 고등판무관 게르니에가 맞이했다


협상을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게르니에도 프랑스의 관행에 대한 영국의 불만이 비합리적이진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알렉상드르 리보 총리에게 말하길


'제공하기로 약속한 정보에 대한 체계적인 기권, 협정을 명백히 위반하는 개개인의 행위에 대한 끈질긴 관용, 심지어 은폐'


클레망텔은 프랑스가 마침내 수입과 상선을 전적으로 통제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1917년 3~5월 동안 제정된 법안은 모든 수입품에 대한 허가증을 요구했다


7월엔 석탄과 밀 가격과 소비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7월 18일엔 100톤 이하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 상선이 프랑스를 오가는 모든 배에 허가증을 부여하는 차관의 통제에 놓였다


따라서 프랑스 정부가 자기 해운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고 영국과 구입, 수송, 비축에서 하모니를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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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망텔의 친절하나 확고한 방법론은 8월 24일에 합의를 이끌어냈다


우선 프랑스의 무역적자를 약 2억 프랑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영국 시장에 프랑스 와인 수출이 다시 허가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농산물 수확에 필요한 인력과 석탄 부족을 채울 수 있도록 영국이 즉각 지원하기로 했다


프랑스로 밀을 수입하는 데 쓰일 영국 용적 톤수라는 형태로 말이다


또한 프랑스에 할당된 선박 철수를 취소하기로 했다


클레망텔은 이탈리아에 영국 석탄 대신 프랑스 남동부 석탄을 육로로 공급하고


그렇게 절약한 비용과 용적 톤수를 영국에서 프랑스로 석탄을 옮기는 데 쓰자고 제안했다


이는 배에 필요한 석탄을 절약하면서 잠수함의 위협도 줄이는 매우 실용적인 방안이었다


이러한 혁신은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를 신뢰하지 않으면 실행할 수 없는 것이었다


프랑스 역사가 조르주 앙리 수투는 협상 동안 클레망텔의 주도력과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태도를 칭찬했다


캉봉은 클레망텔이 프랑스가 당한 위협에 대해 품위있게 연설하여 청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클레망텔 상무부장관은 해운 문제에 대하여 두 정치당국이 긴밀한 협력을 구축하도록 만들었다


캉봉은 리보에게 영국이 프랑스에 했던 것과 같은 수준으로 우리가 우리 상선을 통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 사람의 개인적인 노력은


프랑스가 파트너의 더 뛰어난 관행에 적응하고 긴급히 필요한 물자에서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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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망텔은 협상 과정 중 런던에서 불길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영국은 프랑스의 방법론, 혹은 프랑스의 방법론 부재를 비난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현명하게도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운송과 자원의 통합 말이다


이전엔 필요한 자원이 생길 때마다 요청이 들어가는 식이었는데, 클레망텔이 프랑스의 수요와 자원에 대한 프로그램을 짜서


동맹에게 전체적인 그림을 보여줌으로써 영국도 자신의 패와 수송 프로그램을 보여주도록 강요했다


그는 이 상태에서 바로 9월 25일에 회의를 열자고 요청했으나 영국이 10월 16일로 연기했다


10월에 클레망텔의 마음속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인력, 석탄 부족이 초래한 식량 부족 때문에 군수부가 15일까지 용적 톤수를 전부 식량부에 빌려준 사건이었다


파리 식량 재고가 하루치만 남았기에 재앙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고, 이는 영국과 맺을 협정으로만 해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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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내각은 클레망텔이 영국 해운을 직접 통제할 생각이라 믿었기에 호의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식량 공급에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했음은 알았기에 상무원의 스탠리에게 클레망텔과 협상할 책임을 주었다


프랑스의 요구에 대한 영국의 대답은 이러했다


'자신들은 농민의 사재기를 막기엔 너무 나약하니 부족분을 대신 채워달라는 요청에 불과하다.'


그러자 클레망텔이 식량 문제를 완화할 방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프랑스로 돌아가 사임하겠다고 영국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클레망텔의 제안은 이러했다


첫번째로, 공용 수입 프로그램을 짤 수 있도록 선박을 공동으로 사용한다


두번째로, 그러한 공용 수입 프로그램에서 식량 수입을 최고 우선순위로 둔다


세번째로, 미국 정부에 협정 내용을 알리고 가입을 요청한다


1917년 11월 3일 영국 외무부에서 열린 긴 회의에서 다음 성명과 함께 협정이 체결되었다


'대영제국, 프랑스, 이탈리아 정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수확 실패, 잠수함 작전, 기타 이유로 인해 용적 톤수가 모두의 결핍분을 채우기엔 충분치 않음을 깨달았다. 각국 정부는 결핍분 중 식량이 가장 중요하여 별도로 다룰 수도 있어야 함과 동시에 수입해야 할 식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음을 고려했고, 미국을 포함한 모든 협상국이 결핍분을 수송하기 위한 용적 톤수를 제공해야 하지만 즉각적인 합의가 시급한 만큼 미국의 도움 여부에 관계없이 각자의 수송력에 비례하여 용적 톤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판단내렸다.'


이는 영국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자국 선박에 대한 통제권을 상당히 내려놓기로 했다는 뜻이다


이는 로이드 조지의 내각 무임소장관이었던 밀너의 적대감에 대한 클레망텔의 승리이기도 했다


그는 이 협정이 시간낭비이며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33.jpg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어째서 실패했는지 알아보자
 

1917년 11월이 되자 미국의 참전은 실질적인 도움이 아니라 잠재적인 도움임이 분명해졌다


왜냐하면 미국에게 병력을 수송하는 데 쓸 배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렵에 도착한 미국 고문단은 유럽 강대국들과 함께 한 회의에서 선박 부족 때문에 수송이 문제를 지배한다고 말한 후


배와 인력 중 무엇을 원하는지 질문했다


클레망텔이 보기에 영불이 합의하여 같은 입장을 취해 미국에게 답변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영불의 합의는 미국의 지원과 협상국 협력에 대한 성명서 형식이었다


용적 톤수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주장으로 시작되는 그 성명서는 


영국, 협상국, 중립국의 손실치를 제시한 후 합의한 원칙을 나열한다


용이한 비교를 위해 각국의 요구사항이 같은 형식의 그래프로 그려져 모두에게 제공되었다 


모든 중립국 및 억류된 적국 용적 톤수를 긴급한 상황이므로 즉시 사용해야지 출처를 따져서는 안 되었다


용적 톤수를 통제하기 위한 국제 해운위원회는 용적 톤수의 절대다수를 소유한 영국과 미국이 동의할 리 없기에 거부되었다




34.jpg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어째서 실패했는지 알아보자
 

회담은 1917년 11월 29일 파리에서 열렸다


프랑스와 영국의 협동 계획은 이미 작성이 끝나 있었다


해운 전문가 아서 살터, 클레망텔의 대리인 장 모네, 해운부장관 존 앤더슨, 밀집행위원회 서기장 존 비일


이 넷이 균형잡힌 프로그램을 짜기 위해 각국의 정보를 수집하고 함께 작업했다


줄어든 용적 톤수에 준거하여 프로그램을 조정하기 위해 각국의 고위 행정기구들이 끊임없이 협력했다


그렇게 탄생한 계획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연합해운의회, 즉 AMTC다


원칙은 이러했다


'협상국은 군사용, 민간용을 막론하고 모든 수입품 공급을 좌우할 선박 할당을 전쟁 수행에 가장 효과적으로 기여하고 전쟁이 초래하는 부담과 희생을 협상국들이 최대한 고르게 부담할 수 있도록 단순하고 공정한 원칙에 따라 동의했다. 



이후 AMTC를 중심으로 12개월 동안 20개의 프로그램 위원회가 점진적으로 설치되었다


영국 대표는 봉쇄부장관 세실과 맥클레이였고, 프랑스 대표는 클레망텔과 루쇠르였다


일상 업무는 각국 장관들의 감독을 받는 연합수송집행위원회가 맡았다


의장은 살터였으며, 장 모네는 프랑스 상무부 대표로 활동했다


살터가 훗날 회고록에 썼듯이,


'협상국은 더이상 별개의 기계가 아니라 각국 정부 부처가 공동의 목표를 향해 공동의 행동을 하는 기계로 통합되었다. 이는 연합 행정 기술의 새롭고 주목할 만하며 성공적인 실험이었다.'


클레망텔은 AMTC의 탄생이 전쟁경제사의 결정적인 막을 올렸다고 평가했다


그는 자기 정책을 밀어붙이기 위해 1917년의 절반 이상을 런던에서 보냈다


그는 AMTC가 가능한 모든 수입 프로그램을 압축해 미군이 프랑스로 수송될 수 있는 선박을 확보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미국이 무정부적인 재무장 조직 때문에 스스로 필요한 용적 톤수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AMTC가 탄생했다고 끝이 아니었고, 할 일이 많았다


클레망텔은 여전히 불만이 많았다


왜냐하면 수입 프로그램 압축에 따른 수입 감소 부담을 영국과 미국이 프랑스에 떠넘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제조업자들이 미국에게 20만 단의 면화를 구매했는데, 이중 18000단의 면화만이 수입되었고


나머지는 미국 항구에서 썩어갔다


한편 영국은 18만단을 수입한 후 가공하여 프랑스로 수출했다


이는 단순히 미국이 영국을 챙겨주겠다고 프랑스에 손해를 강요하는 행태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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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는 군사와 경제라는 두 층위가 있다


1차대전 군사에서 승리로 이어진 협력의 상징은 최고전쟁의회(SWC)다


군사 층위에 페르디낭 포슈가 있다면 경제 층위엔 에티엔 클레망텔이 있었다


AMTC는 잠수함에 대한 결정적 승리였다


이는 물자 수송이 가능하게 만들었고 미군이 대서양을 건널 수 있도록 만들었다


미군은 바다 위에서 어뢰보다 독감에 더 많은 사망자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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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라는 독일의 전략적 도박은 명백하게 실패했다


협상국의 선박 손실량이 여전히 건조량보다 많았지만 전쟁이 끝나기 전에 그 흐름이 반전했다


협상국의 승리는 독일의 전략에 두가지 방법으로 대응한 결과였다


첫번째 방법은 선박 손실을 줄인 호송선단 전술이다


이는 특히 미 해군이 가장 교통이 활발했던 북대서양 해로에서 활동을 시작하자 그렇게 되었다


두번째 방법은 선박이라는 부족한 자원을 분배한 협상국의 거대한 협력이다


이 덕분에 잠수함을 피해 살아남은 선박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식량 수입에 집중하기로 한 프랑스와 영국의 결정 덕분에 군수공장 노동자들이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호송선단과 AMTC로 대표되는 협력은 국제적 현대전에서 최고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연합의 예시다


모든 자원이 각자의 능력과 수요에 따라 협의되어 분배되었다


1917년의 치명적인 해운 위기에서 선주는 영국이었고, 수요가 더 많은 측은 프랑스였다


그러나 승리의 공식을 만든 것은 영국 해군부가 결정한 우선순위가 아니라 프랑스의 압력이었다


연합에서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한 파트너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언제나 협상국의 가장 강력한 검이었다




ㅊㅊ- https://www.fmkorea.com/best/8226363147

4 Comments
음바꾸 04.28 23:59  
와 분량 개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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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화 04.29 13:26  
애초에 독일은 해군이 존나약했음 그 유보트도 10척으로 대서양에서 그러고 다닌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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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tdZ 04.30 06:19  
이런건 누가 만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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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05.12 21:46  
영화 그레이하운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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