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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건너 고시엔을 노렸던 또 하나의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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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가.png 바다 건너 고시엔을 노렸던 또 하나의 학교

 
무덥던 8월의 끝을 알리듯 청춘들의 뜨거운 열정을 담은 고시엔도 마지막 경기가 오늘 펼쳐진다. 이번 고시엔에서 아마 한국인들이 가장 기대하고 있는 것이라면 교토국제고의 우승 후 수많은 일본인이 있는 가운데에서 한국어로 된 교토국제고의 교가가 나오는 것일 것이다. 교토국제고는 대한민국 정부가 공인한 민단에서 지원하는 국제 한국 학교로 학생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를 야구를 통한 홍보로 해결하고자 했고 2021년 베스트4(4강)이라는 신화 이후 일본 내에서도 주목받는 새로운 강호로 떠오르고 있다. 이번 고시엔에서도 강호 중 하나로 꼽혔으며 그 기대에 맞게 결승전까지 진출하는 대업을 달성했다. 이로써 교토국제고는 고시엔 결승에 오른 세 번째 비일본계 학교가 되었다. 



고시엔하면 일본에서 열리는 고교야구 축제라는 인식이 있기에 비일본계 학교가 고시엔에 출전한 적이 있다는 게 의외일 수 있지만 정확히 하자면 일제시기 식민지였던 만주, 대만, 조선을 대표해 고시엔에 나갔던 학교들이다. 최초로 고시엔 결승에 진출한 비일본계 학교는 1921년부터 참가했던 만주 지역에서 나왔다. 1926년에 만주 지역을 대표해 고시엔에 나갔던 다롄 상업학교가 결승전에 진출한 것이다. 그다음 결승 무대를 밟은 것은 1931년 대만을 대표해 출전한 자이농림학교(嘉義農林学校)였다. 당시 이 준우승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는데, 1928년에 창단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첫 본선 출전에서 준우승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첫 고시엔 출전에서 준결승, 그 중심의 있던 콘도매직

이러한 기적의 중심에는 감독이었던 콘도 효타로가 있었다. 콘도 효타로는 1888년 마츠야마시에서 태어나 1903년 마츠야마상고 야구부에 입단한 그는 팔과 다리가 짧고 작은 체구로, 야구에 적합한 신체 조건을 갖추지 못했으나 누구보다 야구를 사랑하고 연구에 열심이었으며, 팀을 위해 내외야를 모두 플레이하는 등 헌신적이었기에 주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그 후 모교의 야구부 감독이 된 그는 1919년에 학교를 처음으로 전국 대회에 올려놓았으나, 비극은 갑자기 연쇄적으로 찾아왔다. 부모와 조카, 누나와 장녀까지 연이은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주변을 멤 돈 것이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대만으로 건너가 교사로 일했지만 야구를 사랑하는 마음때문에 여름 방학이 되면 모교였던 마츠야마상고로 돌아와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의 이런 야구 사랑을 신도 알아준 것일까? 이전까지 약체였던 마츠야마상고는 1919년 첫 진출을 시작으로 6년 연속 고시엔 본선 진출이라는 대업을 달성했다. 이듬해 예선에서 대패한 후 감독직에서 사임했으나, 마츠야마상고가 일본에서 손꼽히는 전통 있는 야구 강호(역대 여름 우승 5회로 최다 3위)가 되는 주요 기반을 닦아놓은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대만으로 간 후에는 야구가 없는 자이상공학교의 교사직에 전념하고자 했으나 야구부가 신설된 자이농림학교의 야구부의 교장이 코치직을 의뢰하게 되면서 대만에서의 야구 지도가 시작된다. 당시 자이농림학교는 막 신설되었기에 감독 자리도 전혀 야구를 모르는 사람이 맡고 있어 대패를 당할 수 밖에 없었고, 부원 전원이 토론한 결과가 콘도 효타로를 데려오는 것이었다고 한다. 


막 신설된 패배를 거듭하는 팀에 들어가게 된 콘도 효타로가 팀의 승리를 위해 하게 된 건 스파르타식 훈련 외에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차별 없는 야구였다. 1930년 대만에 원정을 온 일본팀에 3명의 대만출신 선수가 있는 것을 보고 "야구야 말론 만민의 스포츠다."라는 걸 깨달은 그는 실력만 있으면 누구라도 야구부 가입을 허락하는 방식으로 대만 원주민, 본성인(일제시대에 대만으로 이주한 중국인), 일본인의 혼합팀을 완성했다. 


1927년 다롄 상업학교가 처음으로 비일본계 고시엔 결승을 일궈냈으나 모든 선수가 일본인이었고, 1931년 고시엔 첫 진출을 걸고 결승에서 붙었던 상대였던 타이페이상업학교는 지난 7번의 대회에서 3번이나 고시엔에 진출했을 만큼 대만을 대표하는 학교였으나 당시 구성원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KANO1.png 바다 건너 고시엔을 노렸던 또 하나의 학교
(당시 자이농림학교의 선수들 사진)


이처럼 비일본계 식민지에 세워진 학교에서도 일본인들이 주축으로 나오는 가운데에서 콘도 효타로는 출신의 차별 없는 하나의 팀으로 고시엔에 나섰다. 교내에서 운동신경이 있다고 생각되는 학생들에게는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영입했는데 테니스부에서 강한 팔힘을 자랑하던 선수를 중견수로 영입했고 마라톤부에 있던 발이 빠른 선수들도 데려왔다. 그 결과 당시 주전 선수 중에 일본인은 3명, 본성인(한족)은 2명, 원주민은 4명이었는데, 이 구성에 대해 콘도는 "일본인은 수비에 능하고, 한족은 타격이 강하며, 원주민은 발이 빠르다. 이런 이상적인 팀은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차별 없는 실력주의 팀이 보여준 기적


"야구에 민족은 상관없다. 실력 있는 사람이 타격하고 달려 점수를 내고 끝까지 수비로 지켜내면 이길 수 있다. 선수에게 필요한 건 열정과 능력 뿐이다."라는 생각하에 만들어진 팀은 창단 3년 만, 콘도가 감독으로 부임한 첫 해에 고시엔에 출전하게 된다. 5만 5천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KANO'라고 적힌 유니폼을 입은 자이농림학교는 파죽지세로 승리를 이어갔다. 첫 경기에서 3대0으로 가나가와 상고를 이긴 후, 삿포로 상고와 고쿠라 공고를 각각 19점과 10점으로 완파한 이 팀은 당시 대만에서도 라디오로 방송되며 많은 응원을 받았다. 약체로 평가받던 팀이 본토의 강호를 차례차례 격파하면서 식민지 사람들에게 본토 일본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결승전 날 많은 사람들이 전파사 앞에 모여 라디오 중계를 들으며 바다 건너 멀리에서 대만을 대표하는 선수들을 응원했으나 파란은 거기까지였다. 


일주일도 안 되는 기간 동안 3경기 완투라는 혹독한 일정을 보내야 했던 자이농림고교의 에이스 우밍제가 연투의 피로로 인해 손톱이 빠지게 되면서 공을 제대로 던질 수 없었던 것이다. 상처에 석회가루를 뿌리며 투혼으로 상대 타선을 4점으로 박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그 이전 두 경기에서 빛났던 타선이 침묵하면서 주쿄상업학교(現 주쿄다이주쿄)에게 4대0으로 패배하게 된 것이다. 상대를 공략하는 데에는 실패했던 야수들이지만 혼합팀의 아름다움은 수비에서 빛났다. 손톱이 다 빠져 피가 흘러나와 변화구의 예리함이 많이 떨어지게 되자 우밍제를 향해 "마음껏 직구 던져! 우리가 잡아낼게! 우린 대만에서 온 동료들이잖아!"라는 외침으로 우밍제는 마운드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가였던 기쿠치 히로시는 당시 이 시합에 대한 감상의 제목을 이렇게 남겼다. '눈물 넘치는 삼진족의 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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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하지 못했음에도 그 열정을 높이 삼아 전장의 영웅, 천하의 KANO라는 말을 들은 당시 자이농림학교)
 




대만 야구계의 토대를 만들고 일본으로


DNALDWP.jpg 바다 건너 고시엔을 노렸던 또 하나의 학교
(자이 시내 중심가 한복판에 있는 우밍제의 동상)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자이농림야구부는 대만의 영웅이 되었고 수많은 시민은 "콘도 만세"를 외쳤다. 콘도 감독의 이념은 대만 전역을 감동시켰고, 대만에서 일본인들의 소유물로 여겨졌던 야구가 인기를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한 번 더 콘도 감독의 지휘 아래 고시엔에 진출하기도 했으나 그 때에는 첫 경기에서 바로 탈락했다. 콘도는 그 이후 사임하고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명문팀으로 자리매김한 자이농림고교는 이후에도 3번이나 고시엔에 출전을 했고, 일본야구의 명예의 전당과 같은 야구전당으로 부터 특별 표창을 받은 우창정(고 쇼세이)를 배출하게 되었고 장제스에 의해 억압받기도 했으나 리틀야구에서 다시 그 인기가 부활하며 콘도 효타로가 남긴 유산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대만에서는 '대만 야구의 아버지'라고도 불리고 있다.



Screenshot_20240823_055535_Chrome.jpg 바다 건너 고시엔을 노렸던 또 하나의 학교
(그가 제자들에게 남긴 유일한 유품인 야구공.
그 공에는 '공에는 영혼이 깃들어있다.'라는 말이 적혀있다.)



 
KANO (1).jpg 바다 건너 고시엔을 노렸던 또 하나의 학교
 

이 이야기는 2014년에 'KANO 1931, 바다 건너의 고시엔'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어 대만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영화가 나온 10년이 지난 2024년 대만 야구 명인당에 특벌 공헌 부문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선정되며, 오 사다하루 이후 두 번째로 대만 명인당에 등록된 일본인이 되었다. 



2024.jpg 바다 건너 고시엔을 노렸던 또 하나의 학교
왕젠밍(사진 맨좌측)과 같은 연도에 명인당에 등록된 콘도 효타로(좌측에서 4번째)



※ 오 사다하루가 대만인이긴한데 일본에서는 일본인으로 치다보니 기사에서는 다 두번째라고 표기하더라구요. 일단은 그거 따랐습니다.


※ 최대한 찾아보고 쓴다고 썼는데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당연하고 일본 내에서도 많이 유명한 얘기는 아니다보니 정보를 찾기가 어려웠네요. 특히 영화화 되면서 주목도가 오른 편인데 영화 제작자들도 정보가 부족해 왼손잡이인 콘도 감독을 오른손으로 연출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혹시라도 틀린 정보나 사진(영화화 된 사진이 잘못 들어갔다던가) 있으면 댓글로 지적해주세요! 



<KANO 6분 예고편>




1 Comments
빈스파파파 08.23 13:34  
우승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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