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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사령관 페탱은 니벨 공세 이후 프랑스군을 어떻게 되살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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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74947.jpg 총사령관 페탱은 니벨 공세 이후 프랑스군을 어떻게 되살렸을까?
 

보병장교이자 에콜 드 게르 보병 교수였던 페탱은 총사령관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5월 19일에 1번 지령을 내렸다



적군의 균형은 현재 전략적 전과확대를 위한 전선돌파에 대한 어떠한 개념도 허락하지 않는다


프랑스군이 최소한의 손실만을 입으면서 적군을 마모시켜야 한다


먼 거리의 목표를 이루려는 것은 종심에서 엄호하는 포병의 화력을 희석시키고 기습이 불가능해지게 만든다


이는 그저 하찮은 결과만을 얻을 위험을 낳는다



gettyimages-162645962.webp.ren.jpg 총사령관 페탱은 니벨 공세 이후 프랑스군을 어떻게 되살렸을까?


페탱의 이러한 지령은 두겹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첫번째로, 파리에서 5월 5일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이루어진 정책 협정 덕분이다


명성과 권위를 전부 잃어버린 니벨도 참여한 이 회의에서 나온 결론은 이렇다



'공세 작전을 지속해야 한다


4월 계획은 작전불능이였다


더이상 적의 전선을 돌파하고 먼 거리의 목표물을 얻으려는 것에 대한 문제는 논하지 않는다


이제 문제는 적의 저항력을 마모시키고 탈진시키는 것이고, 이것이 달성되면 가능한 최대한의 전과확대를 위해 포병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제한된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가차없는 공세를 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우리는 최소한의 손실로 작전이 종결될 것을 기대한다'



nivelle-offensive.jpg 총사령관 페탱은 니벨 공세 이후 프랑스군을 어떻게 되살렸을까?
 

또한 페탱은 지령을 내리기 전에 니벨 공세의 계획과 작전명령에 대한 연구를 했고 이를 제출해 인정받았다


그러므로 페탱의 지령은 영국과 프랑스 정치인, 군인 양쪽의 동의를 받은 것이였다


1번 지령은 집단군, 야전군 사령관에게만 배부되었다



내용은 이렇다


'구식적이고 낭비적인 방식으로 병사들이 싸우도록 강요받지 말아야 한다


미래의 공세는 포병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인력은 절약하여 이루어져야만 한다


공세는 여러 구역에서의 연속적 달성을 목표로 하고, 공세가 적의 예비대를 묶기 위해서 가능한 신속하게 실행되어야 한다


기동력과 가용가능한 모든 자원을 배치하는 준비도는 적이 어디든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공세를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적절한 운송수단과 방어준비를 통해 전선이 준비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공세 작전을 위한 전선의 준비가 방어에도 도움이 되도록 해야한다'



217624.jpg 총사령관 페탱은 니벨 공세 이후 프랑스군을 어떻게 되살렸을까?

페탱은 이후 중부, 동부집단군 사령부에 직접 방문해 여러 장교들과 만났다


페탱은 장교들을 불러모아 놓고 검투사 사단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이제 모든 사단이 공세, 휴식, 참호 수비를 함께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후 제2 야전군 사령관 기요마가 군단은 니벨이 자신의 공세를 위해 분해한 방식이 아닌 이전의 유기적인 편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요청했다


페탱은 동의했다


다음엔 제4 야전군 사령관 앙투안이 잘 훈련받은 부대는 좋은 결과를 냈다며 최근 공세의 실패 원인은 훈련 부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페탱은 이것도 동의했다


마지막으로 페탱은 모젤 동쪽 전선은 2차 방어선과 1차 방어선의 거리가 가까우므로 4~5km 더 떨어트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Paul-Painleve.webp.ren.jpg 총사령관 페탱은 니벨 공세 이후 프랑스군을 어떻게 되살렸을까?
 

28일 페탱은 전쟁장관 팡르베와 만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설명했다



`적의 평형 상태 때문에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프랑스군은 마모되지 않고 적만을 마모시키면서 확실한 결과는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자신의 목표이다


화력은 계속해서 증강되고 있지만 야포를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옮기느라 적에게 공세 신호를 보내 기습의 효과가 줄어드는 일을 막기 위해서 더 많은 야포가 필요하다


적의 증가되는 화력을 상대로 프랑스군의 공세가 성공하기 위해선 다양한 구경의 야포, 박격포와 전차가 최근 계획으로 생산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아야하고 이것이 매우 필수적이다


철도장비, 단선, 도로도 공군과 마찬가지로 매우 필수적이다`



간단히 말해서 페탱은 모든 것을 아주 많이 원했다



39104_rd.jpg 총사령관 페탱은 니벨 공세 이후 프랑스군을 어떻게 되살렸을까?


모든 것을 많이 얻기 위한 페탱의 산업 쪽 인사는 매우 뛰어났다


페탱에게 책임을 임명받은 뒤발은 방상과 프랑스 항공산업을 위해 힘을 모았다


프랑스 공군은 산업력 차이 때문에 비행단만을 투입하는 독일 공군의 교리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프랑스가 항공기 생산 프로그램을 3월 2일에 시작한 이후로 8월 1일에 2665대의 항공기를 추가생산 하는데 성공했다


이 때 프랑스군은 2335대의 항공기를 전선에 배치하고 있었다


이는 방상이 오래된 모델의 생산을 중지시키고 원자재 가공에도 간섭해 항공기 생산 라인을 효율적으로 최적화한 덕분이였다


뒤발과 방상은 9월 6일에 2870대의 항공기를 추가생산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계획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던 로터리 엔진의 생산량은 1917년에 23092개를 찍는데 성공했다


1917년 1월의 생산량과 12월의 생산량을 비교했을 때, 엔진의 생산량은 1년 동안 2배로 증가했다


뒤발의 관심은 생산에서 기술로 넘어갔고, 프랑스 항공기가 독일 항공기보다 고고도에서 공중전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하여 Spad 13 전투기, Breguet BR 14 A2 정찰기, Breguet BR 14 B2 폭격기가 설계되고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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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4월 16일에 전차가 보인 성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독일군과는 다르게 전차를 무시하는 대신 어떻게 해야 잘 써먹을 수 있게 될까에 관심을 가졌다


전차부대 조직에 관한 교훈은 5월의 셰망 드 담 전투에서 얻을 수 있었다



기술적 교훈도 끌어낼 수 있었다


페탱은 기술적 신뢰도가 높은 전차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에스티엔느가 1916년 때부터 이에 관한 해답을 찾고 있었다


에스티엔느는 1916년에 총사령관이였던 조프르를 만나 이전보다 작은 형태의 전차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시켜 혁신을 시작시켰다


하지만 무기장관은 설득할 수 없었고 오직 프로토타입 생산만을 허가받았다


다음 총사령관인 니벨은 더욱 회의적이였다


니벨은 전차 생산에 쓰일 산업력을 차량 생산에 쏟아서 포병의 완전한 차량화를 이루는 게 더 좋지 않겠냐는 입장이였기 때문이다


에스티엔느의 꿈은 신뢰성 높은 전차를 원하던 페탱을 만나 이루어질 수 있었다


페탱은 1917년 9월에 3000대의 신형 전차를 주문했다


프랑스군은 모든 현대 전차의 조상인 르노를 대량으로 배치할 수 있게 되었다


르노는 신뢰성, 360도 포탑, 기동력, 배치의 용이성, 엔진의 위치 등 여러 면에서 참호전에 완벽하고 기동전으로의 전환에도 큰 역할을 할 전차였다



Millerand_QQG_1915.jpg 총사령관 페탱은 니벨 공세 이후 프랑스군을 어떻게 되살렸을까?
 

페탱의 또다른 업무는 총사령부를 재조직하는 것이였다


북부와 동부집단군의 데스페르와 카스텔노의 직위는 유지되었고, 중부집단군의 자기 후임으로 파욜을 지명했다


니벨의 참모장인 퐁트를 대체한 드브니의 직위가 인정되었다


그러나 총사령부 1~4과와 항공과, 특수지원과의 과장은 여러명 교체되었다


그리고 로르의 훈련단이 제3과(작전) 하부조직으로 이동했다


이는 전체 훈련도를 높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의 제병합동 능력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 페탱이 만든 가장 중요한 변화였다


이 조치로 각 병과 장교들 사이의 교류가 매우 활발해졌다


포병장교와 공병장교가 가깝게 지내고, 전차와 기병 사이의 지속적인 교류가 생겨났다


야전군과 집단군의 훈련 과정이 표준화되었고 통신수단, 기관총, 전차 특수훈련이 생겨났으며 포병장교가 특히 집중교육을 받았다


각 병과의 교육국이 신설되어 여러 병과의 장교들이 함께 강의를 들으며 의견을 나누었고, 덕분에 1차대전 이전부터 군사사상의 부재와 교리적 비통합 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던 장교교육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


로르는 야전군, 집단군, 훈련소를 뛰어다니느라 쉴 틈이 없어졌다


페탱의 이후 6월 20일 지령은 주로 통신에 관한 것이였는데, 이는 포병과 보병, 전차와 포병, 공군과 모든 육군 병과의 제병합동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였다 


페탱의 그 다음 7월 1일 지령은 보병이 전차에 친숙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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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조치 이후 페탱은 개정위원회를 설립했다


이는 소부대와 대부대의 새로운 교리를 입안하기 위한 조직이였다


그리하여 프랑스군은 지난 몇년동안 수많은 장교들이 쌓아올린 이론적 기반 위에 이전엔 없었던 방식의 전투를 건설할 역량을 얻었다


그 전투방식은 페탱이 자신의 이론을 시험하기 위해 벌인 공세 중 하나인 말메종 전투에서 역사상 최초로 기초적 형태를 드러냈다


바로 현대적 제병합동이다



sr5y1o7vck021.webp.ren.jpg 총사령관 페탱은 니벨 공세 이후 프랑스군을 어떻게 되살렸을까?

말메종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평균 1:2.5의 교환비로, 그 지형이 얼마나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고 요새화 되었느냐와는 상관없이 독일군을 쓸어버렸다


덕분에 프랑스군의 사기는 크게 차올랐고 가장 현대적인 군대임이 증명되었다


1차대전의 기술력 수준으론 프랑스군의 공세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페탱 스스로 말했듯이 이러한 성과는 전과확대와 전략 달성을 포기하여 얻은 것이였다


그러므로 전쟁의 패러다임을 기동전으로 전환시키는 일은 또다른 프랑스인의 몫이였다




 


1200px-Ferdinand_Foch_by_Melcy,_1921.png 총사령관 페탱은 니벨 공세 이후 프랑스군을 어떻게 되살렸을까?

 


 

3 Comments
유진악개 2023.01.31 13:15  
세계대전 얘기 꿀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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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World 2023.01.31 14:32  
6주

럭키포인트 6,457 개이득

REVELUV 2023.02.05 18:17  
vichy

럭키포인트 1,609 개이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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