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미스터리 > 미스터리
미스터리

Best Comment

BEST 1 오덕왕  
인재를 보는 눈은 좋은데 쪼잔함
6 Comments
조르주바타유 2022.04.24 13:27  
선조 곁에는 좋은 사람들 많았음

럭키포인트 9,901 개이득

타타 2022.04.24 13:29  
자존감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럭키포인트 1,257 개이득

핏빛혈랑 2022.04.24 17:05  
인조와 다르게 주위 신하들은 능력만땅..

럭키포인트 6,999 개이득

대통령 2022.04.24 17:12  
선조가 머리는 진짜 좋았다고 하던데

럭키포인트 19,669 개이득

오덕왕 2022.04.24 17:21  
인재를 보는 눈은 좋은데 쪼잔함

럭키포인트 3,018 개이득

고기동얼음박치기 2022.04.24 17:42  
조산보만호와 녹둔도둔전관
《선조실록》에 의하면 유성룡이 이순신을 조산보만호로 추천했다.
이순신은 녹둔도에서 병력이 적은 것을 염려하여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에게 군사를 증원시켜줄 것을 거듭 요청했지만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얼마 후 여진족의 갑청아(甲靑阿), 사송아(沙送阿) 등이 병력을 이끌고 둔전의 울타리를 포위하고 공격을 해왔다. 그러나 이 전투의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와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한 이일이 조선 측의 피해만을 거론하며 이순신을 처벌하고자 했다. 이일의 거짓보고를 받은 조정은 이순신의 처벌을 논의하였고, 지난날 그의 공적을 고려하여 백의종군을 명하였다.이후 이순신은 다음해 1월에 벌어진 여진과의 전투에서 그들의 거점인 시전부락(時錢部落)을 점령하는 공을 세워 다시 복권되었고, 그해 6월 본가가 있는 아산으로 내려갔다.

전라관찰사 군관으로부터 정읍현감
1589년 2월, 함경감사였던 이광은 전라도 관찰사가 되면서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 겸 조방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순신은 발포만호에서 파직된 지 7년 만에 다시 벼슬에 오른 것이었으며 그 해 11월에는 선전관(宣傳官)을 겸하였고 다시 12월에 전라도 정읍현감(종6품)으로 발령되어 부임하였다.

전라좌수사
1590년 이순신은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로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다음해인 2월, 조정은 이순신을 진도군수(종4품)로 임명했다가 부임하기 직전 다시 가리포 수군첨절제사에 임명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부임하기 전에 전라좌수사(정3품)로 승진되어 정읍에서 곧장 임지로 부임하게 됐다. 당시 선조는 비변사에 명하여 각기 장수의 재목을 천거토록 하였는데, 그의 능력을 잘 알고 있던 유성룡이 권율과 함께 이순신을 추천했으며, 이에 따라 관리로서 정상적인 승진 순서를 뛰어 넘어 발탁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를 두고 사간원에서 2회에 걸쳐 이순신의 승진에 대한 부당함을 말하지만,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선조의 강력한 의지 아래 이순신의 부임은 그대로 추진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옥포에서의 첫 해전을 시작으로 임진년에 4차례 출동하여 일본 수군을 격퇴하였다. 조선 수군은 경상우도 ․ 전라좌도 ․ 전라우도 수군의 연합함대였으나 실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지휘하에 있었다. 1차 출동에서 옥포해전 등, 2차 출동에서 당포해전 등에서 승리하고, 3차 출동에서 한산대첩으로 일본 수군의 전의를 완전히 꺾었다. 이후 4차 출동에서는 적의 교두보인 부산을 공격하여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1593년에도 재차 부산과 웅천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1597년에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겨우 죽음을 면하고 두 번째 백의종군을 했다.후임 원균이 7월에 칠천량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이후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죽도록 힘을 다해서 싸우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장계를 올린 후 13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나아가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을 펼쳐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를 통해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 11월,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병사(病死) 소식을 듣고 철군하려 하였는데, 이에 이순신은 일본군의 퇴로를 막기로 하였다.11월 19일,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고, “방패로 나를 가려라.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고 전사하였다.(노량해전). 이때 이순신의 나이는 54세였다.

럭키포인트 14,755 개이득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