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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남송의 대몽항쟁기 2

주성치 0 299 4 0

가사도.png 처절한 남송의 대몽항쟁기 2
가사도


밀사는 익주사령관 가사도의 수하. 그는 쿠빌라이에게 군대를 물리면 공물을 바치겠다는 밀약을 맺는다.

약속대로 쿠빌라이가 병력을 물리자 가사도는 물러나는 쿠빌라이의 후방에 경미한 공격을 가한다.

짜여진 대본을 완벽하게 소화한 이 '연기자'는 이 전공을 통해 남송의 재상에 오른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몽골군은 모두 후퇴했으며 돌아간 쿠빌라이는 쿠릴타이를 열고 내전에 돌입하게된다.

내전이 시작되자 쿠빌라이는 배후를 안정시키기 위해 가사도에게 공물을 요구하지만

재상이되니까 할만하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배짱좋게 단칼에 거부한다. 송나라 전통의 이민족 후려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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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빱나부랭이가 뭘믿고 깝치는지 궁금했던 쿠빌라이는 내전을 종결시키고 원을 세운 뒤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데

이슬람 기술자들의 공성병기와 수군까지 준비하고 훈련시킨다. 또한 이전과는 달리 병력을 집중시켜서

주요거점을 돌파하는 작전으로 수정하는데 그곳은 바로 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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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기술자 + 한족 사령관 + 각종 이민족 군대등 UN군을 연상시키는 듯한 다국적 연합군을 형성한

몽골군은 양양을 무려 10만의 대군으로 포위하였으며 전선 500척을 건조 수륙양면으로 단단히 포위했다.

시범단계에 있던 쓸 수 있는 화약무기부터 시작해서 저항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갖추고 방어태세에 돌입한

남송은 이 시기에 최첨단 기술, 최대의 인적, 물적 자원이 활용된 대규모 전면전에 돌입하게 된다.





 

9.png 처절한 남송의 대몽항쟁기 2

집념  vs  집념

이 시기는 이미 강북, 서하, 서요, 호라즘 , 동유럽, 페르시아, 고려등을 지배, 항복시킨 상황.

쿠빌라이는 양양성을 물자가 떨어질때까지 완전한 포위, 말려죽이겠다는 전략을 썼다.

그리고 이 양양성 포위는 무려 6년동이나 계속되는데.... 무한맵이냐 ㅡㅡ


본격적으로 양양성 포위를 풀기위한 남송의 눈물겨운 사투가 시작된다.

쿠빌라이는 양양성을 이중으로 포위하고 해차를 파고 성채를 쌓아 양양성을 말 그대로 섬으로 만들어버렸는데

강물이 불어난 시점에 남송의 장군 하귀가 포위망을 뚫고 양양성에 물자를 지원한 것이다.


몽골군은 당황했으나 이내 포위망을 더욱 좁히고 철저히 방비했으므로 남송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사용한다. 그 중 한 사례는 지원을 요청하기 위한 군사를 떠내려가는 풀더미 속에 위장시켜 내보내려

하였으나 몽골군이 풀더미를 땔깜으로 사용하려고 해 실패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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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렇게 되자 남송은 사력을 다해 양양성을 지원하기에 이르렀는데

1269년에는 하귀가 3000척의 전선과 5만의 군사로 지원에 나섰으나 대패하였다.

1270년에는 범문호가 2000척의 전선으로 지원에 나섰으나 또 대패하였다.

1271년에는 역시 범문호가 10여만의 수군을 이끌고 또 지원에 나섰으나 또또 실패하고 만다.


꿈도 희망도 없어보이는 양양구출작전에 도통 포기라는 것을 할 줄 모르는 남송은 결사대를 조직

3000의 결사대는 자살에 가까운 공격을 통해 포위망을 뚫고 성내로 진입하는데 성공한다.

결사대의 분전으로 사기가 오른 양양성. 그러나 외부와의 연락망을 구축하겠다며 다시 나선 결사대는

더 이상 삶을 이어나가지 못했고 그들의 시체를 본 양양성의 사기는 곤두박칠 친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11.jpg 처절한 남송의 대몽항쟁기 2
그러나 아직 우리의 양양성은 포기하지 않았다.

모든 지원이 끊겼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양양성은 여전히 건재했고 몽골의 장수들은 5년이 넘어가는

이 지루한 포위전을 타계할 방법을 찾고있었다.


몽골군 장수 장홍범은 번성이 양양과 순망치한을 이루니 번성을 함락시키면 양양 또한 더 이상 버틸힘이 없을 것이라 판단

번성을 공략하기에 이른다. 회회포의 등장앞에 번성의 성벽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니 번성을 지키던 장수들이 자결하면서

함락되고 만다.

번성의 함락소식에 양양의 분위기는 이보다 최악일 수 가 없었다. 양양성주 여문환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항전을 이어나갔으나 눈을 감으면 깜깜한 것이 미래와도 같았다.

한편 여유가 생긴 몽골군은 여문환을 회유하고 싶어했고, 계속해서 여문환은 설득한다.

여문환의 부하들마저 투항을 권고하니 결국 성문을 열고 투항하기에 이른다.


6년을 버틴 양양성의 성문이, 송나라의 대문이 열리고야 만 것이었다....




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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