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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교과서 지도에 나온것과 다른 고대 한국사 사실들

에그몽 1 570 3 0

이상한 환빠 내용 아니니 걱정 ㄴㄴ




백제1.jpg 국사 교과서 지도에 나온것과 다른 고대 한국사 사실들
 

1. 교과서에 나온것과 달리 백제는 삼국시대 최후반에 가서야 전라도 전체를 점령할수 있었다


국사 교과서에 나온 백제 영토를 보면 흔히들 근초고왕 시절 전라남도까지 전부 지배한것으로 표기되지만 현재 전라남도에서 발굴된 여러 유적과 유물을 통해 이들이 상당히 오랫동안 독립적으로 지냈음이 밝혀졌다


특히 전라남도 영산강 일대에 분포된 대규모 무덤들은 백제 왕실 무덤과 완전히 차별화된 무덤양식으로, 그 크기나 규모면에선 백제왕실 무덤을 압도한다. 학계는 이 영산강 일대에 분포했던 세력을 마한계 잔당으로 보고 있으며, 이들은 상당히 백제와 대립했지만 6세기초 동성왕 시기에 되서야 백제에 합병된것으로 추정한다


마한고분.jpg 국사 교과서 지도에 나온것과 다른 고대 한국사 사실들
 

영산강 일대에 분포했던 마한제국은 독자적으로 중국 사마씨의 서진에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고, 실제로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20여개의 속국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대표적인 무덤은 항아리 2개를 맞대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한 '옹관묘'로, 이러한 옹관묘는 삼국시대 이전엔 한반도 여러군대에 분포했지만 삼국(고,백,신)이 발전하면서 전부 사라졌으며 오직 6~7세기까지 전라남도 일대에서만 번성하였다



반파국.jpg 국사 교과서 지도에 나온것과 다른 고대 한국사 사실들
 

2. 교과서에 나온것과 달리 가야는 여섯 연맹왕국이 아니었으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제외된 국가가 많이 존재했다


교과서에선 가야를 6연맹왕국으로 가르쳤지만, 현재는 이 설은 점점 부정되고 있다. 흔히들 ~가야를 붙여서 금관가야, 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같은 형식으로 알지만 이는 삼국시대 당시로 보자면 매우 잘못된것이다. ~가야라고 붙인건 삼국시대 한참 후인 태조왕건이 그 지역에 붙인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실제로 삼국시대 가야지역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국가에 ~가야라고 붙이진 않았다


때문에 현재 학계에서는


금관가야는 금관국


대가야는 반파국


아라가야는 안라국


비화가야는 비지국


소가야는 고자국


탁기탄.jpg 국사 교과서 지도에 나온것과 다른 고대 한국사 사실들
 

이런식으로 주로 쓰고있다. 애초에 ~가야는 태조왕건때에 붙여진 이름이고 이들 여러 나라는 6연맹체라 여겨지지 않을 만큼 각자 독자적으로 행동했기에 가야연맹설이 거의 붕괴된 주된 이유이다. 물론 가야의 이전 발음인 '가라국'는 당시 지역맹주가 썼던 작위이름은 맞다. 이 '가라국'는 금관국이 본래 가지고 있었으나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금관국이 쇠퇴한 이후, 5세기경 어마어마하게 강력해진 반파국이 가로챈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는 6 가야국만 표기됐지만, 실제로는 중국과 일본의 기록에서 나오듯 수많은 소국들이 가야지역에 잔존한걸로 확실시 된다. 특히 일본에서는 가야지역의 국가를 10개 이상 표기했는데, 이 일본측 기록에서만 나오는 탁순국과 탁기탄국은 과거 실존성을 의심했으나 현재 창원에서 발굴된 유적지가 탁순국과 탁기탄국의 실존을 확실시 하면서 일본측 기록이 맞았다는 결과가 나왔다


탁기탄과 탁순국 멸망은 6세기 초중반으로 고,백,신과 더불어 한반도에는 적어도 수십여개의 소국이 삼국시대 후반부까지 존재했음이 밝혀진 셈이다



발해평양2.jpg 국사 교과서 지도에 나온것과 다른 고대 한국사 사실들
 

3. 남북국시대 평양은 발해보단 신라가 먹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현재 교과서에서 남북국시대를 표기한 지도를 보면 발해가 평양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발해가 평양을 지배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신라가 평양을 지배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나당전쟁이후 중국세력이 완전히 물러가자 신라는 북진정책을 계획하였다. 실제로 성덕왕 시대에때 쌓은 신라의 북부 영토 패강진은 점차 확대되었으며, 현덕왕시기엔 평양 근처까지 오게 된다. 일단 신라가 평양 바로 아래인 오늘날 북한 중화군까지 먹은것은 확실시 된다


고려사에선 신라가 평양을 점유했다고 기록되어있으며


삼국사기 기록에선 후삼국시기 평양성을 점유하던 성주가 금용(黔用)이었는데 궁예가 신라 북부 패서지역 호족들을 굴복시키자 같이 항복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발해보단 신라와 더욱 연관성이 있는 부분이다. 금용은 평양성주장군(平壤城主將軍)이란 직함을 지녔으나 스스로 일어난 호족으로, 중앙세력에 있었다가 따로 독립한 세력으로 보이는데 행적을 보아 신라쪽에 있었음이 확실해 보인다는게 그 이유이다


물론 평양성이 이전에 비해 황폐해 졌다는 기록도 있는지라 신라는 평양을 변경지로 여겼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참조논문


‘아리사등’, 탁순국, 그리고 백제의 관계 - ‘我久禮山戍’ 해석을 중심으로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521752


고고자료로 본 영산강유역 마한세력의 성장과 변동과정- 백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



영산강 상류 마한세력의 성장과 백제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495859 


伴跛國 位置에 대한 論議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463591


신라 浿江鎭典의 정비와 漢州 西北境의 郡縣 설치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785900 

1 Comments
광또 2022.06.30 11:59  
이정도면 교과서를 전반적으로 수정해야 되는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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