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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그린 그림이 포르투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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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png 일본인이 그린 그림이 포르투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다.


'남만병풍'


일본 미술사에 있어서 남만병풍이란,


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포르투갈인들의 내항과 풍속을 그린 병풍의 총칭을 의미해


위의 남만병풍은 가노 나이젠(1570~1616)이 1600년경에 그린 것으로,


일본 입장에서도 포르투갈과의 교역을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지만,


포르투갈사의 연구에 있어서도 그 당시 포르투갈 선박의 상세한 부분까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그림으로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아


* 위 사진의 남만병풍은 현재 고베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니 참조 요


* 가노 나이젠을 비롯한 일본인 화가들이 그린 남만병풍은, 병풍마다 세부와 필선 채색은 달라도 일반적으로 상인과 카톨릭 선교사, 그들의 배를 바라보는 일본인의 구성으로 이뤄졌으며, 흑인 노예들의 모습 또한 남만병풍에서 흔히 찾을 수 있어


image.png 일본인이 그린 그림이 포르투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다.

이 남만병풍들의 일본과 포르투갈의 교역의 역사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료임에는 의심에 여지가 없지만,


image.png 일본인이 그린 그림이 포르투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다.

16~17C 포르투갈 선박 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자료로 취급되는 것은 다소 의외일 수도 있는데,


결코 기록의 부족할 수가 없는 그 시대 유럽사의 연구에 있어 저 멀리 동아시아에 살던 일본인들의 그림이 메이저 자료로 참고되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일 거야


물론 그렇게 된 까닭이 있는데.


image.png 일본인이 그린 그림이 포르투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다.

그 이유는 바로 역사상 가장 처참했던 자연재해 중 하나로 꼽히는,


'리스본 대지진' 때문이었어


1755년 11월 1일 만성절 오전에 발생한 리스본 대지진은 그로 인한 대화재까지 동반하였고,


현대의 지진학자들이 당시의 지진을 리히터 지진계 기준 진도 9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할 정도로 엄청난 대지진이었어


image.png 일본인이 그린 그림이 포르투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다.

그리고 이 지진과 함께 솟은 불길은 무려 6일간이나 이어졌는데,


image.png 일본인이 그린 그림이 포르투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다.

이 재해로 당시 리스본 인구 27만명 중 6~10만명이 사망하였으며,


이로 인해 대항해를 시대를 열었던,


포르투갈인들의 수많은 기록과 문헌 또한 사라져 버리고 말았어


* 오늘날의 코메르시우 광장이 있는 곳에 있던 리베이라 궁전이 무너지면서 티치아노, 루벤스, 코레지오 같은 거장들의 미술품 수백점과 7만권의 장서가 소실되었으며, 바스코 다 가마를 비롯한 대항해 시시대 초기 탐험가들의 항해 기록 등을 보관하고 있던 왕실보관소와 1만 8천권의 가치가 높은 장서들이 소장되어 있던 de Lourical 후작 궁전 등도 이 때 소멸되었으며, 그곳에 있던 귀중한 자료들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지


* 리스본 대지진은 포르투갈 역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대한 일 이었을 뿐 아니라(포르투갈의 내부의 엄청난 피해 뿐만 아니라 외부로의 식민지 팽창에 있어서도 이 지진은 결정적인 타격이었다고 평가받음) 유럽 전체의 종교사와 철학사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독실한 카톨릭교도들이 많았던 것으로 유명한 리스본의 종교적 축일에 대지진이 발생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볼테르와 루소 등의 계몽사상가들은 리스본 대지진에 대해 논하면서 '종교'를 공격하였어


* 이로 인해 1755년 11월 1일은 유럽에서 신이 모든 것을 통치하는 시대가 종료되고, 인간의 시대가 시작된 상징적인 날로 평가되기도 해


* 이러한 계몽사상가들의 종교에 대한 공격에 더욱 힘이 실렸던 것은 우연적인 요소도 있었는데, 수많은 교회가 파괴된 와중에 리스본의 집창촌이었던 알파마는 경미한 피해만을 입었기 때문이야


* 한편 카톨릭 교회와 계몽사상가들이 리스본 지진에 대한 의미부여를 두고 프레임 전쟁을 벌일 때, 칸트는 지진의 원인을 '기계적'으로 설명하려는 정말 '칸트' 다운 노력을 하였어... 그는 지진의 원인에 대해서 뜨거운 기체로 채워진 지하의 거대 동굴의 이동으로 인해 지진이 발생하였다고 주장하였는데, 물론 현대 과학적으로 보면 칸트의 주장 또한 틀린 것이지만, 기존의 종교 세력은 물론 루소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 또한 지진을 '자연적 삶의 정당성을 보여주는 증거' 따위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역시 비합리적인 주장을 펼쳤던 것에 비하여 초자연적이거나 추상적인 담론이 아닌 자연현상 그 자체에서 지진의 원인을 찾으려고 했던 칸트의 노력은 지진학의 시초로서 높이 평가받아


* 이 대재앙의 와중에 포르투갈인들에게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이 대지진과 대화재로 인한 전대미문에 비극의 수습을 맡은 인물이 명재상 카르발류 였다는 것으로, 국왕으로부터 사태 수습에 관한 전권을 부여받은 카르발류는 지방에 주둔한 군대를 리스본으로 불러들여 치안을 회복하고 지진의 피해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위해 지진의 피해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하였어(여론조사는 전국의 모든 교구를 기준으로 이루어짐), 결국 카르발류는 '품발 양식'- 카르발류는 품발 후작 이었음-으로 리스본을 재건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이 품발 양식으로 재건된 도시의 건물들은 유럽 최초로 내진 설계가 이뤄졌지


* 리스본 대지진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재앙이 되었지만, 인류는 그러한 시련을 통하여. 사회적 변혁을 비롯하여, 지진학과 지진공학의 모태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야...


image.png 일본인이 그린 그림이 포르투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다.

다시 남만병풍의 이야기로 돌아와,


이 대지진의 여파로 인하여,


대항해 시대를 열었던 포르투갈 선박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저 멀리 동아시아에서 전근대 상태에 있던 일본인들의 그림이 중요한 자료로써 쓰이게 된 것이니,


리스본 대지진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앗아간 큰 재앙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거야 


* 물론 사실적 묘사를 통하여 후대에 귀중한 자료를 남겨준 가노 라이젠을 포함한 실력있던 일본 화가들의 공로는 분명히 평가받아야겠지만...


image.png 일본인이 그린 그림이 포르투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다.

번외 : 노싸 세뇨라 도스 마르티레스호와 일본인 미겔


노싸 세뇨라 도스 마르티레스(Nossa Senhora dos Marrtires) - '순교자 성모'라는 뜻을 가졌던 이 배는,


인도와 포르투갈을 왕복했던 상선으로서,


이 배의 경우는 아주 예외적으로 출항부터 난파일까지 정확하게 기록이 남고,


유물 또한 발굴되어,


'남만병풍'과 16~17C 포르투갈의 선박을 연구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평가받는데,


포르투갈어로 나오(Nao)로 불리는 캐럭선(캐럭선은 15 세기 이후에 만들어져 3개의 돛을 가진 전체적으로 땅딸막한 범선이며, 배수량은 200~1000t 정도로서 바스코 다 가마와 콜롬버스의 항해는 모두 이 캐릭선이 이용되었어)의 일종이었던 이 배는,


1606년 9월 14일 목적직인 리스본을 불과 200m 앞두고 휘몰아친 폭풍우에 의하여 침몰하였어


노싸 세뇨라 도스 마르티레스는 대량의 후추를 싣고 있던 배로서,


이 배의 침몰로 후추가 해안을 새까맣게 덮었다고 기록되었으며,


이 배에는 후추 이외에도 생강, 시나몬, 클로브, 육두구 등의 향신료와,


금으로된 비즈, 산호 장식품,


그리고 중국산과 일본산 도자기 또한 실려있었어


그리고 이 상선에서는 일본도의 날밑도 발견되었는데,


이 배에 탔던 인물들 중 '일본인 미겔' 또한 있어서 이 일본도는 그의 소지품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을 자아내기도 해


미겔의 삶에 대한 정확한 정보(일본에서 사용하던 본명을 포함하여)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때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지 6년이 지난 시점으로서,


미겔은 동남아에 정착했던 일본인 상인으로 추측되기도 하지만,


카톨릭 세례명 등을 통해 유추하여 볼 때 종교적인 이유로 일본을 떠나 포르투갈을 향한 망명객으로 추측되기도 해


어쨌든 일본인 미겔은 이 참극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며,


포르투갈 땅을 밟았지만,


이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탔고,


결국 중국에서 병사하였다고 전해져


이 일본인이 정확히 어떤 사연으로 일본에서 포르투갈로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향한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소략한 그의 삶에 흔적만으로도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지 않았을까 싶어


* 글을 마칩니다.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출처 : https://www.fmkorea.com/index.php?mid=mystery&search_target=member_srl&document_srl=3181210899&search_keyword=2046068475&page=1

5 Comments
마추픽추 2020.11.11 11:08  
고맙습니다 라는 일본어가 포르투갈어에서 왔다는 썰도 있음.

일본어 - 아리가또
포르투갈어 - 남자:오브리가도 obrigado 여자:오브리가다 obrig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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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롭박스 2020.11.12 07:34  
[@마추픽추] 아님. 이미 포르투갈과 교역하기 600~800년전 일본 수필집이나 문서 내에도 아리가토 라는 표현이 남아있음.

오브리가도랑 아리가토랑 관련있다고 믿는 순간, 수밀이국이랑 수메르랑 같은 나라 되버리는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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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리코겐 2020.11.14 18:44  
[@드롭박스] 비추실명제인가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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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롭박스 2020.11.15 20:19  
[@글리코겐] 나 비추준거아님 ㅋㅋ
글리코겐 2020.11.15 22:07  
[@드롭박스] 아니아니 님 글에 비추 박힌게 웃겨서 ㅋㅋ 님이 비추줬다는게 아니구요 무튼 좋은 정보 보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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