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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멸망에 대한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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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고구려 멸망 후 30년 뒤인 698년에 최수종이 건국했어


대조영.jpg 발해의 멸망에 대한 미스테리

1990년대에만 해도 이 시기는 우리나라 교과서에서 '통일신라시대'라고 정의했었는데,

이때까지 발해에 대한 역사에 대해 국가적 인식이 매우 낮았다고 볼 수 있겠지.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거주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거주하면서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 씨가 동남쪽에 거주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으로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가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의 땅으로, 동쪽과 서쪽, 북쪽을 개척하여 (고구려의 영역)보다 더 넒었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한 뒤에 왕씨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하였는데, 남쪽으로 김씨의 땅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었지만, 북쪽으로는 대씨의 땅을 모두 소유하지 못하여, 그 나머지가 여진에 들어가기도 하고 거란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유득공(柳得恭) [발해고(渤海考)] 1784년 , 서문 내용 中


조선 후기 처음으로 남북국이라는 개념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건국 초기 대한민국 사학계는 논란이 일었어.

발해의 역사가 냉정하게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신라보다 크지 않다고 여기고

고려 건국 시 발해 유민이 유입되었다고 하나 고려의 인구 중 5%만을 차지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바탕으로 했지.


그래서 그랬던지 2000년대 들어서 교과서에는 '통일신라와 발해' 라는 다소 완곡한 표현이 들어갔고,

이후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남북국 시대' 라고 다시 정의했다고 해


아무튼, 이 발해는 이전 고구려만큼은 아닐지라도 (확실히 몰라, 발해기 직접 남긴 기록이 없거든) 남아있는 쥐꼬리만한 기록으로도

대단한 나라였음에는 틀림이 없어. 역사를 몰라도 어디서 들었을법한 '해동성국' 이 이 나라니깐.


발해.jpg 발해의 멸망에 대한 미스테리

아무튼 건국 이후 2대왕인 무왕 대에 들어서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는지 장문휴라는 장군을 시켜 수십만의 대군으로 산둥반도에 선빵을 쳐버리지


당나라는 예전에 맞아본 비슷한 주먹맛을 보고 두려워했지만, 태종 이세민때처럼 발해를 직접 어찌할 수 있는

내부 상황이 전혀 아니었어. 

그래서 발해와 사이가 약간 어색하고 애매모호한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지.


실제로 신라와 발해가 서로 군사적으로 충돌이 있었다는 명확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현재 추론하기로는 발해가 일본을 끌어들여 신라를 견제했을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어.


3대 문왕에 들어서는 자기 아버지와는 반대로 친당 정책을 시행했고, 926년까지 228년동안 지속될 기반을 마련했지

내리막길을 걷는 당나라였지만 인정할 정도였으니 말야.


그런데, 그 강성했던 나라가 한순간에 망하게 되는데, 왜그랬을까.


2가치 추측이 있었어.


1. 백두산 화산 폭발 설


10년전만 해도 이게 거의 정설처럼 알려져 있었지.

이 당시의 백두산 화산폭발은 현재 최대의 화산폭발이라고 알려진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폭발보다 컸을 것으로 추정해

(화산폭발의 크기는 배출된 황의 양으로 어느정도 가늠하는데, 탐보라는 백두산에 쨉도 안된대..)


근데 이 당시의 백두산 폭발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거든. (아마 직접적으로 본 사람은 기록할 수가 없었겠지만..)


그래서 어느정도인지 가늠을 해보기 위해

1815년의 탐보라 화산폭발에 대해 먼저 살펴볼까?

이 화산폭발의 위력을 예측해보면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폭의 17.8만배 정도의 위력이었다고 하는데

폭발 자체로 인한 직접적인 사망자가 7만여명이었고, 반경 600km 내에서는 3일동안 캄캄한 밤이었다고 해.


화산재가 성층권으로 퍼져 지구 전체의 온도가 8년여간 1도 정도 낮아지는 결과도 낳았고,

조선 순조 대 (1814년) 인구가 790만명이었는데

1816년에는 659만명으로 130만명이나 줄어드는 것으로 보아 화산폭발로 인한 기후변화에 기근으로 시달렸을 것으로 보고있어.

심지어 뉴욕에서도 이 폭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2,600km 밖에서도 이 폭발의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가장 무시무시한건 산 꼭대기 하나가 아예 사라졌다는거지

(산 윗부분 1,470m가 날아가버려서 탐보라의 높이가 4,200m에서 2,730m 가 되었다.)


탐보라화산.jpg 발해의 멸망에 대한 미스테리
폭발 이전 탐보라 화산(추정)


탐보라화산2.jpg 발해의 멸망에 대한 미스테리
폭발 이후 탐보라 화산
 

근데 10세기의 백두산 화산폭발은 이거보다 위력이 강했고, 폼페이를 멸망시킨 베수비오 화산보다 100배는 된다고 추정하고 있어.

거기에 당시 강력하게 뒷받침 되던 가설이 발해의 건축유적이 거의 전부 자취를 감췄기 때문인데다가

발해의 수도이자 5경 중 하나인 상경 용천부 일대가 화산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현무암 지층으로 이루어져있어서

거의 정설로 인정될 뻔 했지.

(지금도 일본, 중국, 몽골 등지에서 백두산에서 분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들이 많이 발견된대.)


하지만 이게 2017년에 뒤집혀버려.

케임브리지대학 화산 연구팀에서 새로운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값을 통해 백두산의 폭발 시기를 3개월 내 오차범위로 줄이는 데에 성공했거든.

이 연구팀이 발견한 건 백두산 폭발 당시 264년 수령의 잎갈나무 화석이었어.

이 화석은 775년 지구에 영향이 있던 방사선 폭발 흔적이 있었고, 이를 토대로 나이테를 확인해 본 결과 이 나무가 생명을 다한 시기,

즉 화산이 폭발한 시기가 946년 10월~12월 사이였다는 거지.

이 연구는 [고려사] 의 '946년 하늘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다' 라는 기록과

일본의 사찰에서 발견된 연대기 중 '946년 11월 3일 하얀 잿가루가 눈처럼 내렸다.' 는 기록과도 일치하지.

발해 멸망은 926년인데 전혀 맞지가 않아.


그래서 발해가 화산으로 인해 멸망했다는 가설은 2017년대에 들어와서 확실하게 학계에서 배제되게 된다.


2. 거란에게 멸망함.


현재는 이게 가장 유력한 썰이지.

900년 초 동아시아는 말 그대로 혼돈의 카오스였어.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운 후삼국 시대가 열린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 당나라가 완전히 조각조각 박살나던 시기였어.


중국이 서로 분할되어 싸우다가 결국엔 이존욱의 후당과 야율아보기의 거란의 2파 구도가 되었지.

당시 발해는 마지막 왕 대인선이 집권할 때였는데,


조선 광해군 때 처럼 문어다리 외교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

야율아보기와 이존욱은 사이가 매우 안좋은 원수지간이었거든.

아마도(추측이야), 대인선 생각에 야율아보기<이존욱 이었을거야.


당시 후당의 이존욱의 무예와 전과가 너무나도 대단했거든 야율아보기보다 나이도 어렸고,

그래서 후당 라인을 타고 거란을 쑤시기 시작했어..

거란이 발해를 국지전 침략하자 대인선은 거란을 공격해서 요주자사를 죽이기까지 했지.


문제는.. 이 이존욱이 말년에 사치와 향락에 빠지게 되서 결국 반란에 죽게 되버려..

(물론 이존욱이 죽기 전에 거란은 후당의 상황을 이미 알고 발해를 조지고 있었어.)


거란은 이 당시부터 발해에 대해 황제와 황후까지 참가한 전면전으로 압박하기 시작해.

(참고로 이 기록들은 '요사' 에서 참고할 수 있고 이 '요사'는 중국 원나라 때 작성됐으므로 객관성이 어느정도는 있다고 여겨져)

문제는 이 기록이 너무나 단순하고 미스터리한 점이 많다는 거야.


925년 12월 14일 거란 출병 제사

925년 12월 31일 부여부(부여성)포위

926년 01월 03일 부여부 함락 후 발해 수도로 곧바로 진격 -> 중간에 만난 발해 정예군 노상군 격파

926년 01월 09일 발해 수도 포위

926년 01월 12일 발해왕 대인선 항복 선언

926년 01월 14일 대인선 흰옷을 입고 직접 나와 항복

926년 01월 17일 아보기가 전 발해 군현에 대인선 항복사실을 공지


이게 요사의 기록인데

현재도 의문을 가지고 있는 몇가지 사항들이 있어.

당시 부여성은 발해 입장에서 국경을 담당하는 아주 중요한 거점이었을 것이고, 방비가 허술하지 않았을 거라는 점.

부여성과 발해 수도의 거리는 약 500km 정도, 기병을 동원하더라도 중간에 발해의 정예군 노상군을 격파하면서

수도 함락과 항복까지 받아낸 기간이 너무도 짧은 점, 이런 점들이 매우 미스테리했지.

(여기서 '노상'은 늙은 재상인지 아니면 고유명사인지 확실하지 않아, 다만 수도에서 파견한 병력이니 정예군이었을거라는 점을 추측할 뿐)


그래서 나오는 썰들이, 내부의 분열

그리고 조금 재미있는 것이 대인선이 '흰 옷'을 입고 나와 항복하였다 라는 기록이야.

고대 국왕들은 흰 옷을 평상시에 입지 않지 (상중이거나 잘때?)

해서 당시에 큰 상중이었을 거란 예측도 있고, 노상군의 사령관이 거란에 항복했다는 설도 있고

큰 상중이어서 부여부 사령관들이 수도로 들어와있었다는 설도 있고

거란이 발해를 무너뜨리기 위해 십수년 전부터 내부분열 밑작업을 깔았다는 설도 있어.


쓰다보니 번잡하고 긴 글이 됐지만

항상 고대 한국사에 대해서 다루다 보면, 자체 기록이 없어 교차검증이 안되는게 너무나도 아쉽긴 하다.


읽어줘서 고마워!




=출처

https://www.fmkorea.com/index.php?mid=best&search_target=member_srl&document_srl=3110807212&search_keyword=1084422820&listStyle=webzine&page=1 

8 Comments
쥘레 2020.10.28 17:07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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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사랑 2020.10.29 04:29  
와 재밌다 ㄱ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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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at 2020.10.29 04:46  
이거 당서에 그것도 나오지 않나, 거란이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도 9년동안 발해의 이름으로 사신단을 파견했고, 요사에는 백두산 인근 가호 10만여 호를 요양 인근으로 강제 이주 시킴.(스탈린보다 1천년 앞선 강제이주) 그걸 보면 요나라가 겉보기에 발해 티를 벗고 소화시키는데만도 9년이 걸렸고 부흥세력이나 반란은 이후 100년을 넘게 있으니 발해 백두산설이 힘을 얻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싶죠. 국운이 기울거나 망국의 권신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광범위한 자연재해로 인한 천재가 나라를 혼란하게 한터라 정신이 오랫동안 살아남은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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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4B 2020.10.29 09:34  
아 화산폭발 썰이 배제됐구나 ㄳ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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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짱 2020.10.29 09:54  
잼난글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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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루스현아 2020.10.29 10:43  
ㄱ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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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짜 2020.10.29 14:28  
배운지 좀 되서 기억이 잘 안나는데 거란에게 멸망한 이유가 그것도 한순간에 사라진 이유가 지배계층 내분+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간의 갈등+외세침입 요거 짬뽕이라고 했던거같은데 기억이 잘 안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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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노예 2020.10.29 21:54  
매번 역사를 볼때마다 느끼지만
내정이 정말 중요함
외부세력은 어떻게 막을수 있지만
내부세력에 동요는 그대로 붕괴로 이어지기 일수라.. 신라도 시기를 잘노렸다고 봄
고구려는 수나라를 막느라 국력이 온전치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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