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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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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궁제도

조선뿐만 아니라 한민족 역사의 왕들은 기본적으로 일부다처제를 시행했다.

'후궁제도'라고 정의되는데, 왕이 한명의 정비에 여러 명의 후궁을 둔 형태를 말한다.

다만 공식적으로 부인이 한명이기 때문에 형식상 일부일처제라고 말했다고들 한다.


후궁들.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한국과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에서는 후궁제도가 존재했고,

이 후궁제도는 효(孝)를 강조하는 문화권에서 특히 성행했는데, 한국과 중국 베트남 등 유교문화 영향권에 속한다.


조선시대에는 유아~아동 시기에 약 50%가 사망했기 때문에, 정실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거나

아이가 일찍 죽는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후궁을 들였다고 한다.


후궁들2.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반면 서양과 일본의 경우 중세 이후로는 일부일처제를 '기본적' 으로 행하게 되는데

서양의 경우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고, 

일본의 경우엔 12세기 헤이안 시대까지는 존재했지만 이후 막부정치가 시작되면서부터 점차 사라진다.

쇼군이 아들이 없을 경우 양자를 들여버렸기 때문에 후궁의 존재가치가 없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일본의 무사전통은 혈연보다 군신간의 충성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2. 내명부, 외명부


'내명부'제도는 왕의 정실부인인 왕비가 여러 후궁들을 컨트롤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 내명부제도 또한 후궁제도가 있는 유교문화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제도가 자리잡히고 발전하면서 후궁 뿐만아니라 궁궐 내 궁녀를 포함한 모든 여자들을 총괄하는 시스템으로 바뀐다.


거기에 우리나라는 특이하게 내명부 뿐만 아니라 정부관료들의 부인집단인 '외명부'까지도 왕비가 수장으로서 군림한다.


image.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내외명부의 시스템을 도식화한 것으로, 궁궐 내외 여성들의 권위는 형식적으로 그리 낮지는 않았다.

외명부는 관련관직에 종사하는 관료들의 정실부인으로, 형식상으로는 같은 직급이라 인정했다.

(참고: 관료 중 참상관 까지는 조회에 참석했다.)


내명부 숙원

드라마에서 엄청 많이 나오는데, 임금의 승은을 입은 궁녀나 무수리가 가장 낮은 단계의 후궁으로 받게되는 직급이다.


숙원.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후궁 중에 최고의 지위까지 오른 경우의 호칭이다. 빈에 오르려면 최소한 '임금의 아들' 정도는 낳아야 했다.

사극에서 궁중 암투의 실세가들로서 많이 나오는 부류이다.


빈.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상궁

궁녀 중 가장 높은 직책이다. 정 5품의 높은 품계로, 상궁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이를 '제조상궁'이라고 불렀다.

제조상궁 중에는 이례적으로 정1품을 하사받은 적도 있다.


상궁2.jp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드라마 '대장금' 의 상궁, 왼쪽이 제조상궁으로 나왔다.


궁녀들은 의식주를 궁에서 해결하면서도 직급에 맡게 높은 봉급을 받았기 때문에, 상궁 쯤 되면

수만평의 땅과 기와집 여려 채를 가진 엄청난 자산가로 성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경부인, 정부인, 숙부인

당상관 고위관료의 높은 부인들로, 사실상 양반가 부인이라면 가장 아래인 유인이 제일 많았다.

조선시대 과거급제로 관직에 나가는 것이 결코 쉬운일은 아니었기에 후기에 들어서는

관직에 오르지 못한 양반남편의 부인들까지 유인으로 불렸다고 한다.


정경.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3. 세자빈


왕비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세자빈이 되어야만 했다. 

(물론 후궁에서 치고 올라가는 다른 루트도 있긴 했지만, 유교적 사회에서 그리 인정받지는 못했다.)

세자빈.jp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조선시대 세자빈 간택 절차로는

결혼 적령기가 된 양반가 처녀들의 결혼을 전국적으로 엄히 금하는 '금혼령' 선포부터 시작한다.


금혼령.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그렇게 되면 딸을 가진 양반가 부모들은 딸과 자신들의 사주와 선친의 이력들을 적어넣은 '처녀단자'를 관아에 신고하는데,

당시 양반들은 세자빈 후보 간택을 마냥 영광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딸이 왕비가 되고 나면 정치권의 극심한 견제를 받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간택에서 떨어진 처자는

다른사람에게 시집을 가기 어려웠다고 한다.

(중국의 경우는 최종시험에서 붙은 자가 정실이 되고 떨어진 나머지는 후궁이 되었다.)


그래서 당시 양반들은 '처녀단자'를 애써 신고하지 않고 숨기거나, 어린 딸을 미리 시집을 보내버려서

고려 몽골간섭기때부터 만연된 조혼제도의 풍습을 확고히 하는데 일조한다.


아무튼간에 처녀단자를 받아본 후 간택된 처자들은 집안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심정을 뒤로한 채 입궁하게 된다.

이떄 입궁하는 처자들의 모습은 아버지의 관직이나 부유함에 따라 차이가 조금 있었는데,


입궁1.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신분상승을 꿈꾸는 가난한 양반가의 처자는 겨우 몸 하나 가마에 싣고 들어오는 정도였다면


입궁2.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지체높으신 양반가의 처자는 '수모'라고 불리우는 개인 미용사부터, 의복담당사, 목욕사, 개인예절교습사까지 대동했다.


이렇게 궁에 도착한 처자들은 상궁들에 의해서

'가슴 크기', '턱 크기', '처녀의 유무' 같은 신체검사부터

신검.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먹는 모양새''걸음걸이''말투, 어조'같은 아주 일상적이고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관찰당했다.

검사.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총 세번의 테스트를 걸쳐 최종적으로 세자빈이 간택된다.

삼간택.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왕과 중전, 대비 그리고 중신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테스트 '삼간택')


하지만 세자빈 간택이 형식적인 절차일 뿐, 가문의 위상이나 정치적 당색에 맞추거나 왕권강화를 위한 견제를 위해

미리 세자빈을 정해놓고 심사하는 경우도 잦았다고 한다.


아무튼 세자빈으로 선택되면 혼례식인 가례를 성대하게 거행했고, 이것이 끝이 아니다.

세자가례.jp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세자빈 및 앞으로의 왕비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6~8 개월 동안 교육받았다...

교육.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 명 사대국가 조선답게 중국 황제의 책봉까지 받으면 정식 세자빈으로서의 절차는 끝난다.


세자빈이 세자와 첫날 밤을 함께 보내려면, 나이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가례이후 3~4년을 기다려야 했다.

(유교예법에 따라 16세 이상의 나이가 되어야 했기 때문)

세자쎆쓰.jp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아무튼 세자빈은 궁녀에게서(궁녀가 뭘 아나봄), 세자는 유모에게서 각각 가벼운 쎆쓰교육을 받고 첫날밤에 들게 된다.

(빈은 어떠한 경우에도 큰 신음을 내서는 안된다 등의 내용도 있었다.)


4. 내외명부 수장으로서의 왕비


왕비는 궁궐 안쪽의 내전 중앙에 거처했다.


경복궁도.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경복궁 왕비 거처인 '교태전'위치, 경복궁도 中)
 

때문에 중앙에 거처했다고 하여 왕비가 있는 곳을 중전이라고 불렀고, 왕비를 지칭하여 중전, 중전마마 라고도 부르게 된 것이다.


조선 초 (~성종 즈음) 까지만 해도 왕비는 왕과 동급으로 받들어져 직접 외국사신의 환영회를 열기도 했지만, 16세기 이후부터

사회적 남녀차별이 심해지며 왕비가 직접 외교적 행사를 주최하지는 않는다.


다만 가을에 왕비는 70세 이상 노인들 200명을 초청해 음식을 대접하는 '양로연'을 중궁전에서 열었다.

양로연.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18세기 후반 양로연 모습, 신분의 구분이 없이 70세이상 노인들에게 음식과 비단 등을 하사했다고 한다.

당시 70세 이상까지 살기가 힘들었으며, 더구나 하층민일수록 더더욱 어려웠으니.. 신분구분이 없었다는건 형식적.)


또 매년 기본 50회는 족히 넘는 국가제사와 잔치를 직접 주관하였고, 궁궐 경제의 기반이었던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내외명부 여인들을 거느리고 직접 뽕잎을 따는 행사도 했다.

뽕.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이런 이벤트는 고려시대부터 행하였다고 전해진다.)


흔히 왕비는 궁에서 놀고먹으며 정치판에만 끼어들었을거란 인식이 있지만, '국모'로서 왕 보다는 아니지만

바쁜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일본 쇼군의 부인은 그냥 놀고먹었다.)


조선시대 왕비의 장신구는 우아하면서도 화려했고, 현재 한류열풍의 일부분으로도 기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머리 장식은 가장 신경을 쓴 부분으로, 


가체.jp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가체' 라고 불렸다.

근데 당시 왕비의 가체와 거기에 꽂는 비녀에 들어가는 돈이 양반 기와집 한채는 우스울 정도로 비쌌기 때문

왕실금고의 지출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다고 한다.


가체만들기.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가체를 만드는 모습, 당시 인공모가 없어 사람의 머리칼로 만들기 때문에 값이 매우 비쌌다.

보통의 가체 1개는 논 5마지기(1천평) = 노비 1명의 몸값 이었다. 그런데 왕비의 가체는 그보다 비싸 기와집 한채의 값인 500냥과 맞먹었다.)


조선 후기 왕실이 부패하면서 사치가 민가에 번져 돈 있는 집마다 점점 커다란 가체를 탐하게 되고

퐝진이.jp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이대로라면 황진이는 돈이 졸라 많았다는거다.)


이는 결국 여인들의 목뼈에 무리를 주어 영조 대에는 가체때문에 목뼈가 부러져 사망하는 대형사고까지 나오게 된다.

때문에 영조는 여인들의 가체 착용을 금지시켰고, 이후 왕비들은 중요공식행사 외에는 쪽진머리를 했다.


쪽진머리.jp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그러니 영조 이후에 왕비나 상궁이 평상시 가체를 한 드라마가 있다면 고증오류인거다.

참고로 중국황후는 사치가 훨씬 심했다. 명나라 황후는 치장에 매일 2시간씩 걸렸고, 궁 전체 지출의 1/3을 자치할 정도로 소비가 엄청났다.


다만 청나라로 넘어오며 검소해져 사치가 한풀 꺾였으나, 손톱을 기르는 이상한 풍습이 생겨 신분을 과시했는데,

손톱괴물.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이는 손톱이 길면 길수록 일을 못해서 긴 손톱일수록 평소 일할 필요가 없는 귀한 신분을 뜻하게 된다.


그럼 왕비와 왕의 정사는 어떠했을까?

(정사는 정치를 돌보는 정사가 아니라 쎆쓰다.)


정사.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보통 드라마에서는 위와 같은 그림으로 몇마디 나누다가 불이 꺼지며 같이 눕는걸로 끝난다.

(후궁 같은 영화에서는 좀더 적나라하지만 어쨌든 주변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밀폐된 공간이 아닌 개방되어있는 곳에서 지밀상궁들이 주변에서 뒤를 돌아 보초를 서는 동안 쎆쓰를 했다.

때문에 몇몇 왕들은 적응을 못해 병풍을 치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어느새 적응했다고 한다.)


연로한 왕이 잠자리에 들었을 땐, 복상사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내시들이 산 닭을 미리 준비했다고도 한다.

(고혈압 증상 발생 시 좋은 특효약이 동물의 생 피라고 중세 한의학에서 정의했었기 때문.)


아무튼 왕과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후궁, 궁녀, 심지어 왕비라도 기본적으로 몸에 흉기를 지녔는지 샅샅이 검토를 했고 비녀 또한 착용을 하지 못했다고 하니, 영화 '후궁'에서 조여정이 비녀로 왕을 참살하는 장면은 사실 나오기 어렵다.


중국의 경우는 왕의 쎆쓰를 환관이 기록하여 관리되었다고 할 정도였고, 일본의 경우엔 쇼군의 승은을 입어 남자아이를 낳더라도 그 아이가 후계자로 지정되지 않는 이상 다시 궁녀로 돌아가 일상적인 일을 했다고 한다.


고부갈등.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실제로 사극에서처럼 중전과 대비는 자주 첨예하게 대립하였는데, 이는 왕비 간택을 정치적으로 재단한 결과이다.

왕의 부인이 어느 한쪽 당파의 가문출신이면, 그를 견제하기 위해 세자비는 반대 당파의 가문에서 뽑는 방식이었기 때문.

그래서 중궁전과 대비전은 서로 반대 세력인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왕의사랑.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조선시대 왕비의 위치는 이따금 바람앞의 등불보다 더 위태로워서 하루아침에 물러나야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왕비의 권력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무엇보다 '왕의 사랑'과 '왕의 생존과 왕권의 유지' 였다.

왕비가 왕의 사랑을 듬뿍 받아 왕자도 낳고 관심도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내외명부는 왕비에게 굴복하게 되지만


장희빈처럼 왕이 후궁에게 관심을 갖고 왕비에게 홀대하면 그때부터 권력의 추는 넘어가게 된 것이다.

문종의 현덕황후와 성종의 폐비윤씨가 그 예다.

하지만 후궁들이 득세하고 왕비자리를 탐내는 일이 심각해지자 숙종은 경국대전을 개편해 후궁이 왕비로 오르지 못하도록 법제화 시킨다.


단종이 갑자기 폐위되어 함께 폐비가 된 단종비 송씨는 17세 나이에 단종을 보내고 과부가 되어

82세에 죽을때까지 긴 세월을 진짜 죽은것처럼 살아야 했다.


그런가 하면 중종의 경우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세력이 옹립한 왕인데

중종비 신씨는 공교롭게도 연산군 처남의 딸이었다.

때문에 반정 대신들에게 항상 눈엣가시였고, 결국 중종은 대신들의 청을 거절하지 못해 신씨를 폐비시킨다.


5. 대비로서의 삶


조선왕조에서 대비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위치를 차지했다.

일반적으로는 중전 자리를 내놓고 대비전으로 물러나기 때문에 '뒷방 늙은이' 신세로, 매일아침 문안인사만 받으며

소일거리만 하면 되는 자리였지만, 비상시국에는 달랐다.


일단 왕이 죽거나 부재 시, 옥새는 임시적으로 대비의 소유가 된다.

옥새.jp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때문에 정변이 일어나면 대비가 그 정변을 승인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따지고 보면 고종의 즉위도 흥선군보다는 조대비의 힘이 컸던 것.


또한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를 하면 대비는 수렴청정이라는 형태로 정국을 쥐게 된다.

수렴청정.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어린 왕을 바지사장으로 앉혀놓고, 아바타처럼 원격조정 하는 것이다.)


이 수렴청정의 원조는 한나라 고조 유방의 와이프 여태후가 시초였다.


놀라운 사실은, 조선시대의 1/8 기간이 모두 수렴청정으로 통치하던 기간이라는 것.

성종의 할머니 정희대비 윤씨를 시작으로 7명의 대비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정희왕후나 인수대비처럼 평가가 괜찮은 부류도 있으나

대부분은 문정왕후나 정순왕후처럼 평가는 좋지 못하다.


대비.png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
특히 대비는 정치적 경험이나 기반이 부족해 실권을 쥔 조정세력의 입김에 좌우되기도 했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

측근을 활용한 세도정치를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혹은 정순왕후의 공노비 해방처럼 군왕 못지않은 치적을 지닌 대비도 있었으나

유교적 관습으로는 제대로 인정받는것 조차 힘들었다.


고종을 즉위시킨 조대비는 흥선군과 결탁해서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를 막았다는 점에서 인정받을 만도 한데 말이다.


오늘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의 참고자료 -


'왕후'라는 호칭은 조,종과 같이 왕비로 살다가 죽어서 붙여지는 묘호이다.

근데 사극에서는 왕후라는 표현을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쓴다...


다만 황제의 부인인 '황후'는 살아생전의 명칭이자 사후의 묘호도 '황후'이므로 

명성황후 라는 호칭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대신 민비가 죽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했으니 살아생전의 명성황후를 민비라 부르는 것도 틀리지 않은 표현이다.


대비는 조선식 명칭이며 황제국은 태후이다. 때문에 고려는 대비가아닌 태후를 썼다.( Ex. 천추태후 )


영어로는 왕의 부인과 여자 군주인 여왕이 모두 queen이나

정식 명칭은 왕비가 queen consort여왕은 queen regnant이다. 편의상 짧아지게 된 것.







*출처

https://www.fmkorea.com/index.php?mid=best&search_target=member_srl&document_srl=3141679203&search_keyword=1084422820&listStyle=webzine&page=1 

5 Comments
이카루스현아 2020.10.29 11:21  
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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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타르 2020.10.29 19:39  
정보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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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edixit 2020.10.30 01:58  
궁녀가 뭘 아나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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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제언니친정갔어 2020.10.30 12:59  
이런글 재미있다 추추
자주올려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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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가노 2020.11.02 22:19  
개잼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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