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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1 두려움과떨림  
[@말리크] 왜 비추 달렸냐;;;; 개인의견인데;;; 요즘 비추 다는새끼들 많네
BEST 2 말리크  
[@귀여운아기강아지] 당시 백제는 위에도 나와있듯 한강을 배경으로 외부 교역이 활발 했던 강국 중 하나였습니다. 남부의 평야에서 나는 농작물로 국고도 풍족한 편이었구요. 결정적으로 백제군이 강했습니다. 광개토태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침략한 백제군을 방어하다 전사할 정도로요.

 광개토태왕의 입장에서도 병력과 군량을 손실하는 소모전 보다는 적의 약점을 잡고 자원을 약탈하는 전투를 원했던 겁니다. 전투의 기술에선 빠르게 치고 빠지는 기동전과 확실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양동작전을 기반으로 했고 전쟁의 지향점은 병력 손실의 최소화와 철저한 약탈과 전리품 수집으로서 어떻게 보면 가장 수렵민족스러운 싸움을 했습니다.

 어떻게 쓰면 좋을지 준비도 되지 않은 땅은 가지고 있어봤자 기동전에서 방해만 될 뿐입니다. 멸망전이랍시고 적군을 학살하는 전면전을 할 바에야 그 병력도 노예로 부려 사용하는 것이 당시 고구려 입장에서는 훨씬 이득이었죠. 광개토태왕비문만 잘 살펴보아도 당시 고구려와 태왕이 전리품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비려(거란)를 처서 말과 소, 사람을 노획했다, 백제를 공격하여 군량미를 약탈했다, 숙신을 공격하여 조공을 바치게 했다 등 전부 전리품에대한 기록입니다. 심지어 말미에는 전쟁노예들로 하여금 고구려 왕족의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 일까지 시키죠.

 이런 점이 오히려 광개토태왕의 전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먼저 신라와 암약을 맺고 백제를 공격하여 후방을 방비한후 거란으로 갑니다. 가서 가축과 인력을 노획하는데 이는 다음 전쟁을 위한 포석이라 볼 수 있죠. 말은 전마로 쓰고 소는 전쟁물자를 이동하는 운송수단으로, 양은 식량, 사람은 노예로 씁니다. 다시 백제를 처서 군량미를 얻고 그 군량비를 바탕으로 후연을 치는 방식 등을 통해서 태왕의 전술은 단순히 적을 말살하는 총력전 보다는 약탈을 위주로 하는 국지전을 선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적국이 없어지기보단 약탈 할 만큼 버텨주길 바랍니다. 후연을 멸망시킨 후에도 북연이란 위성국이 등장하는데 역사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고구려에의해 세워진 인계철선형 속국으로 보고 있습니다.(중국역사가들도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깁니다.) 북위라는 강력한 중원의 패자국과 직접 국경을 마주하는 상황을 광개토태왕은 결코 바라지 않았을 겁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그래도 만약 태왕이 백제, 신라를 가야처럼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통일 했다 하더라도 장수왕으로 이어져 중원을 공략할 수 있었냐고 추측한다면... 역시 힘들 것으로 봅니다. 당시 중원은 오호십육국이라는 오랑케 분탕질에서 수많은 전투를 겪으며 정리된 나라였고 병력의 질과 양에서도 막강했고 자원의 양과 질에서도 고구려보다 오히려 강한 나라라고 볼 수 있죠. 만약이니까요.

 하지만 실제 역사에선 고구려가 정벌을 못했을 뿐 당나라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고구려는 태평을 누림과 동시에 강대국으로서 지위를 300년가까이 누리게 됩니다. 북위는 그나마 존속기간이 길어 148여년 정도 존소하게 되고요.
BEST 3 개집커플  
[@두려움과떨림] 친일파들인듯.
13 Comments
말리크 2018.07.09 03:22  
한 때 너무나 존경해 다양한 해석의 서적들을 탐독해 본적있습니다. 풀네임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영락제'로 꼭 요즘 더 제네럴엠페러킹갓두라고 부르는거 같아 위엄 쩔게 받았었죠.

 소년으로 왕이되어 청년으로 마무리한 삶을 돌아보면 참으로 모질고 고독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사기나 태왕비 어디에서도 태왕의 정벌사업을 보좌하는 장수, 관리 하나 찾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과거의 기록으로 몇몇 누락이 있고 당시 고구려가 전쟁영웅보다 전리품에 더 많은 가치를 두어서술했다 하더라도 이는 모든 전투의 전략과 전술을 온전히 광개토태왕이 구성하고 실행했다는 뜻이 되죠.

 왕이 직접 전투에 나서는 만큼 병사들의 사기도 올랐겠지만 한명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군대는 한번의 패배로도 큰 전의를 상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왕이 전투에서 졌다는 것은 국가가 멸망할 수도 있는 큰 리스크를 가지고 있고요. 항상 광개토태왕은 전투에 패하거나 자신이 전사했을 때 국가의 존망이 걸린다는 큰 부담을 지고 전략을 짜고 전투를 수행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전투에선 한 번의 패배도 용납하지 않았던 광개토태왕은 39의 젊은 나이로 사망합니다. 요즘 사람들 생각으론 당시의 의료환경이나 위생인식을 근거로 당시 수명을 짧게 생각하여 자연사한 것으로 볼 수 있겠으나 정작 태왕의 아들이 90을 넘겨 산 장수왕이라고 생각하면 상당히 젊은, 청년왕으로서 삶을 마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인은 과로사로 추측되고요.

 짧지만 자신의 생명을 불태워 이뤄낸 고구려는 저에게 꼭 우리민족의 가장 영광스런 왕조여서가 아닌 당시 이상적인 정복국가 모습이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으로 제게 남아있습니다. 보통 고구려의 영토를 다른 정복국가의 영토(알렉산더, 원제국, 나폴레옹, 대영제국 등)와 비교하며 폄하하기도 하는데요.

 광개토태왕의 정복은 단순히 영토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향후 고구려의 미래를 책임진 결단이었기에 더욱 값어치 있는 것입니다. 연나라, 백제 한테 털려서 망하기 일보직전의 나라를 강국의 반열에 올려놓고 이후 300년을 책임진 왕이 광개토태왕인 것이죠. 다른 정복왕조가 정복군주가 죽고 급격히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과 비교해보면 더욱 태왕의 위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태왕이 매력적인 것은 단순히 비상하고 초인적인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뒤에 붙는 호태왕에서 알 수 있듯 백성들에게도 사랑받는 왕이었다는 점. 아마 막대한 전비를 정복한 국가에서 약탈한 전리품으로 충당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는 점과 대부분의 전투를 태왕이 직접 수행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즉위 16년에는 궁궐도 증축하는데 정작 태왕은 증축한 궁궐에서 얼마 지내지 못했습니다. 왕으로 태어났음에도 삶의 대부분을 전장터에서 병사들과 함께 보냈죠. 단순히 광개토라는 머릿글에 평안호태왕이 가려져 초인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국가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 자신의 삶을 다해 싸운 솔선수범의 리더로 인식되길 바랍니다.

 저에게는 살아계신 아버지를 제외하고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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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떨림 2018.07.09 05:14  
[@말리크] 왜 비추 달렸냐;;;; 개인의견인데;;; 요즘 비추 다는새끼들 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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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집커플 2018.07.09 07:01  
[@두려움과떨림] 친일파들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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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뻐유 2018.07.09 15:11  
[@두려움과떨림] 메갈인듯, 남자면 무조건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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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izioSarri 2018.07.09 08:23  
[@말리크] 이런글에 비추가 왜케많음....;; 위에보고지리고 댓글보고 한번 더 지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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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구 2018.07.09 17:59  
[@말리크] 와 님 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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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아기강아지 2018.07.09 13:45  
백제를 멸망시켰어야지 왜 조공을받아서 ...아랫동네 신라까지 다 먹었으면 장수왕때 온전히 중국만 집중해서 조질수있었을텐대
넘모 아쉽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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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끼아또 2018.07.09 14:09  
[@귀여운아기강아지] 굳이 통일의 필요성을 못 느낀듯 지금과 한민족개념이 같은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리 고구려가 막강해도 국가 존망을 걸고 뜨는 맞짱에서 백제 신라가 뒤질각오하고 붙을텐데 고구려가 피해는 작더라도 부담이 작지많은 않을테고...  멸망전까지 가지 않아도 지배력하에 두고 중국견제하는게 더 이득이었다고 판단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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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크 2018.07.09 19:21  
[@귀여운아기강아지] 당시 백제는 위에도 나와있듯 한강을 배경으로 외부 교역이 활발 했던 강국 중 하나였습니다. 남부의 평야에서 나는 농작물로 국고도 풍족한 편이었구요. 결정적으로 백제군이 강했습니다. 광개토태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침략한 백제군을 방어하다 전사할 정도로요.

 광개토태왕의 입장에서도 병력과 군량을 손실하는 소모전 보다는 적의 약점을 잡고 자원을 약탈하는 전투를 원했던 겁니다. 전투의 기술에선 빠르게 치고 빠지는 기동전과 확실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양동작전을 기반으로 했고 전쟁의 지향점은 병력 손실의 최소화와 철저한 약탈과 전리품 수집으로서 어떻게 보면 가장 수렵민족스러운 싸움을 했습니다.

 어떻게 쓰면 좋을지 준비도 되지 않은 땅은 가지고 있어봤자 기동전에서 방해만 될 뿐입니다. 멸망전이랍시고 적군을 학살하는 전면전을 할 바에야 그 병력도 노예로 부려 사용하는 것이 당시 고구려 입장에서는 훨씬 이득이었죠. 광개토태왕비문만 잘 살펴보아도 당시 고구려와 태왕이 전리품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비려(거란)를 처서 말과 소, 사람을 노획했다, 백제를 공격하여 군량미를 약탈했다, 숙신을 공격하여 조공을 바치게 했다 등 전부 전리품에대한 기록입니다. 심지어 말미에는 전쟁노예들로 하여금 고구려 왕족의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 일까지 시키죠.

 이런 점이 오히려 광개토태왕의 전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먼저 신라와 암약을 맺고 백제를 공격하여 후방을 방비한후 거란으로 갑니다. 가서 가축과 인력을 노획하는데 이는 다음 전쟁을 위한 포석이라 볼 수 있죠. 말은 전마로 쓰고 소는 전쟁물자를 이동하는 운송수단으로, 양은 식량, 사람은 노예로 씁니다. 다시 백제를 처서 군량미를 얻고 그 군량비를 바탕으로 후연을 치는 방식 등을 통해서 태왕의 전술은 단순히 적을 말살하는 총력전 보다는 약탈을 위주로 하는 국지전을 선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적국이 없어지기보단 약탈 할 만큼 버텨주길 바랍니다. 후연을 멸망시킨 후에도 북연이란 위성국이 등장하는데 역사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고구려에의해 세워진 인계철선형 속국으로 보고 있습니다.(중국역사가들도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깁니다.) 북위라는 강력한 중원의 패자국과 직접 국경을 마주하는 상황을 광개토태왕은 결코 바라지 않았을 겁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그래도 만약 태왕이 백제, 신라를 가야처럼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통일 했다 하더라도 장수왕으로 이어져 중원을 공략할 수 있었냐고 추측한다면... 역시 힘들 것으로 봅니다. 당시 중원은 오호십육국이라는 오랑케 분탕질에서 수많은 전투를 겪으며 정리된 나라였고 병력의 질과 양에서도 막강했고 자원의 양과 질에서도 고구려보다 오히려 강한 나라라고 볼 수 있죠. 만약이니까요.

 하지만 실제 역사에선 고구려가 정벌을 못했을 뿐 당나라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고구려는 태평을 누림과 동시에 강대국으로서 지위를 300년가까이 누리게 됩니다. 북위는 그나마 존속기간이 길어 148여년 정도 존소하게 되고요.
귀여운아기강아지 2018.07.09 19:25  
[@말리크] 와우 .. 이해 쏙쏙 乃
역사학과 나오셧어요 ???
근데 고구려가 이미 영토가 엄청 넓었잔아요 광개토태왕이 확장하기전에도
근데도 인구수나 뭐 자원이나 식량이 부족했어요 ?
그리고 백제는 땅덩어리도 좁쌀만하면서 한강하나 있다고 그렇게 쌔요 ?
땅이 작으니 그만큼 숫자도 딸리는거아니에요 ?
그렇게 강했어요 백제가 ?
말리크 2018.07.09 19:55  
[@귀여운아기강아지] 아니오. 경희대 태권도학과 나왔습니다.

 고구려의 영토가 만주지역에 걸처 크게 분포되어있어 넓었지만 안타깝게도 허허벌판이라 경작도 목축도 어려운 대부분이 황망의 땅이었습니다. 러시아 영토가 넓지만 쓸만한 땅은 별로 많지 않은 것이 예가 될 수 있겠네요.(데들리그라운드)

 예 따라서 인구수나 자원 모두 부족했습니다. 이것을 광개토태왕이 약탈과 노획으로 매운거구요. 기록에 따라 유추해 보면 당시 광개토태왕이 정벌할 때 일으킨 군사 수가 4만으로 추정합니다. 이것은 정벌기 막바지까지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고요.

 백제의 경우 당시 영토는 그렇게 작지 않았습니다. 한강위까지 차지하여 평양근처에 다다를 정도였죠. 실제로 고구려를 침공해 왕을 전사시키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한강하나 있다고 센게 아니라 후방의 곡창지대, 평야(호남평야를 생각하심 쉬울겁니다.)를 가지고 있어 한반도의 타국에 비해 식량 조달이 상당히 유리했습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성장했구요.

 인구수는 논란이 많습니다만(그래서 건너편 대륙백제 설이라는 조금은 민족주의적 사관이 생기기도 합니다.)  백제가 멸망할 때 인구수가 380만(76만호)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고구려가 당나라에 망할 때 인구수보다 많은 양입니다.(350만, 69만호) 이를 바탕으로 추정해보더라도 백제의 인구수가 고구려보다 많으면 많지 결코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죠.

 우리역사라고 무조건 국뽕에 취한 민족주의적 사관을 갖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자국의 역사를 너무 폄하하는 사대주의적 사관 역시 결코 좋지 못한 것으로 봅니다. 상당한 해상무역 수준을 가지고 있었고 기록에도 북위군과 전투에서 승리했을 만큼 강력했습니다. 문화역시 칠지도, 반가사유상 등 뛰어났구요. 다만 북방의 패자였던 고구려나 삼한통일의 신라에 비해 관심도가 떨어지기 때문으로 봅니다. 백제 강했습니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을 맺여야만 멸망시킬 수 있었을 정도로요.
귀여운아기강아지 2018.07.09 20:19  
[@말리크] 캬~ 이런건 닥추 !!!!!!!
감사합니다 덕분에 알아갑니다
고라니봤다 2018.07.09 22:39  
[@말리크] 와... 비전공자이신데도 역사지식이 상당하시네요 마지막 부분은 저도 공감입니다 결과론적으로 중국과 일본이라는 막강한 나라들 사이에서 이렇게 버티고 있다는 것과 그 문화들이 계속 이어져 내려온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의 수준이 결코 낮지 않다는 걸 증명해주는 것이니까요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조선처럼 국가 초반에 좋은 리더들이 이끌어 나가고 광개토대왕 처럼 나라 중반에 걸출한 리더가 나오는(다른 국가들도 국가 중반에 좋은 리더들이 나왔지만) 패턴이 된다면 한국도 더 발전할 수 있을거 같은데 아쉽습니다
좋은 지식 얻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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