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의 위엄
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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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9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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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의 입장에서도 병력과 군량을 손실하는 소모전 보다는 적의 약점을 잡고 자원을 약탈하는 전투를 원했던 겁니다. 전투의 기술에선 빠르게 치고 빠지는 기동전과 확실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양동작전을 기반으로 했고 전쟁의 지향점은 병력 손실의 최소화와 철저한 약탈과 전리품 수집으로서 어떻게 보면 가장 수렵민족스러운 싸움을 했습니다.
어떻게 쓰면 좋을지 준비도 되지 않은 땅은 가지고 있어봤자 기동전에서 방해만 될 뿐입니다. 멸망전이랍시고 적군을 학살하는 전면전을 할 바에야 그 병력도 노예로 부려 사용하는 것이 당시 고구려 입장에서는 훨씬 이득이었죠. 광개토태왕비문만 잘 살펴보아도 당시 고구려와 태왕이 전리품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비려(거란)를 처서 말과 소, 사람을 노획했다, 백제를 공격하여 군량미를 약탈했다, 숙신을 공격하여 조공을 바치게 했다 등 전부 전리품에대한 기록입니다. 심지어 말미에는 전쟁노예들로 하여금 고구려 왕족의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 일까지 시키죠.
이런 점이 오히려 광개토태왕의 전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먼저 신라와 암약을 맺고 백제를 공격하여 후방을 방비한후 거란으로 갑니다. 가서 가축과 인력을 노획하는데 이는 다음 전쟁을 위한 포석이라 볼 수 있죠. 말은 전마로 쓰고 소는 전쟁물자를 이동하는 운송수단으로, 양은 식량, 사람은 노예로 씁니다. 다시 백제를 처서 군량미를 얻고 그 군량비를 바탕으로 후연을 치는 방식 등을 통해서 태왕의 전술은 단순히 적을 말살하는 총력전 보다는 약탈을 위주로 하는 국지전을 선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적국이 없어지기보단 약탈 할 만큼 버텨주길 바랍니다. 후연을 멸망시킨 후에도 북연이란 위성국이 등장하는데 역사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고구려에의해 세워진 인계철선형 속국으로 보고 있습니다.(중국역사가들도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깁니다.) 북위라는 강력한 중원의 패자국과 직접 국경을 마주하는 상황을 광개토태왕은 결코 바라지 않았을 겁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그래도 만약 태왕이 백제, 신라를 가야처럼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통일 했다 하더라도 장수왕으로 이어져 중원을 공략할 수 있었냐고 추측한다면... 역시 힘들 것으로 봅니다. 당시 중원은 오호십육국이라는 오랑케 분탕질에서 수많은 전투를 겪으며 정리된 나라였고 병력의 질과 양에서도 막강했고 자원의 양과 질에서도 고구려보다 오히려 강한 나라라고 볼 수 있죠. 만약이니까요.
하지만 실제 역사에선 고구려가 정벌을 못했을 뿐 당나라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고구려는 태평을 누림과 동시에 강대국으로서 지위를 300년가까이 누리게 됩니다. 북위는 그나마 존속기간이 길어 148여년 정도 존소하게 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