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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주의] 17세기 조선, 멧돼지 인간 요괴 기담

BusterPosey 1 996 1 0

17세기는 역시 조선최고의 요괴시대. 홍만종(洪萬宗,1643-1725년)의 17세기 텍스트 [순오지]에는 이런 기담이 적혀 있습니다.



순오지(旬五志)

멧돼지 노인과 목객


함흥 사람 김 진사가 관동지방(關東地方) 깊은 골짜기를 지나다 구석진 촌에 묵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잠을 자려는데 쇠사슬이 달그락거리는 것같은 소리가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다. 마치 쇠로 만든 말고삐가 요동치는 것 같았다. 아침이 되자 김 진사는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장 집에 길들지 않은 말이라도 있소이까? 쇠사슬 소리가 끊이지 않아 한숨도 못 잤습니다그려."


"말이 아니라 저희 할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저희 할아버지는 연세가 얼마나 되셨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백 세는 이미 옛날에 넘으셨지요. 멧돼지처럼 온몸에 털이 났는데, 아무리 굶어도 배고프지 않고 또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은데다 사람의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늘 뛰쳐나가시려 하는데, 그 기세가 대단한데다 일단 나가면 어디로 가 버리는지 찾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쇠사슬로 묶어 놓았는데, 늘 쇠사슬을 흔들어 대며 끊어 버리려고 하세요. 그래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주인 역시 그 까닭은 모르겠다는 것이다. 


옛날 월나라 왕 구천이 회계산에 있을 때, 오나라에 화해를 요청한 적이 있는데 그러자 오나라왕은 기이한 무늬가 있는 나무를 구해달라고 요구했다. 구천은 나라 백성들을 시켜 깊은 산을 뒤지게 했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찾지 못했다. 그 백성들은 굶주림을 못 견뎌 풀과 나무열매로 배를 채웠는데, 그랬더니 온몸에 털이 나서 아무리 세월이 가도 죽지않고 산속에 머물게 되었다. 수백년뒤 그 사람들을 목격했다는 자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바위 골짜기를 나는 듯이 뛰어넘는데, 마치 새가 나무사이를 나는 것처럼 빠르더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을 '목객'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 진사가 만났던 노인 또한 배고픔을 참고 곡식을 먹지 않다가 기이한 짐승으로 변했으니, 월나라의 목객과 비슷한 부류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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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함흥출신의 어떤 이가 강원도를 유람합니다. 관동 지방(關東地方)은 강원도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지요.  지금도 한국최고의 명산들과 유재석을 모를 정도의 마을이 있는 강원도입니다만, 조선중기에는 그야말로 깊디 깊은 산골짜기였습니다.


강원도에서도 깊은 골짜기의 어떤 마을에 함흥에서 온 이 사람이 묶게 되었는데 밤에 신경을 긁어대는 쇠사슬 소리가 계속 나서 한잠도 못잡니다. 주인에게 무슨 소리냐 물었더니 돌아온 답변이 아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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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100세가 넘은 본인의 할아버지가 멧돼지인간이 되었는데 자꾸 뛰쳐나가려 해서 쇠사슬로 묶어 둔 것이라는 기괴한 이야기를 합니다. 어쩌다가 그리 되었냐고 물으니 주인은 이유를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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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멧돼지요괴 기담


이 기담 하나만 해도 기괴한 느낌이 드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또 하나의 멧돼지요괴 기담이 발견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번째 이야기가 앞선 이야기와 연결되는 느낌이란 것입니다. 2000년대 들어서야 번역본이 출간된 역시 17세기의 텍스트인 [천예록]에는 이런 기담이 전합니다.


천예록(天倪錄)

승평의 집안사람이 늙어서 멧돼지로 변하다


승평 김상공의 집안 사람으로 먼 시골에 사는 이가 있었다. 그는 백세가 다 된 노인이었다.


어느 날 그의 아들이 김상공의 집을 찾아와 뵙고자 하였다. 김상공은 들라 하여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일은 각별한 비밀을 요하옵니다. 그런데 마침 손님들로 북적대니 밤이 되면 여쭈겠나이다." 


이윽고 밤이 되어 손님이 물러가고 조용해지자 김상공은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저희 아버지는 춘추가 저렇게 높아도 평소 병 한번 걸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시더군요. '내 오늘 낮잠을 자려고 하니 너희들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거라. 경솔하게 문을 열고 들어와선 안되느니라. 내가 부르거든 그때 문을 열어라." 그래서 저희들은 그 말씀을 따라 밖으로 나가 있었지요. 하지만 날이 저물도록 조용하기만 할 뿐 저희를 부르시는 소리는 들리지 않더군요.


저희들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몰래 엿보니 이런, 아버지는 이미 한 마리 큰 멧돼지로 변해 있었습니다.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라 문을 밀치고 들어가니 멧돼지가 요란한 소리를 지르며 벽을 부딪쳐 뚫고 나가려고 요동을 치고 있었지요. 저희들은 즉시 문을 닫아버리고 친척들을 모아놓고 이를 어찌할지 의논을 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집안에 두고 기르자고 하는 분도 있고, 죽여서 묻어 장례를 치뤄주자는 분도 있었지요. 그러나 저희들은 벽촌의 무지랭이라 이렇게 감히 달려와 상공께 아뢰니 바라옵건데 깊이 통찰하시어 변통의 예로 가르쳐 주옵소서."


김상공은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랐다. 골똘히 생각한 끝에 일렀다.


"이 일은 만고에 없던 변고이니라. 따라서 나도 합당한 도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만, 굳이 내 생각을 말하자면 비록 이물로 변하였지만 죽기 전에는 늙었다고 땅에 묻어서는 결코 안될 줄로 아느니라. 그렇다고 이미 사람이 아닌 이상 집안에 두고 보살핀다는 것도 또한 안될 일이지 않느냐. 하물며 매번 뛰쳐나가려고 한다니..... 산과 숲이 바로 그가 살 토굴이 될 것이니, 큰 산속 인적이 드문 곳으로 떠메다가 버리는 것이 이치에 합당할 듯 하구나."


그 아들은 이 말을 옳다고 여겨 마침내 김상공이 가르쳐준 대로 깊은 산속으로 떠메어다 버렸다. 그리고 발상을 하여 아버지가 입던 의관을 묻고, 멧돼지로 변한 그날을 기일로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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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내용은 역시 첫번째 이야기과 비슷합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느날 멧돼지화되어 방을 뚫고나가려해서 고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피면 흥미로운 구석이 많은 이야기입니다. 우선, 천예록의 저자인 임방(任埅, 1640~1724년)의 생몰년도는 첫번째 기담이 담긴 [순오지]의 저자 홍만종(洪萬宗,1643-1725년)과 거의 완전히 같은 시대입니다. 고작 3년의 나이차고 사망한 해도 일년차죠.


그러니 동시대의 멧돼지 기담을 어디선가 두 저자가 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주의깊은 분들은 눈치채셨겠지만, 첫번째 [순오지]의 집주인에게 멧돼지요괴는 '100세 이상의 할아버지'이고, 두번째 [천예록]의 화자에게는 '아버지'입니다. 


만약 같은 요괴를 두 기담이 다루고 있다면, 쉽게 말해 두번째 나오는 멧돼지인간의 이야기가 더 '전시대'가 되어야 합니다. 결정적으로 첫번째 이야기는 '처음부터 우리할아버지는 멧돼지요괴'라는 설정이고, 두번째 이야기에서는 '갑자기 아버지가 멧돼지화해서 고민거리'라는 것이므로 내용상으로도 두번째 이야기가 근원적입니다.


그런데 설명드렸다시피 두 저자의 생몰년대는 같습니다. 따라서 두 텍스트의 시대로 두 기담을 단순비교하기는 어렵지요. 결정적으로또한 멧돼지 인간을 다루고 있지만, 두번째 텍스트에는 '지역' (강원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단순비교가 힘들어보이지요. 그런데, [천예록]의 저자 임방은 아주 귀한 '주석'을 글 뒤에 달아두셨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이것은 "고성(高城)의 늙은이와 승평공 친족의 일이다".


승평 김상공은 전라남도 순천출신인 김유(김류, 金瑬)를 뜻하고, 고성군(高城郡)은 강원도의 동해안 최북단에 있는 군을 말합니다. 아래 북한과 걸쳐있는 곳이 고성군입니다. 그러니까 이 일대의 산중고을에서 이 기담이 발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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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1) 순오지 멧돼지요괴기담- 저자연대 (1643-1725년), 멧돼지요괴 (이미 설정, 화자의 할아버지), 기담배경 강원도

2) 천예록 멧돼지요괴기담- 저자연대 (1640~1724년), 멧돼지요괴 (인간에서 요괴화, 화자의 아버지), 기담배경 강원도 고성군지역


순오지의 멧돼지요괴는 화자의 할아버지로 이미 100세를 '이미' 넘겼다고 했습니다. 즉 100세가 아니라 나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고령입니다. 순오지자체가 1678년의 작품이니 첫이야기의 멧돼지요괴 기담시대를 1660~70년대정도로 잡으면 저 할아버지는 1560년대이전에 태어난 것이 됩니다. 그런데, 두번째 이야기의 화자는 '김유'라는 사람의 친척이라고 나옵니다. 이 '김유'의 생몰년대를 보면 흥미로운 접점이 나오지요.


김유 (김류, 金瑬)의 생몰년도는 1571년~1648년입니다. 그런데 화자는 김유보다는 아랫연배로 '아버지'가 되는 멧돼지인간은 이미 이 기담의 시점에서 100세로 나옵니다 (앞서 순오지에선 '100세를 이미 넘기고 몇인지 알수도 없다'라고 했지요). 천예록의 간행시기가 1600년대초반이므로 당연히 김유보다 앞선 세대로 추정이 가능하며 1570년대생의 한세대 앞, 최소 20년전이 되므로, 1550년대 이전이 태어난 시점입니다. 아주 비근하게 연대가 들어맞는 셈입니다.


이 두 기이한 이야기는 그저 기담에 불과하다고 넘길 수 있지만, 연대와 내용상 두 이야기가 기막히게 연계되는 느낌이 있어 실증적으로 흥미로운 구조입니다. 다만, 천예록에서 아버지를 산골에 버렸다고 나오는데, 같은 대상을 이야기한 것이라면 손자대에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는 가정을 해야 합니다.


1 Comments
EXID 2017.11.09 20:20  
어쩌면 치매걸린 노인을 멧돼지라고 한거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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