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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호 침몰 사건 - 돌아오지 못한 강제 징용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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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호 침몰 사건


1945년 8월 22일, 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은 전범재판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을 부산항으로 송환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부산항에 도착했어야 했던 우키시마호는 24일 대한해협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로 침몰하고 말았다. 그 결과 사랑가는 가족을 떠올리며 고향으로 돌아오던 수많은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은 억울하게 목숨을 잃게 되었다.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사망자가 500여 명이라고만 밝혔을 뿐 정확한 탑승자 명단과 사고 경위를 공개하지 않고 사고 후 수년 동안 선체 인양과 유해 수색을 미루었다. 그리고 2014년 우키시마호에 8000여 명의 조선인이 타고 있었다는 사실이 공개되었다. 게다가 2016년에는 이 배에 폭발물이 실린 정황이 기록된 문건도 드러났다.


고의 침몰?


부산항으로 향하던 우키시마호는 8월 24일 돌연 일본 중부 연안의 마이즈루 항으로 항로를 바꾸었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났고 배는 침몰했다. 일본은 당시 미군이 설치한 기뢰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한국은 일본의 계획적인 범죄라고 주장했다. 일본 해군이 우키시마호를 일부러 폭파시켰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건의 생존자분들의 증언은 일본의 말과 상당히 달랐다. 


다음은 생존자분들의 증언 내용이다.


김동천씨(충북 영동)


당일 일본 해군들은 한국 사람들은 선실 안에 들어가라했다. 그리곤 자기들끼리 보트를 타고 내리는 것이 의아했는데 갑자기 '쾅'하는 폭발음과 함께 배가 두 동강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배가 가라앉으면서 바다는 온통 기름 투성이었고 사람들은 모두 기름으로 까맣게 덮여 있었다. 여자와 어린애들은 거의 다 죽었다. 갑판 위에 있다 민간인 어선(구조선)에 의해 살았다. 당시 배에는 7500명 정도의 한국인이 승선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 사고로 2500명만 살고 나머지는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당초에는 송환 한국인을 원산항에 내려 놓는다고 했는데 돌연 마이즈루만으로 들어갔다.


김수득씨(경북 상주)


사고 당일 항해 중 해군들이 미친 사람처럼 날뛰며 몽둥이를 휘둘렀고 한국인들을 모두 선실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우키시마호가 폭발하기 직전 배 중앙부에서 해군들이 탈출하는 것을 보았는데 해군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뒤 잠시 후 ‘쾅’폭발 소리가 들렸다. 순간 바다에 떨어져 떠다니는 보따리를 잡고 있다 민간 어선에 의해 구조됐다. 이 사고로 아내와 자식을 모두 잃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찾으려고 해안가로 나갔는데 시체가 퉁퉁 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4∼5일 뒤에도 수천 구의 시신이 해안가로 밀려왔지만 누가 누군지 몰라 찾을 수 없었다.


한세열씨(충북 영동)


우키시마호가 마이즈루만에 들어갈 때 해군들과 장교들이 모두 빠져나갔는데 바로 배가 폭발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해군이 의도적으로 저지른 폭파 침몰이었다. 이때 장인, 장모, 손아래 처남과 임신한 부인을 잃었다.


오상필씨(서울 중랑구)


우키시마호를 타면 밥도 주고 배 삯도 받지않고 고국으로 돌려 보내준다고 해 아오모리현의 한국인 거의가 승선했다. 부산으로 간다고 하던 배가 갑자기 마이즈루만으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쾅’ 소리가 나더니 다시 ‘쾅’하며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허리를 크게 다쳐(갈비뼈 2개 부러짐) 기어서 6개월 된 딸을 간신히 안았다. 바다에는 빠진 사람이 올챙이처럼 많았다. 민간어선을 타고 구조되었다.


이재석씨(경기도 의왕시)


 “우키시마호가 오미나토항을 떠나 항해할 때 승무원이었던 군인들이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눠주며 ‘오늘만 넘기면 부산에 무사히 갈 수 있을 텐데…’라고 여러 차례 지껄이고 다녔는데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라 이상하게만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이는 일본이 처음부터 한국인들을 귀국시킬 의도가 없었으며 조선인을 배와 함께 바다에 수장시킬 사전계획이 있었음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채길영씨


943년 징용 당시부터 45년 8월24일 우키시마호 폭침 때까지의 상황을 적은 ‘일망후 상담 경력사(日亡後 相談 經歷事)’라는 제목의 기록에서 그는 한국인 승선자가 1만 2천여 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우키시마호 승선하기 하루 전날 일본인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이 땅속에 감춘 물건을 모두 꺼내 바다에 버리자 조선인들이 이를 서로 가지려고 다투자 일본인들이 하는 말이 ‘만약 무사히 3일을 지난다면 주는 것이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며 일본이 계획적으로 우키시마호를 폭파시켰다고 주장했다. 또 기록에는 우키시마호가 폭파하기 직전 일본군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조선인들에게 하층으로 내려가라고 내몬 후 군함에 딸린 소형 배들이 일제히 육지로 나간 후 배가 침몰했다고 밝히고 있다.


http://blog.naver.com/babarycho/16673466 이것은 생존자 최석준씨의 인터뷰 내용이다.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폭발음이 3~4회 들렸다고 증언했다. 기뢰에 의한 폭팔이라면 폭발음이 여러번 들리는 것은 이상하며 수십 m의 물기둥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런 것 또한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1954년 선체를 인양했을 당시 배의 선체가 모두 바깥쪽을 향해 구부러져 있었다는 것도 자폭설의 근거로 제기된다. 수뢰에 의한 것이라면 안쪽으로 구부러져 있는 것이 정상이다. 여러 정황상 일본의 고의 폭침에 무게가 실리고 있지만 1954년 일본이 선체를 고철로 판매해 버려 원인을 규명할 증거가 남아있지 않다.


아직까지도 이 사건의 진상조사나 일본 정부의 사과나 배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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